투수는 던지면 던질수록 강해진다?
  • 배지헌│베이스볼랩 운영자 (.)
  • 승인 2015.09.22 10:19
  • 호수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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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한화 감독, 권혁·박정진 선수 혹사 논란

김성근 감독식 야구를 둘러싼 갑론을박 중 ‘투수 혹사’는 가장 뜨거운 논란을 부른다. 9월16일을 기준으로 권혁(32)은 74경기에서?107.2이닝을, 40세의 박정진은 76경기에서 96이닝을 투구했다. 둘은 불펜 혹사지수에서 나란히 1, 2위를 달리고 있다.

김성근 감독의 투수 혹사 과거에도 논란

현대 야구와 스포츠의학은 하나같이 ‘투수 보호’를 주장한다. 무리한 투구를 계속하면 부상은 물론 선수 생명까지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본다. 김성근 감독은 ‘혹사가 아닌 성장’이라 말한다.?한 인터뷰에서는 “권혁이 올해 처음 100이닝을 던졌으니 앞으로는 계속 100이닝을 던질 수 있는 투수가 된 것”이라 했다. 어느 쪽 손을 들어줘야 할까.

역대?KBO 리그에서 대표적인 혹사 사례로 꼽히는 투수들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자. 여기서는 다승·평균자책점 등 팀 동료의 지원이 필요한 기록 대신 타석당 볼넷 퍼센트(%), 타석당 탈삼진 퍼센트, 수비 무관 평균자책점(FIP, 수비의 영향을 완벽히 제외하고 오로지 투수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삼진·볼넷·홈런·사사구·고의 볼넷 등을 가지고 평균 자책점과 같이 나타낸 것), 대체선수 대비 기여 승수(WAR) 등 투수의 실력을 잘 설명해주는 진보적 통계를 활용할 것이다.

불펜 투수로 100이닝을 넘긴 한화 투수 권혁(32)과 김성근 감독(왼쪽)을 둘러싼 혹사 의혹은 프로야구 5위 싸움만큼 뜨거운 논쟁거리다. ⓒ 연합뉴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김성근’과 ‘혹사’를 키워드로 검색할 때 나오는 가장 오래된 기사는 태평양 돌핀스 감독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사에서는 신인급 투수 박정현과 최창호가 전반기에 ‘혹사당하다시피’했다고 지적하며 하반기 레이스에도 계속 호투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그해 고졸 2년 차 투수 박정현은 38경기에 등판해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242.2이닝을 던졌고, 3년 차 최창호도 38경기?223.1이닝을 투구했다. 여기에 대졸 신인 정명원도?38경기 139.1이닝으로 구원투수로는 매우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이후 태평양 신인 투수 트리오는 어떻게 됐을까. 1989년 최창호는 WAR 5.6, 박정현은 5.2, 정명원은 2.8로 팀내 투수 1~3위를 차지했다. 세 투수를 합친 WAR은 13.6인데, 이것은 팀이 2진급 투수 대신 세 투수를 기용해서 추가로 거둔 승수가 13.6승에 달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태평양 마운드의 이후 10년을 책임질 것 같던 트리오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인 1990년 제일 먼저 정명원이 후유증을 겪었다. 1989년 2.95로 수준급이었던 FIP는 다음 해 4.73으로 치솟았고, 타석당 11.91%였던 삼진율도 8.03%로 내려앉았다. 데뷔 시즌 2.8이던 WAR은 -0.2로 폭락했다. 박정현 역시 1989년 준플레이오프에서 입은 허리 부상으로 하락세가 시작됐다. 1989년 11.96%였던 타석당 탈삼진 비율은 1990년 8.44%, 1991년 6.02%로 떨어졌고, 1989년 2.96이던 FIP도 1990년 3.26, 1991년 3.97로 악화됐다. 1993년에는 아예 부상으로 한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했고, 이후 다시는 이전의 구위를 보여주지 못했다(1994~2000년 6년간 WAR 합계 -0.2).

김성근 감독을 둘러싼 혹사 논란은 삼성으로 자리를 옮긴 1991년에 다시 한번 되풀이됐다. 삼성에서는 재일교포 출신 김성길이 도마에 올랐다. 그해 36세 노장이었던 김성길은 52경기에 등판해 188이닝 16승 12패 18세이브를 기록했다. 233.2이닝을 던진 1989년보다는 적게 던졌다. 하지만 당시에는 선발로 등판한 경기가 대부분이었다. 반면 1991년에는 불펜 전문으로 던졌다는 게 차이점이다. 1991년 12.37%였던 김성길의 타석당 탈삼진은 이듬해 9.65%로 하락했고, FIP는 3.75에서 5.29로 치솟았다. WAR도 1991년 1.9에서 이듬해 -0.2, 1993년에는 -0.1로 하락했다. 김성길은 1993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고 쓸쓸히 일본으로 돌아갔다.

쌍방울로 팀을 옮겨서는 중간계투 요원 김현욱이 논란의 대상이 됐다. 삼성 시절 눈에 띄는 성적을 내지 못하던 김현욱은 1996년 49경기에 등판해 좋은 투구를 선보였고, 1997년 무려 70경기에 나서 157.2이닝을 던지고 20승을 기록하며 최초의 ‘중간계투 20승 투수’가 됐다. 1997년 김현욱의 WAR은 4.2승으로 특급 선발 에이스와 견줘도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FIP는 2.33, 타석당 탈삼진율은 22.5%로 ‘닥터 K’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기록이었다. 하지만 다음 해 김현욱의 WAR은 0.9로, FIP는 3.74로 크게 하락했고 타석당 삼진율도 17.71%로 내려갔다. 2000년부터 좋은 모습을 되찾긴 했지만, 은퇴 시즌인 2004년까지 계속 무릎 부상과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혹사 이후 5년 만에 돌아온 투수 이동현

LG의 김성근 감독 시절 동안 2001년 신윤호와 2002년 이동현은 혹사를 말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이름이다. 2001년 신윤호는 1997년 김현욱과 비슷한 방식으로 기용됐다. 구원투수로 70경기에 등판해 144.1이닝을 투구했고 15승과 18세이브를 함께 기록했다. WAR은 2.1, FIP는 3.96으로 그해 LG 투수진 중 가장 뛰어났다. 하지만 한 시즌 ‘불꽃’을 활활 태운 신윤호는 이후 다시는 2001년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했다. 2002년에는 WAR -0.2, 2003년에는 WAR -0.3을 기록하더니 2004년 WAR -1.0으로 던지면 던질수록 팀에 손해가 되는 기록만 남겼다.

더 안타까운 사례는 2002년 고졸 2년 차 투수였던 이동현. 이미 데뷔 시즌인 2001년 선발로 33경기  105.2이닝을 투구한 이동현은 2002년 불펜에서 78경기 124.2이닝을 던지며 LG가 치른 대다수의 경기에 모습을 비쳤다. WAR은 1.3, 타석당 탈삼진율은 20.54%를 기록하며 LG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여기에 플레이오프에서 13.2이닝, 한국시리즈에서 8.2이닝을 추가로 던지면서 스무 살 어린 투수로는 무리한 등판 일정을 이어갔다. 

이듬해 이동현은 거의 모든 기록이 하락했다. FIP는 3.72에서 4.85로, WAR은 1.3에서 0.1로, 타석당 탈삼진율은 20.54%에서 13.29%로 폭락했다. 2004년 WAR 1.4로 잠시 살아나는 듯했지만, 시즌 중인 8월 팔꿈치 통증으로 일찍 시즌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토미존 수술을 받으며 기나긴 재활을 시작했다. 이동현이 다시 마운드에 돌아온 건 5년 후인 2009년이었다.

김성근 감독의 SK 시절 투수들도 자주 혹사 논란에 시달렸다. 2009년 106이닝, 2010년 89.2이닝을 던진 좌완 이승호는 2011년 이후 지난해까지 4년간 WAR -0.4로 부진의 늪에 빠졌다. 2009년 49경기에서 133.1이닝을 던지며 WAR 4.2을 올린 전병두도 하락세를 거듭하다 2011년을 마지막으로 마운드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2010년 WAR 4.8로 리그 최고 좌투수 대열에 올랐던 김광현은 2011년 6월 22일 8이닝 동안 147구를 투구하며 ‘벌투’ 논란을 불렀다. 이후 김광현은 어깨 부상에 시달리며 2013년까지 기나긴 침체기를 보냈다.

김성근 감독의 지론과 달리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성장’한 투수보다 오랜 기간 통증과 부상에 시달리거나, 쓸쓸하게 유니폼을 벗은 사례가 눈에 들어올 뿐이다. 2015년 현대야구와 의학 발전을 역행하는 살인적인 혹사를 경험하고 있는 한화 투수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감독은 자기 임기 내 성적에만 관심이 있을 뿐, 선수의 야구 인생을 책임져 주지는 않는다.
 

2002년 이후 구원투수 최다투구 권혁… 그가 위험하다

권혁은 2015년 한화 이글스 야구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권혁은 전반기에만 50경기에 등판해 76.1이닝을 투구했다. 자신의 한 시즌 최다이닝 3위(2004년 81이닝, 2009년 80.2이닝)에 해당하는 이닝을 시즌 절반 동안 던진 셈이다. 이에 야구인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권혁의 혹사에 우려를 표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후반기 9월16일 기준으로 권혁은 24경기 31.1이닝을 추가로 던지며 데뷔 이후 처음으로 한시즌 100이닝을 돌파했다. 권혁의 시즌 투구수는 2033개다. KBO 홈페이지에서 시즌 투구수를 제공하는 2002년 이후로만 집계하면 구원 투수로는 2002년 삼성 노장진(2214구), 2002년 LG 이동현(2049구) 다음으로 많은 공을 던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등판 패턴을 감안하면 남은 경기 동안 노장진의 기록을 넘어설 가능성도 적지 않다. 전반기 4.01이던 권혁의 평균자책점은 후반기 7.18로 치솟은 상황이다. 김성근 감독이 생각하는 권혁의 ‘성장’이 어떤 결과로 끝나게 될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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