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박이’ 수류탄 폭발 사고에 구멍 뚫린 軍
  • 대구=서정혁│영남일보 기자 (.)
  • 승인 2015.09.22 10:03
  • 호수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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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50사단 사고 원인 ‘불량 수류탄’ 의혹…1년 전 해병대 폭발 사고와 유사

9월11일 오전 11시15분쯤 대구 육군 제50사단 신병교육대대 수류탄 투척 훈련장. 손 아무개 훈련병(20)이 안전 참호에 들어섰다. 손 훈련병의 뒤를 이어 교관이 참호로 들어갔다. 중앙통제소에서 “안전핀 뽑아”라는 구령 소리가 흘러나왔다. 뒤이어 중앙통제소에서 “던져”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 명령에 맞춰 손 훈련병은 “던져”라고 복창했다.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사고는 이 순간에 일어났다. 손 훈련병이 복창과 함께 수류탄을 들고 있던 팔을 뒤로 막 젖힐 무렵, ‘펑’하는 소리와 함께 수류탄 훈련장은 일순간 아수라장이 됐다. 당시는 50사단에 입소해 있던 강철부대 55기 소속 훈련병 200여 명이 입대 3주 차를 맞아 수류탄 훈련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이 사고로 교관인 김원정 중사(27·상사로 추서)가 크게 다쳐 경북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날 낮 12시53분쯤 숨졌다. 고 김원정 상사와 함께 참호 안에 있던 손 훈련병은 오른쪽 손목이 절단되는 중상을 입고 경북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참호 밖에 있던 박 아무개 중사(27)도 다리와 발목, 팔꿈치 등 신체 7군데에 파편이 박혀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당시 수류탄 투척 훈련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훈련병들은 폭발 장소에서 30m가량 떨어져 있어 추가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칫 수류탄 사고로 인해 더 큰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 있었던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 시사저널 우태윤

수류탄 투척하기 직전 폭발

수류탄 폭발 사고 직후 군 관계자는 “수류탄 불량 여부와 과실 가능성에 초점을 두고 수사할 것”이라며 “부상당한 훈련병의 상태가 안정돼야 신뢰성 있는 답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조사 결과가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설명했다. 사고 원인과 관련해서는 ‘불량 수류탄’일 가능성에 초점이 모였다. 사고 당시 정황이나 피해 상황 등을 고려할 때 단순 과실보다는 수류탄 자체 결함으로 인한 오작동 가능성에 무게가 더 실렸기 때문이다.

군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수류탄은 손 훈련병이 투척하기 직전 폭발했다. 당시 안전 참호에 들어간 손 훈련병은 수류탄을 던지기 위해 손을 뒤로 완전히 젖힌 상태였고, 손 훈련병 바로 뒤에 김 상사가 있었다. 혹시 모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훈련병과 함께 수류탄을 파지(손으로 쥠)하고 있었다.

문제가 된 수류탄은 K413(KG14) 세열 수류탄으로, 살상 반경은 10~15m로 알려져 있다. 터지면 1000여 개의 미니 쇠구슬 파편이 튄다. 유족들은 김 상사의 몸에 박힌 파편 100여 개가 상반신 쪽에 집중돼 있다는 점을 들어 수류탄 불량으로 인한 폭발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봉식 계명문화대 군사학부 교수는 “수류탄은 강한 폭발에 의해 쇠구슬이 위로 치솟은 후 퍼진다”며 “손 훈련병이 수류탄을 든 손을 뒤로 젖힌 상태에서 터졌다면 폭발 비상 각도상 폭발 지점 바로 앞에 있는 김 상사가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손을 잡고 있거나 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김 상사의 정면에서 수류탄이 터졌다는 말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언론의 관심은 지난해 9월16일 발생한 포항 해병대 수류탄 폭발 사고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날 오전 10시20분쯤 경북 포항시 오천읍 해병대 교육훈련단 수류탄 투척 훈련장에서도 입대 3주 차인 박 아무개 훈련병(19)이 들고 있던 수류탄이 갑자기 터졌다. 박 훈련병은 오른쪽 손목이 절단되는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숨졌다. 함께 있던 교관 황 아무개 중사(26) 등 2명은 수류탄 파편을 맞아 병원으로 옮겨져 파편 제거 수술을 받았다. 사고 당시 해병대 측은 “중앙통제소의 ‘안전핀 뽑아’ ‘던져’라는 지시에 따라 박 훈련병이 ‘던져’라고 복창한 후 수류탄을 던지려는 순간 갑자기 터졌다”고 밝혔다. 해병대가 밝힌 폭발 상황은 이번 대구 50사단 수류탄 폭발 사고와 판박이처럼 닮았다. 유사한 두 사건의 핵심은 ‘수류탄 불량 여부’에 있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김광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사고가 발생한 9월11일 육군과 국방기술품질원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토대로 “대구 50사단에서 터진 수류탄과 같은 종류의 수류탄이 이미 지난해 치명적인 결함 판정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김광진 의원의 주장은 일부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다. 육군 50사단 신병 교육 훈련 중 폭발한 수류탄은 1년 전 포항 해병대에서 발생한 유사 폭발 사고의 수류탄과 같은 생산 라인에서 제조된 것이었다.

사고에 부실 대응으로 문제점 드러내

애초 군 관계자는 두 수류탄의 로트 번호(생산 연도와 생산 라인 등을 문자와 숫자로 표기한 것)가 다르다고 국방부 출입기자들에게 해명했다. 하지만 9월14일 국방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두 수류탄의) 로트 번호가 동일하다”며 “같은 로트 번호를 가진 수류탄 5만5000여 발을 보유 중이며, 이 가운데 교육용으로 나눠준 것이 1만5000발”이라고 밝혔다. 특히 지난해 포항 해병대 폭발 사고 직후 조사에 나섰던 국방기술품질원이 같은 로트 번호를 지닌 수류탄 1010발을 비파괴 검사한 결과, 수류탄 불량은 아니라는 결론을 냈지만 1년 만에 유사 사고가 발생해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국방부 관계자는 “기술품질원이 실시한 기술시험에 오류가 있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조사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의혹이 커지자 국방부는 9월16일 50사단 신병훈련장에서 폭발 사고를 일으킨 수류탄(2005년 생산된 경량화 세열 수류탄)과 같은 생산 라인에서 만들어진 수류탄 5만5000여 발을 전량 회수해 정밀 검사를 시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번 사태를 거치며 군의 폐쇄적 문화가 여전한 데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군대 내 사건·사고의 경우 국민의 관심이 높다. 사건·사고의 피해자가 누군가의 아들·형제·친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가 통제돼 있는 탓에 불안감은 더 크다. 이 때문에 군대 내 사건·사고는 신속·정확하게 개요와 피해 사항 등을 전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군은 그에 대한 의무가 있다. 하지만 9월11일 사고가 발생한 후 50사단은 사고 관련 공식 브리핑을 단 한 차례도 실시하지 않았다.

사고 발생 직후 여러 언론사에서 취재를 시도했지만, 휴가 중이던 공보관을 제외하고 사고 관련 전화를 받던 50사단 관계자는 박 아무개 중령뿐이었다. 기자들의 문의 전화가 폭주하는 상황에서 박 중령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기 부족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국민에게 사건·사고를 전달하는 언론조차 정확한 ‘팩트’를 파악하기 힘든 상황이었던 것이다.

국방부도 사고 발생 몇 시간이 지나도록 “원인 파악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아들을 군에 보낸 직장인 이 아무개씨(49·대구시 달서구)는 “군대 내 사건·사고 소식이 들리면 자식을 군에 보낸 부모들의 불안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며 “군대가 평상시에는 보안을 철저히 지켜야겠지만, 사건·사고로 무고한 장병이 다치거나 사망했을 땐 정확한 정보를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 그게 국방의 의무를 지고 있는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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