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뜻 모르는 초등 5학년 동민이
  • 박상희 인턴기자 (.)
  • 승인 2015.09.02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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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활용 못하는 ‘기능적 문맹’ 초·중학생 10만명 추산…초등학교 현장 집중취재

3교시 수업이 한창인 서울의 한 초등학교 5학년 교실에는 홀로 초점 잃은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아이가 있다. 동민(가명·남)이는 오늘도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다. 교과서 내용도, 교사의 말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열심히 수업을 듣고 문제도 푸는데 동민이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동민이는 여느 때처럼 몸만 교실에 남겨둔 채 6교시 내내 혼자만의 세계에서 외로운 시간을 보낸다.

동민이는 또래처럼 어렸을 때 한글을 깨쳤다. 담임교사는 동민이가 기초적인 읽기·쓰기는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일상에서의 글 활용은 거의 불가능하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실. 이 교실에도 동민이처럼 교사의 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 ⓒ 시사저널 포토

“공부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

음독(音讀) 문제였다. 소리 내어 읽을 때 더듬거리거나 다른 단어로 바꿔서 읽고, 발음 자체를 틀리게 읽는 경우가 잦다. 한 문장을 읽는 일도 고역이다. 동민이는 글을 읽을 때 다음 문장이 나오면 그 전 문장을 잊어버리고, 문장 간의 연관관계를 잘 파악하지 못한다. 교과서 내용, 심지어 교사의 말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상태인 것이다. 동민이는 학습 부진아로 분류됐다. 부진아 전담 강사는 “음독이 안 되는 아이들은 속으로 읽는 묵독(默讀) 역시 어려워한다”며 “국어 수행 자체가 힘들 수 있다”고 말했다.

동민이는 국어뿐만 아니라 수학 등 다른 과목에서의 부진도 심각한 상태다. 5학년이지만 국어를 포함한 전 과목 학습 수준이 2~3학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한 자릿수와 두 자릿수 덧셈을 배우기 시작한 2학년 아이가 5학년 교실에서 분수 약분 수업을 듣는 셈이어서 동민이는 산만해질 수밖에 없다.

동민이의 또 다른 문제는 학습 태도 결손이다. 부진아 전담 강사의 지도일지 속 동민이 이름 옆에는 ‘수업 집중이 힘듦’ ‘장난이 심함’ ‘학습 참여율 낮음’ 등의 문구가 적혀 있다. 담임교사는 “아이와 공부할 때면 5분 정도 공부하고 나머지 40분은 승강이를 하다 끝난다”며 “집중력이 떨어지고 쉬운 내용도 10분 이상을 붙잡고 있지 못한다”고 말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학습보다 평소 생활에 관한 것이다. 동민이는 학습 수준이 뒤처져 과제 제출이 늦고 학급 활동 참여도 뒤떨어져 반에 대한 소속감이 부족하다. 밝고 쾌활한 성격 덕에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만 대화 능력이 부족해 겉도는 느낌이 든다. “같이 놀자” “밥 먹으러 가자” 등 단순한 대화는 가능하나 발야구 규칙을 이해하고 친구들과 전략을 세워 게임을 하는 등의 대화는 어려워한다.

교사들의 마음도 편치 않다. 부진아 전담 강사는 “내 마음속에 동민이는 심각하다”며 “곧 중학교에 가는데 걱정이 많다”고 전했다. 담임교사도 “지금은 그저 귀엽고 예쁘지만 성인이 됐을 때가 걱정된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엄훈 청주교대 국어교육학과 교수에 따르면 초·중학교 거의 모든 학급에 동민이와 같은 아이가 한 명씩은 있다. 전국에 2000개 중학교가 있고 각 학교에 15~20개 학급이 있다면 약 4만명이 있는 셈이다. 초등학생까지 합하면 10만명에 육박한다는 추산이 가능하다.

동민이와 같은 아이들을 ‘기능적 문맹자’라 부른다. 한글은 깨쳤지만 독해가 되지 않아 글을 활용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과거 문맹은 단순히 한글을 읽지 못하는 것을 의미했으나 최근 문제가 되는 문맹은 기능적 문맹이다. 전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국가인 우리나라가 2015년 또다시 문맹을 걱정해야 할 시점에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성인으로까지 이어진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다. 2001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중 문해력이 최저 수준(예: 의약품 설명서를 봐도 정확한 투약량을 알지 못하는 정도)인 사람의 비율이 38%로 나타났다. 회원국 평균인 22%를 훌쩍 뛰어넘으며 20개국 중 19위로 하위권을 차지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한 ‘2004년 한국 교육인적자원 지표’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반상회 공고문을 보고 반상회가 누구 집에서 열리는지를 파악 못하는 사람이 100명 중 38명에 달했다. 2008년 국립국어원이 국민 기초 문해력을 조사한 결과, 전체 성인의 5.3%가 은행·관공서의 서식 작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1.7%는 글을 읽지 못하는 완전 비문해자로 드러났다. 전체 성인의 7%, 약 260만명이 기초 문해력 부진 계층으로 나타난 것이다. 유네스코가 올해 우리나라 성인 문맹률을 0.7%로 전망하는 것을 감안하면, 각 조사에서 보이는 7~38%의 비문해율 수치는 충격적이다. 엄훈 교수는 “문제 해결의 결정적 시기는 초등학교 저학년”이라며 “읽기 부진은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는 속도가 빨라 고학년이 되면 개선하기 힘든 지경에 이른다”고 경고했다.

“조기 발견해 지원하는 시스템 필요”

전문가들은 교육 당국의 책임이 크다고 말한다. 시사저널이 서울시교육청과 교육부에 알아본 결과, 초·중·고교 학생들의 비문해 문제는 교육 당국이 아닌 학교 자체에서 해결하고 있고 관련 조사도 한 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초학력 부진 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육 프로그램은 있지만 읽기·쓰기 교육에 관한 별도의 교육은 현재로선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런 학습 부진 교육은 성적을 올리는 것이 목적이어서 비문해에 대한 실질적 해결책이라 보기 어렵다.

좋은교사운동 정책위원인 김중훈 운서초등학교 교사는 “이 아이들이 왜 읽기가 부진한지에 대해 국가 차원에서 체계적·종합적으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종합 문해 프로그램 마련, 정기적인 문해력 검사 지원, 교대 학생들을 위한 기초 문해력 교육 강좌 개설 등 대책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엄훈 교수는 “현 교육과정은 ‘동일한 출발점’ 가설에 따라 만들어졌다. 그러나 초등학교 입학 무렵 아이들의 읽기·쓰기 수준은 천차만별”이라며 “저학년 때 이를 조기 발견해 각 개인의 수준에 맞게끔 국가가 지원하는 체계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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