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가 ‘비운의 황태자’ 떠나다
  • 송응철 기자 (sec@sisapress.com)
  • 승인 2015.08.14 18:49
  • 호수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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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 별세…동생 이건희 회장과 끝내 화해 못해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이 8월14일 중국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폐암 때문이었다. 그는 2012년 폐암이 발견돼 일본에서 수술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1년 후 암이 재발돼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치료를 받아왔고, 최근에는 중국 별장에 머무르며 투병생활을 해왔다. 이맹희 전 회장은 그동안 ‘비운의 황태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닌 인물이다. 한때 삼성의 ‘왕좌’에 가장 근접했지만 한순간 야인으로 전락해 오랜 기간 잊혀진 존재로 지냈다.

36세에 총수 대행으로 그룹 진두지휘

이맹희 전 회장은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부인 고 박두을 여사 사이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38년 대구의 한 작은 국수공장에서 시작된 삼성그룹의 성장을 처음부터 지켜본 산증인이다. 일찍이 삼성그룹 후계자로 지목된 인물이기도 하다.

이맹희 전 회장은 36세의 나이에 잠깐 삼성의 대권을 거머쥔 바 있다. 이병철 창업주가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에 연루되면서다. 당시 부산세관은 삼성의 계열사이던 한국비료가 사카린 원료인 OSTA 58톤을 밀수한 사실을 적발했다. 삼성이 당시로선 거액인 2400만원의 벌금을 냈지만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이 일로 이병철 창업주는 은퇴를 선언했고, 그의 차남인 고 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은 6개월간 감옥 신세를 져야 했다.

향년 84세로 작고한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의 생전 모습

이맹희 전 회장은 장자 승계 원칙에 따라 총수대행으로 나서 그룹을 진두지휘했다. 그러나 ‘이맹희 천하’는 오래가지 못했다. 1970년대 초 이병철 창업주 눈 밖에 나면서 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야 했다. 이병철 창업주는 이맹희 전 회장의 경영 배제 이유로 ‘무능력’을 들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 <호암자전>을 통해 “장남 맹희에게 그룹 일부 경영을 맡겨보았다. 그러나 6개월도 채 못 돼 맡겼던 기업체는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맹희 전 회장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1969년 이창희 전 회장 주도로 벌어진 ‘청와대 투서 사건’을 주된 원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창희 전 회장은 옥살이를 하고 난 이후 자신이 경영에서 소외됐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외화 밀반출 등 삼성의 조직적인 비리 사실과 이병철 창업주를 은퇴하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투서를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이 일로 이병철 창업주는 이창희 전 회장에게 극심한 불신을 품었다. 이병철 창업주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원히 귀국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고 이창희 전 회장을 외국으로 사실상 유배시키면서 ‘모반’을 매듭지었다. 문제는 이병철 창업주가 이맹희 전 회장도 투서 사건에 개입됐으리란 의심을 했다는 점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더라도 최소한 묵인은 했으리라는 것이었다. 투서가 당시 중령 계급이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통해 접수됐다는 사실이 그 근거였다. 이맹희 전 회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친구였기 때문이다.

이맹희 전 회장은 “나는 그 문제에는 절대 개입하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부자간 관계는 날로 멀어졌다. 이맹희 전 회장은 자서전을 통해 “창희 사건의 여파로 아버지와 나 사이에 내부적으로 보이지 않는 금이 생겼다”며 “아버지는 나와 함께 출근하고 퇴근하면서도 나에게 늘 뭔가를 숨기는 것 같은 느낌을 풍기곤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던 1973년 이병철 창업주는 이맹희 전 회장을 경영에서 배제시키기 시작했다. 당시 17개에 달하던 직함은 3개로 줄었다. 이를 계기로 부자 사이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 이맹희 전 회장은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났다. 이병철 창업주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공항으로 마중을 나가지도 않았다. 또 이병철 창업주가 일본 현지 직원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내린 지시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1975년 귀국한 이후에도 ‘반항’은 이어졌다. 겨울에는 사냥, 여름에는 승마를 하며 지냈다.

부자 사이의 반목이 극에 달한 건 1976년 이병철 창업주가 암 수술을 위해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날 밤이다. 당시 이병철 창업주는 가족회의에서 삼성의 차기 경영자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지목했다. 이맹희 전 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언젠가는 자신에게 삼성의 대권이 주어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병철 작고 후 해외 떠돌며 은둔 생활

이맹희 전 회장은 1987년 이병철 창업주가 작고한 후 해외로 떠났다. 이후 5년여 동안 아프리카·남미·미국·일본 등 세계 각지를 돌아다녔다. 직계 가족과도 연락을 끊고 은둔자로 지냈다. 심지어 자신의 장남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딸이자 자신의 손녀인 경민씨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삼성그룹에서 분사해 나온 제일제당(현 CJ)의 경영은 이재현 회장이 도맡아야 했다.

이맹희 전 회장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져갔다. 간혹 혼외정사로 인한 친자 확인 소송이나 양육비 소송 등으로 구설에 올랐을 뿐이다. 1961년부터 이맹희 전 회장과 동거하다 1964년 아들 재휘씨를 출산한 배우 출신 박 아무개씨는 혼자 아들을 양육해오다 2004년 부산지방법원 가정지원에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대법원은 2006년 재휘씨가 이맹희 전 회장의 친자임을 확정했다. 박씨는 2010년 서울중앙지법에 과거 양육비 상환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재판부는 양육비로 4억8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그뿐, 이후 이맹희 전 회장은 다시 칩거에 들어갔다. 그의 생활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졌다. 그런 이맹희 전 회장이 다시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건 2012년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삼성생명 주식을 비롯한 선대의 차명 재산을 돌려달라며 재산 상속분 청구소송을 제기하면서다. 당시 소송 규모가 7100억원에 달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1심과 2심에서 연달아 패소한 이맹희 전 회장이 지난해 2월 상고를 포기하면서 형제간 재산 분쟁은 일단락됐다. 이후 이맹희 전 회장이 중국에서 투병생활을 해오다 별세하면서 굴곡진 인생사는 막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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