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권력’의 갑옷 입은 자들에게 통렬한 일침
  • 이은선│매거진 M 기자 (.)
  • 승인 2015.08.12 19:40
  • 호수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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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부당거래>와 대조되는 전개 선보인 류승완 감독 <베테랑>

 

죄짓고 산 사람이 제대로 죗값을 치르는 모습을 우리는 살면서 과연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 횟수를 언급하기 이전에 그것이 가능한 일이기는 할까? 영화 <베테랑>은 명쾌하게 ‘그렇다’고 말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돈과 권력이라는 갑옷을 입은 이들에게 ‘죄짓고 살지 말라’고 들이받는 강단으로 똘똘 뭉쳐 있다. 비록 영화라는 판타지라 한들, 집단 화병에 걸렸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 없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 이 정도의 일침은 시원한 단비처럼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원래는 상반기 개봉 예정이었던 이 영화는 일찍이 충무로 안에서 ‘물건’이 나왔다는 은근한 소문을 몰고 다닌 주인공이었다. 개봉을 미루면서까지 경쟁이 치열한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에 출사표를 던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얘기다.

류승완 감독의 의 한 장면. 사진은 광역수사대 형사역을 맡은 황정민과 재벌 3세역을 맡은 유아인. ⓒ CJ 엔터테인먼트 제공

개봉 전부터 충무로에서 ‘물건’ 소문 돌아

주인공은 불도저 같은 성격을 자랑하는 광역수사대 형사 서도철(황정민)이다. 그는 화물 운전 노동자인 배 기사(정웅인)가 당한 사고의 배후에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가 있음을 직감한다. 조태오 곁에는 온갖 뒤처리를 도맡아 하는 최 상무(유해진)가 버티고 있어 서도철의 수사에 여러 번 제동이 걸린다. 하지만 서도철을 위시한 광역수사대 팀의 끈질긴 추적에 조태오와 최 상무 역시 점차 움찔하기 시작한다. 베테랑 형사와 안하무인 재벌 3세의 대결. 시간이 갈수록 도철과 태오는 서로 독이 바짝 오른다.

어디에선가 보고 들은 이야기 같다면 그 짐작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다. 당장 주변을 한번 둘러보라. TV 뉴스를 켜보라. 현실이 곧 이 영화의 배경이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들은 대한민국 뉴스에 일정 지분이라도 있는 듯 부지런히 사건을 만든다. 그들의 부당함에 저항해야 하는 노동자는 나이자 당신이며, 내 가족이 될 수도 있다. <베테랑>의 갈등 구조가 복잡하지 않은 이유는 ‘관객이 나의 이야기, 내가 아는 사람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길’ 감독이 바랐기 때문이다. 플롯 역시 배배 꼬여 있는 부분 없이 일직선으로 내달린다. 이것은 단순하다기보다는 명쾌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방식이다.

류승완 감독은 이 영화를 가리켜 “밝은 버전의 <부당거래>(2010년)”라고 말했다. 부조리한 시스템 내에서 유혹을 받아들이는 나쁜 마음의 결과가 <부당거래>라면, 유혹에 저항한 마음의 결과가 <베테랑>이라는 것이다. 감독의 말대로다. 저항하던 이들이 결국엔 굴복당하는 게 아니라 통쾌한 성취를 거둔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메시지는 소중하다.

실제로 <베테랑>은 류승완 감독의 전작 <부당거래>와 짝패를 이루는 영화다. <부당거래>의 중심에도 광역수사대 형사가 있다. 다만 하는 짓이 다를 뿐이다. 연쇄 성폭행 살인 사건에 대한 수사는 지지부진하고, 이에 경찰은 광역수사대 최철기 반장(황정민)에게 가짜 범인을 내세워 사건을 마무리하라는 임무를 맡긴다. 최 반장은 폭력배 출신 건설회사 대표 석구(유해진)와 짜고 가짜 범인을 내세우는 시나리오를 짠다. 이 일로 최 반장이 뒤를 봐줄 것이라 믿은 석구는 경쟁사의 회장을 처치하고, 회장으로부터 스폰을 받던 검사 주양(류승범)까지 최 반장과 얽혀든다.

<부당거래>는 밑바닥부터 고위층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요지경 같은 한국 사회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러면서 검사가 쓰고, 경찰이 연출하고, 깡패가 배우를 구하는 더러운 거래의 풍경을 포착했다. 복잡한 실타래를 차근차근 풀어가듯 맥을 짚어가는 영화인데도 뒷맛은 좀처럼 개운하지 않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부조리한 시스템을 뒤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이 영화 전체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바꿀 수 없다면 그 부조리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숨을 죽이고 살아야 한다는, 가슴이 뻐근해지도록 무력한 기운 말이다.

하지만 <베테랑>은 다르다. 비슷한 문제를 다루되 그 방식은 전혀 딴판이다. 류승완 감독은 “물론 영화에 담긴 사건은 아프고 무섭지만, 그렇게 우리 삶에 화를 일으키는 대상을 똑바로 직시하며 ‘네가 뭔데 내 뺨을 때려?’하고 통쾌하게 갚아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할 말은 하고 혼내줄 놈들은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면서 더 씩씩하게 살아도 괜찮다는, 너무 순진해서 조금은 당황스럽기까지 한 직설. 이것이 <베테랑>의 화법이다.

서도철(황정민)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오 팀장(오달수), 수사대의 홍일점 미스 봉(장윤주). ⓒ CJ 엔터테인먼트 제공

한국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최적의 오락영화

<부당거래>가 <베테랑>에 좀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점도 있다. <베테랑>의 시작 자체가 <부당거래>와 맞닿아 있다. 시나리오를 쓰거나 촬영을 시작하기 전 꼼꼼한 취재를 우선하기로 유명한 류 감독은 각본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방대한 소스를 수집해뒀다. 이때 영화에 녹여 넣지 않고 남겨둔 에피소드가 영화 초반부에 광역수사대가 해결하는 중고차 절도단 사건이다. 그때 취재해둔 이야기를 바탕으로 별도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기도 했던 류 감독은 이를 자연스럽게 <베테랑>에 녹여 넣었다. 여기에 1980년대에 유행한 <리썰 웨폰> 시리즈, <폴리스 스토리> 시리즈 같은 형사 영화에 열광하던 감독의 취향을 버무렸다.

극 중 찰떡같은 호흡을 자랑하는 광역수사대 팀이 ‘균형’이라면, 조태오를 중심으로 한 불안하고 폭력적인 주변 상황은 ‘불균형’이다.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세계가 부딪치면서 생기는 불꽃 튀는 에너지. 이것이 <베테랑>의 중요한 동력이다. 그 긴장 상황에서 숨통을 틔워주는 건 인간미 넘치면서도 자기 일에 열심인 광역수사대 팀원들이다. 거침없이 판을 키우는 서도철 때문에 전전긍긍하면서도 그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오 팀장(오달수), 수사대의 홍일점 미스 봉(장윤주) 등의 활약이 거침없다. 류 감독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태도를 가진 이들이 자기 일을 똑바로 해낼 때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달라질까, 그 생각을 하면서 시나리오를 썼다”고 말한다.

사회의 부조리를 정확히 바라보고 파헤치는 시선, 옳은 뜻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연대에 대한 신뢰, 거기에 호쾌한 리듬을 얹은 <베테랑>. 지금 한국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최적의 오락영화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에겐, 때론 이렇게 호탕한 위로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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