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 늘 감염 위험에 노출”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승인 2015.08.12 19:17
  • 호수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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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료연구원, 의료인들 대상 조사…메르스 사태 전부터 ‘병원 내 감염’ 우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이전부터 이미 의료인들(의사·간호사·약사) 사이에서는 ‘병원 내에서 감염병이 돌면 심각한 상황이 될 것’이라고 인지하고 있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이 결과는 국내에서 첫 메르스 환자가 발생하기 전인 올해 2~3월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이 의료인 46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내용이다. 조사에 응한 의료인의 65%는 가장 우려되는 병원 안전 문제로 ‘병원 내 감염’을 꼽았다. 또 일단 병원 내 감염이 발생하면 ‘심각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의료인은 전체의 81%나 됐다. 많은 의료인이 병원 내 감염 가능성을 경고했음에도 아무런 대책 없이 메르스 사태를 맞은 셈이다. 임태환 한국보건의료연구원장은 “최근의 메르스 사태 등 병원 내 감염 문제에 대한 환자 안전 체계 정비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메르스가 확산되던 6월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환자의 체온을 측정하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병원 내 인력 부족이 안전사고 주원인”

큰 병원이 작은 병원보다 안전할 것이라는 게 일반 사람들의 생각이다. 회사원 한상운씨는 “메르스 사태 이후 감염 문제 때문에 작은 병원보다 큰 병원을 찾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병원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의료인은 큰 병원도 안전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동아대 간호대 김연하 교수팀이 지난해 8월 병원 응급실 간호사 2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간호사 10명 중 4명은 병원에서 전염병에 걸린 적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조사 대상 병원의 61.5%는 병상 수가 800개 이상인 대형 병원이었다. 김 교수는 “병원 응급실은 전염병을 포함한 다양한 질병을 가진 환자가 찾아오는 데다 다수의 치료가 환자의 질병 내력을 전혀 모른 채 이뤄져 늘 감염 위험에 노출된 곳”이라고 지적했다.

규모에 관계없이 병원에는 안전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병원 내 안전 문제는 의료인보다 일반인(환자·보호자)에게 더 크게 다가온다. 일반인이 요구하는 병원 안전이란 오진, 수술 사고, 마취 사고, 의약품 사고 등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료인의 진료 행위가 환자 안전과 직결된다는 얘기다. 반면 의료인은 욕창·낙상 등 간접적인 의료 행위에서의 안전을 강조한다. 병원 안전에 대해 일반인과 의료인의 인식 차이가 있는 것이다. 허대석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교수는 “의료인이 안전 문제에서 책임을 회피하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 같다”고 분석한 후 “싼 의료비, 부족한 인력이 병원 안전과 무관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병원의 인력 부족은 의료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안전 문제의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2014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건강정보’(헬스데이터) 통계에 따르면, 국내 의사 수는 인구 1000명당 2.1명으로 OECD 평균(3.2명)보다 적고 회원국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반면 국민 1인당 연간 병원 진찰 횟수는 14.3회로 OECD 평균(6.9회)의 두 배를 웃돈다. 이상일 울산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병원 내 인력 부족으로 진료 시간이 짧아지고 부주의하게 되면서 안전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며 “적절한 인력을 확보하려면 진료비 추가 부담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병원에서 안전사고가 발생하더라도 비전문가인 일반인이 과실을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 울산의대의 조사 결과를 보면, 국내에서 예방 가능한 병원 내 안전사고로 사망한 환자 수는 매년 2만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약 6000명인 것과 비교하면 3배가 넘는 수치다. 이에 따라 안전사고 관련 소송도 증가하는 추세다. 사법연감에 따르면, 의료 사고 관련 손해배상 소송 접수 건수는 2010년 871건에서 2013년 1101건으로 3년 만에 26%나 증가했다. 환자가 승소한 비율은 2010년 25%에서 2013년 30%대로 상승했다. 그러나 환자가 요구한 배상금을 모두 받을 수 있는 완전 승소는 2010년 0.9%에서 2013년 0.6%로 떨어졌다.

병원 내 안전 문제와 관련한 논란이 계속 이어지자 정부는 지난해 ‘환자안전법’을 만들었고 올해 세부적인 시행 계획을 마련 중이다. 의료인이 의료 행위 중에 발생한 사고를 무기명으로 신고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강제성이 없어 실효성 논란이 있다. 허대석 교수는 “인력 부족, 낮은 의료수가 등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해법 없이 규제하는 법만 만든다고 병원 안전이 확보될지는 미지수”라고 꼬집었다.

의료인보다 일반인 시각 반영된 제도 필요

무엇보다 병원 안전을 바라보는 일반인과 의료인의 시각 차이가 있는 만큼 이를 좁히려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김수경 한국보건의료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환자안전법의 세부 시행 계획을 마련하는 중인데 의료인과 일반인의 병원 안전 인식을 주기적으로 점검해 안전 정책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미국·영국·호주 등 선진국은 환자 안전을 오래전부터 연구하고 제도를 만들어왔다. 국내에서는 의료사고에 대한 정부 차원의 전국적인 실태조사는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다. 유명순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는 “학회·언론 등을 통한 안전 문제의 공론화, 정부·의료계 주도의 병원 안전 정보 공개, 안전 소통 방안 개발의 노력을 기울여 보건의료 안전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높여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료 선진국의 병원 안전 관련 제도의 핵심은 의료인이 아니라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는 일반인의 시각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미국 보스턴에 있는 메트로웨스트메디컬센터의 전진학 감염내과 과장은 “환자 중심 의료는 병원 안전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며 “예를 들어 회진, 입원·퇴원, 수술 전후 등 의료 전반에 대한 환자의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 일반인의 시각을 제도에 반영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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