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격호 70년의 꿈 산산조각 나다
  • 박혁진 기자 (phj@sisapress.com)
  • 승인 2015.08.03 11:22
  • 호수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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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왕자의 난’ 안갯속으로…형제 중 누가 대권 잡을지 예측불허

재계 자산 순위 5위 롯데그룹의 형제 간 경영권 분쟁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갯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상당수 대기업이 경영권 분쟁을 겪었거나 겪고 있다는 점에서 재벌가의 ‘골육상쟁’이 새로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회사를 일군 고령의 창업주를 해임하는 사태까지 벌어지는 일은 전례를 찾기 힘들다는 점에서 이번 롯데그룹의 형제간 다툼은 ‘선’을 넘었다는 평가가 대체적이다.

신격호 총괄회장 통제력 잃었나

재계에서 롯데그룹은 적어도 자식들 간 경영권 분쟁과는 거리가 멀 것으로 점쳐졌던 곳이다. 신격호 총괄회장이 노령에도 기업 경영권을 확고하게 틀어쥐고 있었고, 한국과 일본 롯데의 사업이 비교적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어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신동빈 한국 롯데 회장 형제간 다툼의 소지가 별로 없을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영권 분쟁이 일어나기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봤던 두 가지 요인은 오히려 다툼이 시작되자 양측 간 더 큰 충돌을 일으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동안 형제간 갈등을 눌러왔던 부친의 강력한 카리스마가 사라지자 자식들의 욕망은 용암처럼 분출되고 있다. 장남은 90세가 넘은 고령의 부친을 일본으로 데려가 경쟁 관계에 있는 동생을 비롯해 동생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이사들을 해임시키는가 하면, 동생은 여기에 맞서 아예 아버지를 회사 직책에도 없는 명예회장이라는 자리까지 만들어 끌어내렸다. 롯데그룹 측은 “경영권과 무관한 분들이 신 총괄회장의 법적 지위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고, 신 총괄회장의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지만, 신 총괄회장은 결국 아들에 의해 강제로 퇴진하게 됐다.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왼쪽)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연합뉴스·시사저널 박은숙

겉으로 봤을 때 분명하게 구분돼 있던 것처럼 보였던 한국과 일본 롯데의 관계는 수면 아래에서는 얽히고설킨 지분 관계로 인해 사실상 승자 독식을 부추기고 있다. 신 총괄회장은 2년 전까지만 해도 롯데그룹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일본 롯데는 큰아들인 신 전 부회장에게, 한국 롯데는 신동빈 회장에게 맡기는 것으로 후계 구도를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 롯데가 한국 롯데의 사실상의 모태임에도 한국 롯데의 매출이 일본 롯데보다 14배 크다는 점 때문에 형제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지 여부는 불확실했다. 그래도 아버지가 교통정리를 확실하게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만큼 후계 구도가 순탄하게 정리될 줄 알았으나, 결국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몇 년 전부터 골육상쟁 징후 나타나

현재 국내 10위권 대기업 중 창업주가 경영에 관여하고 있는 기업은 롯데가 유일하다. 신 총괄회장은 그동안 다른 대기업들의 경영권 분쟁을 여러 차례 보면서 롯데만큼은 그런 일들이 없게끔 여러 차례 다짐했을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특히 신 총괄회장은 자신이 경영에 참여시킨 동생들이 끊임없이 자신과 다툼을 벌이는 것을 겪으면서 이런 생각을 더 확고히 했을 수 있다. 실제로 두 아들에게는 한국과 일본 롯데를 넘겨주고, 다른 딸들에게는 롯데그룹에서 영위하는 사업의 일부를 떼어주거나 부동산을 넘겨준 것은 골육상쟁을 방지하려는 신 총괄회장의 의지가 반영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롯데그룹마저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분쟁이 일어남으로써 다른 대기업의 전철을 밟게 됐다.

신동주-신동빈 형제간 경영권 분쟁에 대해 언론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이번 사건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업주인 신격호 총괄회장의 경영철학과 여기에서 비롯된 롯데그룹만의 독특한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고 신 총괄회장 주변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롯데그룹 내부 사정에 밝은 사람들은 대부분 재일교포 한상이다. 회사 고위 관계자도 오너 일가의 일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신 총괄회장은 재계 총수 모임이나 언론 등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은둔의 경영자로 수십 년을 살았다. 하지만 신 총괄회장은 자기가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수십 년 동안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중 가장 가까운 그룹이 재일교포 한상들이다. 일본 최대 파친코회사인 마루한 한창우 회장을 비롯한 재일교포 한상들은 매년 말이면 일본에서 송년회를 열 정도로 허물없이 지낸다.

신 총괄회장을 오랜 기간 곁에서 지켜본 재일교포 한상들은 롯데그룹은 신격호 총괄회장의 카리스마와 경영 감각 위에 세워진 회사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신 총괄회장이 경영에서 물러날 즈음에는 어떤 식으로든 그룹이 큰 소용돌이에 휘말릴 가능성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자에게 신 총괄회장의 얘기를 들려줬던 지인은 ‘야쿠자 보스’에 신 총괄회장을 빗대기도 했다. 신 총괄회장이 일본에서 자리 잡은 후 동생들을 사업에 참여시킨 것이나 매년 자신의 고향인 울주군에서 고향 잔치를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열었던 것, 그리고 한상 후배들을 챙겼던 것도 모두 보스로서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신 총괄회장의 이러한 면은 형님 리더십의 순기능이 발휘되면서 나타난 현상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리더십의 또 다른 얼굴은 배신을 하거나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의 한 지인은 “신 총괄회장은 일본에서 빈손으로 회사를 일궜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상장 회사라고 볼지 몰라도 자기 회사라는 인식이 강하다”며 “그래서 투자·인사·지분 문제 등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관여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고 말했다. 그는 “롯데그룹이 다른 대기업집단에 비해 유달리 비상장 회사가 많은 것도 굳이 상장을 해서 정부나 주주들이 감 놔라 배 놔라 참견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라며 “자식들에게도 본인의 허락 없이 지분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을 금했다”고 말했다.

부친 허락 없이 일 도모하는 건 ‘배신’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7월28일 오후 휠체어에 탄 채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뉴스뱅크이미지

실제로 2년 전부터 조짐을 보였던 형제간 분쟁에 대해 신 총괄회장이 직접적으로나마 언급한 것도 지난 연말 한상 모임에서였다(시사저널 1319호 참조). 신 총괄회장은 매년 말 이 모임에서 지인들과 자신이 가져간 조니워커 블루를 나눠 마시곤 했는데 지난해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술을 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신 총괄회장은 “신 전 부회장이 (자신의) 허락 없이 (한국 롯데) 지분을 매입해 마치 롯데에 큰일이 일어난 것같이 외부에 비쳐졌다”며 “곧 모든 자리에서 내려오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신 전 부회장은 이 자리가 있은 후 며칠이 지난 지난해 12월26일 일본 롯데상사 대표이사직과 롯데상사·롯데아이스 이사직에서 해임됐다. 또한 그는 올 1월8일 열린 일본 롯데홀딩스 임시주주총회에서 부회장직에서도 해임됐다. 당시 이 자리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신 총괄회장이) 신 전 부회장의 지분 매입 자체보다는 그것으로 인해 가족 간에 분란이 일어난 것처럼 외부에 알려졌고 더 나아가 내부에서도 동요가 있었던 것에 대해 더 화가 난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는 “‘가업’ 개념이 강한 일본에서는 부친의 허락 없이 어떤 일을 도모한다는 것 자체가 ‘배신’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라며 “신 전 부회장도 이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다 할 불만 없이 순순히 물러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신 총괄회장이 동생들과 분쟁을 빚었던 것도 비슷한 이유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신 총괄회장은 자신의 타고난 경영 감각을 믿는 사람이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리더가 자신의 경영 능력에 대한 신뢰가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이는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신 총괄회장의 바로 아래 동생인 고(故) 신철호 사장은 1958년 신 총괄회장이 국내에 없는 틈을 타 서류를 위조해 롯데를 인수하려다 발각돼 구속됐다. 그는 이후 조그만 제과회사를 차려 독립했다. 셋째인 신춘호 농심 회장도 1965년 형의 만류를 무릅쓰고 라면을 내놓았다가 이후로는 남남보다 못한 형제가 됐다. 신 총괄회장은 막내 동생인 신준호 푸르밀 회장과도 사이가 좋지 않다. 신격호 회장은 신준호 회장을 그룹의 컨트롤타워인 운영본부 부회장을 맡길 정로도 신뢰했지만 부동산실명제가 도입된 이후 서울 양평동 롯데제과 자리를 놓고 법적 다툼을 벌였을 정도다. 형제들과 싸운 이유가 제각각이지만 신 총괄회장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도움으로 사업을 시작한 동생들이 어느 순간 말을 듣지 않았거나, 반기를 들었다고 생각할 여지는 다분하다.

형제들과의 분쟁을 겪은 신 총괄회장은 자식들 간의 경영권 분쟁을 사전에 막기 위해 형제간 역할 구분도 비교적 분명히 했고, 지분도 어느 한쪽에 쏠리는 것을 막았다. 또한 두 형제에게는 한국과 일본 롯데를 맡기는 대신, 신동주·동빈 형제와 배다른 남매인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이나 신유미 롯데호텔 고문에게 미리 지분이나 사업을 떼어줘 재산 분쟁을 사전에 막고자 했다.

신 총괄회장이 카리스마를 유지할 때만 해도 이런 그림은 맞아떨어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점차 고령화되어가고, 두 아들은 경영권에 대한 욕심이 커지면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신 총괄회장의 지인은 “일본 롯데의 규모가 작아도 신 전 부회장이 모태인 일본 롯데를 맡고, 사업적으로 자신과 닮은 신동빈 회장에게 한국 롯데를 맡기는 것이 그가 그린 후계 구도였다”며 “그런데 장남은 자신이 규모가 작은 일본 롯데를 맡는 것이, 차남은 한국 롯데가 일본 롯데의 지배구조 아래 있다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 같다”고 밝혔다.

누가 이기든 분란 끝나지 않을 듯

이번 사태가 어떻게 굴러갈지 지켜봐야겠지만 한·일 롯데가 신 총괄회장의 손으로 일군 기업인 만큼 그가 손을 들어주지 않는 사람은 어느 쪽에서도 정통성을 인정받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신 전 부회장과 신 회장이 서로가 아버지의 뜻이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신동주 전 부회장이 아버지의 인사 지시서를 공개한 것이나 신동빈 회장이 장악하고 있는 한국 롯데가 신 총괄회장의 건강 이상설을 제기하고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롯데그룹은 신 총괄회장이 신동빈 회장의 손을 들어줬을 때는 건강 이상설에 적극적으로 반박해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신 총괄회장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신 총괄회장의 건강을 문제 삼아 형에 대한 아버지의 지지가 정상적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주식 대결을 벌인다고 해도 신 총괄회장의 의중을 등에 업지 않고서는 회사를 완전히 장악할 수 없다. 설사 주주총회에서 한쪽이 이긴다고 해도 신 총괄회장과 반대편에 선다면 이는 또 다른 분란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형제간 대결의 승자는 주주총회를 통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느 쪽이 이기든 신격호 총괄회장이 그렸던 한·일 롯데의 평화적 공존은 불가능하게 됐다. 롯데 역시 삼성과 현대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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