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자 ‘입맛’ 따라 ‘~기념’ ‘국경일’ 각종 이유 붙여 남발된 사면권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5.07.29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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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식구’ 챙기려 생계형 끼워 ‘물 타기’

“사면(赦免)은 대권 가운데서도 가장 음흉한 것.” 18세기 독일 관념철학 대가 이마누엘 칸트의 말이다. 사면과 관련한 많은 격언 중에서 200여 년 전 그가 내린 정의가 수시로 인용되는 소이는 사면의 야누스적 속성을 가장 적확하게 꿰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관용으로 포장돼 있으나 속은 온갖 위선과 불순·협잡이 그득했던 우리나라에서 그러하다.

사면의 사전적 의미는 지은 죄를 용서하고 형벌을 면제해주는 것이다.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은 이미 내려진 형을 실효케 하거나 집행을 중지시키는 위력을 가졌기에 가히 만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넓은 의미로 감형과 복권도 포함되는 사면은 정말 대단한 대통령의 특권이다. 거기에 우리의 경우 법무부장관의 소관이라는 가석방·형집행정지 등에도 최고 권부의 입김이 작용하는 현실까지를 감안한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한보 사태의 주역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가운데). ‘로비의 달인’ 정태수는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구속집행정지·특사 등 각종 특혜를 받아 권력 비호 의혹을 더했다. 해외 도피 중인 그는 2004년부터 최고액(2000억원) 상습체납자로 이름이 올라 있다. ⓒ 연합뉴스

형량 평균 2년 반인데 감옥 생활 반년 불과

역대 정부가 그간 단행한 대통령 특별사면(특사)은 모두 98회에 이른다. 대통령별로는 전두환 정부 당시의 14회를 비롯해 김영삼 정부 9회, 노무현 정부 8회, 노태우·김대중·이명박 정부 7회, 박근혜 정부 1회 등이다. 연평균 1.5회의 특사가 이뤄진 셈이다. 독일의 경우에는 15년 에 1회꼴로 실시됐다. 특사 대상자도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최소한에 그치는 이들과 달리 우리는 매머드급이다.

특사 당시의 선고된 징역과 금고 기간 대비 실제 복역 기간은 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1988년 이후 20여 년 동안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은 대통령 친인척이나 정치인, 고위 공직자, 기업인 등 200여 명의 형량은 평균 2년 반인데, 실제로 감옥에 있던 기간은 반년에 불과하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유전무죄(有錢無罪) 유권무죄(有權無罪)’라는 소리가 나오게 돼 있다. 그래서 ‘수상쩍은’ 특사에 쏠리는 국민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들러리를 세우다 보니 특사 폭이 늘어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낳는다.

법의 안정성 유지를 위해 사면권 행사를 최대한 자제하고 이를 담보하기 위한 각종 제도적 장치를 갖춘 선진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특사는 말 그대로 ‘제멋대로’ 이뤄진 느낌이다. 집권자의 ‘입맛’에 따라, ‘~기념’ ‘국경일’ 등 각종 이유를 붙여 남발했다. 근자에는 불법 기업인들을 구제하느라 ‘경제 살리기’가 단골 메뉴가 됐다. 전부는 아니라도 불온 기업인 구제의 다른 쪽에는 이들과 ‘검은돈’을 주고받은 정치인들이 자리한다.

최고 권력자가 이들을 풀어주는 데는 단순히 ‘보은’을 넘는 그 무엇이 있는 게 분명하다. 다름이 아니라 ‘검은돈’이 최고 권력 주변과도 결코 무관치 않을 수 있다는, 직·간접적으로 연결됐을 가능성이다. 이런 관측을 낳는 것은 ‘권력형 비리’ 관련자를 특사에서 제외하는 외국들과는 반대로 우리나라에서는 이네들이 특사라는 특혜 대상의 주종을 이루는 게 주요한 이유다. 특사 빈도·규모, 대상자 죄질에 이은 보은과 ‘제 식구 감싸기’ 등 모든 부문이 개운치 않다.

노태우 정부 때 전두환 전 대통령 동생 전경환씨 등 5공 비리 관련자들, 김영삼(YS) 정부 당시의 슬롯머신·율곡 비리, 동화은행장 뇌물 비리 등 주요 사건에 연루된 정·재계 및 군부 인사들, 김대중(DJ) 정부의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을 비롯해 이용호·최규선 게이트 연루자 등등의 면면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굳이 따질 필요성이 없을 터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8년에는 최도술 전 대통령 총무비서관,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 등이 특사로 풀려났다. 이명박(MB) 정부에서는 2013년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 MB 사돈인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부자 등이 특별사면됐다. ‘셀프 특사’라는 비아냥까지 받은 당시 특사 때 친박(친박근혜) 대표 서청원 전 의원과 용산 철거민 5명 등도 포함됐는데 구색용임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집권 중 ‘약식 수사’ ‘특사’ 받으려 서둘기도

노태우 정부 시절 단군 이래 최대의 금융사기 사건으로 기록된 한보 사태의 주범인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이 구속된 지 3개월 만에 풀려나고, 차차기 정부(DJ 정부)에서 특사 은전을 받은 전말이 무엇을 말해주는지는 자명하다. YS가 자신의 집권 기간 중 차남 현철씨를 감옥에 보내야 했고, DJ의 총대리인인 권노갑 의원을 구속하게 만든 게 한보라는 사실만으로도 저간의 상황이 짐작된다. 5조원 넘는 불법 대출로 온 나라를 들쑤신 정태수 총회장은 신병 치료를 핑계로 구속정지 처분을 받았는데 그 직후 D 골프장에 여인들을 거느리고 나타나 청와대를 아연케 했다. 그는 대통령 아들과 장관, 청와대 수석, 야당 2인자 등을 줄줄이 교도소로 보내고도 특사라는 특혜를 받아내는가 하면, 또 다른 죄목으로 집행유예 기간 중 해외로 도피하기도 했다.

여타 기업인들의 경우도 ‘상당액’의 금품이 동원됐음은 대충 알 만하다. 총수가 구속되면 대기업들은 ‘오너’의 부재로 경영난을 겪는다며 엄살을 떤다. 새로운 사업 진출 무산, 낙찰 실패, 경영 수지 악화 등 평소에는 감추던 치부를 언론에 적극 홍보하는 기현상도 벌어진다. ‘경제 살리기’라는 명분 축적을 위함임은 물론이다. 더불어 ‘그때 가져다준 돈’을 은근히 떠올리며 권력 주변에 무언의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는 전언인데 ‘신규’로 투입되는 로비 액수에 대해서는 구구각색이다. ‘간접비’를 합치면 수십억 원에 이른다는 얘기도 있다.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의 경우는 ‘돈’을 주축으로 하는 기업인과 확실히 차별된다.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는 DJ도 성사시키지 못한 자신의 2007년 복권을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이 전화 한 통으로 해결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동원할 수 있는 연줄을 최대한 동원하는 총력전이 펼쳐진다. 청와대는 저간의 관계, 방치할 경우 떠안게 될 부담 등을 고려해 특사 대상자를 선별하고 시점을 저울질한다. 광복절 혹은 성탄절 어느 특사가 여론의 눈총을 덜 받는지 등을 면밀히 잰다. 명분이나 본인의 형기 등이 정 마땅치 않으면 임기 말 특사로 돌린다. 차기 정부와 ‘딜’을 하느니 자기네 집권 시 욕을 먹고 마무리 짓는 게 낫다는 계산에서다.

‘우리가 집권 중’이라는 말에는 특히 많은 사연이 담겨 있다. YS와 DJ는 자신들이 대통령 재직 중 아들을 감옥에 보내야 했는데 아버지로서 YS나 DJ가 선뜻 응했을 리 없다. 이때 참모들이 들이댄 게 ‘우리가 집권 중’이다. “혐의는 빤한데 덮고 넘어갔다가는 차기 정권에서 더 매서운 수사의 칼을 맞을 게 분명하니 차라리 지금 적당히 매를 맞는 편이 낫다. 그리고 서둘러 재판을 마쳐야 임기 내 사면 복권도 가능하다”고 대통령을 설득했다는 전언이다. DJ 정부 2인자인 권노갑 고문의 처리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노무현·이명박 대통령 재직 시 친형(노건평·이상득)과 핵심 실세 등에 대한 처리 때도 똑같은 논리의 설득 작업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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