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46.비명에 간 부친의 한 품고 미래로 가다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5.07.15 11:0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노론의 끊임없는 견제 속에 정조가 성공한 임금 된 이유

재위 18년(1794년) 1월13일, 정조는 부친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참배했다. 사도세자의 위패(位牌) 앞에 향을 피우기 위해 엎드렸다가 일어서지 못하고 목메어 울었다. <정조실록>은 “상(임금)이 간장이 끊어질 듯 흐느껴 울었다”고 전하고 있다. 영의정 홍낙성 등 대신과 승지들의 부축을 받아 현륭원으로 올라간 정조는 제단 앞에 설치된 사도세자의 진영(眞影·초상화)을 보자 다시 몸을 땅바닥에 던지고 통곡했다. 손톱이 상할 지경으로 잔디와 흙을 움켜쥐고 뜯던 정조는 급기야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비명에 간 부친에 대한 정조의 한(恨)은 이처럼 극심했다. 그 한은 부친을 죽인 노론 벽파와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정치를 해야 한다는 현실 때문에 배가되었다. 정조는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해 한을 억눌렀다. 그러나 노론 벽파는 재위 1년(1777년) 자객 전흥문을 보내 정조를 암살하려고 시도했을 정도로 정조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대비 정순왕후 김씨를 내세워 정조를 끊임없이 압박했다. 정조 10년(1786년) 정순왕후 김씨는 정조의 왕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론 벽파와 짜고 정조의 유일한 동생인 은언군을 죽이라는 내용의 ‘언문 전교’를 내렸다. 그런데 이 사건의 불똥이 엉뚱하게 군권(軍權)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 숙장(宿將) 구선복에게 튀었다.

상복을 입고 있는 정조. 영화 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구선복은 이 사건으로 사형당했는데, 정조는 재위 16년(1792년), 이에 대해 “역적 구선복으로 말하면 홍인한보다 더 심하여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입으로 그 살점을 씹어먹는다는 것도 오히려 헐후(歇后)한 말에 속한다. 매번 경연에 오를 적마다 심장과 뼈가 모두 떨리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그 얼굴을 대하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병권을 손수 쥐고 있고 그 무리들이 많아서 갑자기 처치할 수 없었으므로 다년간 괴로움을 참고 있다가 끝내 사단으로 인하여 법을 적용하였다”(<정조실록> 16년 윤4월27일)라고 평가했다. 구선복 역시 자신의 혐의가 드러나자 “저는 모년(某年) 이후 용납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항상 의구심과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라고 시인했다. 구선복이 말하는 ‘모년(某年)’은 바로 사도세자가 비극적 죽임을 당한 임오년(영조 38년)을 뜻하는 것으로서 사도세자 살해 사건에 가담했다는 자기 고백이기도 했다.

정조는 만 열 살의 어린 나이로 14년 동안 대리청정하던 아버지가 한여름 뒤주 속에 갇혀 여드레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채 살해당하는 것을 목도해야 했다. 부친을 죽인 노론 벽파는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罪人之子 不爲君王)’는 이른바 ‘8자 흉언(凶言)’을 유포시키며 세손(정조) 제거를 당론으로 결정했다. 정조는 부친 제거에 서로 손잡았던 조부 영조와 외조부 홍봉한의 신임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래서 영조는 세손의 호적을 사도세자에게서 빼 이미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孝章世子)에게 입적시켰다. 일종의 호적 세탁이었다. 홍봉한 또한 세손이 즉위해도 제 뜻대로 조종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고 영조에게 세손의 교육을 담당하겠다고 자청했다. 이로써 세손은 겨우 숨을 쉴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세손은 이런 초인적인 노력 끝에 사도세자가 죽은 지 14년 만인 1776년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즉위 일성으로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독단·증오의 정치론 미래 없다 여겨

정조는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란 정체성을 분명히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빌미로 14년 전인 과거로 돌아가는 과거 지향의 정치를 하지는 않았다. 대신 미래 지향 정치로 조선을 이끌었다. 대리청정하는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는 독단의 정치, 증오의 정치로는 미래로 갈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노론 1당 체제를 다당제로 전환했다. 그간 정계에서 소외되었던 이가환·이승훈·정약용 형제 같은 남인들을 조정에 배치했다. 정조는 또한 사상의 다원화를 꾀했다. 노론의 사상적 기반은 성리학이었는데, 노론은 성리학과 다른 사상을 갖고 있으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제거하려 했다. 정조는 이런 획일적 사상 체제를 가지고선 조선이 미래로 갈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단으로 몰렸던 양명학은 물론 노론에서 사학(邪學)이라고 공격하던 천주교까지도 사실상 용인했다.

신분제도 개혁했다. 정조는 재위 1년(1777년) 3월, 벼슬길에서 소외되었던 서자들도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서류허통절목(庶類許通節目)’을 반포했다. 정조는 이때 “아! 필부(匹夫)가 원통함을 품어도 천화(天和)를 손상시키기에 충분한 것인데 더구나 허다한 서류(庶流)들의 숫자가 몇 억(億·십만) 정도뿐만이 아니니 그 사이에 어찌 준재(俊才)를 지닌 선비로서 나라에 쓰임이 될 만한 사람이 없겠는가?”라면서 서자 등용을 선포했다. 그리고 재위 3년(1779년) 이덕무·박제가·유득공·서리수 등 네 서자를 규장각 검서관(校書館)에 특채했다. 4명의 검서관은 이후 ‘사검서(四檢書)’라는 보통명사로 불리며 조선의 지식계를 주도했다. 정조는 조선의 발목을 잡고 있던 구습과 폐단을 해소하는 것으로 미래를 지향했다.

정조의 숙원 사업 중 하나는 양주 매봉산에 있는 부친의 묘소를 길지(吉地)로 이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노론 벽파가 민감하게 반응할 문제였기에 때를 기다렸다. 드디어 재위 13년(1789년) 7월, 사도세자의 누이인 화평옹주의 남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이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아뢴다”면서 이장 문제를 공론화했고, 정조는 부친을 수원 화산(花山)에 이장했다. 그리고는 부친의 묘소 현륭원의 배후 도시로 화성(華城)을 건설했다. 이때 정조는 “(화성 축성에는) 단 한 사람의 억울한 백성도 없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수원 화성 축성에는 단 한 사람도 강제 부역을 시키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경국대전> ‘호전(戶典)’은 “토지 8결에서 농부 1명을 내며 1년에 부역 일수는 6일을 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역으로 말하면 1년에 6일씩은 부역을 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정조 18년(1794년) 5월 영중추부사 채제공이 “국가에 큰 역사가 있을 경우 백성을 부리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통용되어온 관례입니다”라고 반대했지만 정조는 “경이 말하지 않더라도 내가 어찌 사세가 이러함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본부(本府)의 성역에 기어코 한 명의 백성도 노역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내가 뜻한 바가 있어서다”라면서 굽히지 않았다. 정조는 인문학과 과학에 모두 능했던 정약용에게 화성의 설계도를 작성하게 했는데, 정약용은 중국의 윤경(尹耕)이 지은 <보약(堡約)>과 서애 류성룡이 지은 <성설(城設)>을 참고해 화성 설계도를 작성했다. 지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화성은 백성들의 노역이 아니라 전면적인 임금 노동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성이었다.

정조의 초상화

대대적인 정치 개혁 구상, 독살설로 무산

정조는 화성을 쌓을 때 단순히 현륭원의 배후 도시라는 의미에 국한하지 않았다. 화성 건설을 통해 조선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고자 했다. 그래서 화성을 전혀 새로운 형태의 계획 도시로 만들었다. 화성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관건은 사람들이 살러 오느냐 그러지 않느냐에 달려 있었다. 정조는 채제공에게 인구 증진 방안을 보고하라고 명했고, 채제공은 정조 14년(1790년), “길거리에 집들이 가득 들어차게 하는 방법은 전방(廛房·상가)을 따로 짓는 것보다 더 나은 수가 없습니다”라고 상가 유치 계획을 보고했다. 정조는 화성 행궁(行宮) 앞에 경복궁 앞처럼 십자로(十字路)를 만들고, 호조에서 만든 6만냥으로 상가를 조성해 상업도시로 만들었다. 화성 행궁 앞 십자로에는 서울의 종로처럼 미곡전(米穀廛·곡식상)·어물전(魚物廛)·목포전(木布廛·옷감상)·유철전(鍮鐵廛·놋과 철상)·관곽전(棺槨廛·관과 곽 등 장의상)·지혜전(紙鞋廛·종이와 신발상) 등 상가가 흥성거렸다. 이 십자로는 삼남(三南)과 용인으로 가는 길목으로 전국 각지의 상업 발달을 촉진시킬 수 있었다.

정조는 재위 28년이 되는 갑자년(1804년)에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려는 갑자년 구상을 갖고 있었다. 이해는 사도세자가 칠순이 되는 해였는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자신의 평생 소원인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승하는 작업을 주도하게 하고, 자신은 화성으로 이주해 상왕 자격으로 대대적인 정치 개혁을 실시하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그 4년 전인 재위 24년(1800년) 독살설 끝에 끝내 세상을 떠남으로써 무위로 돌아갔다. 정조의 숙원이었던 조선 정치 체제의 획기적 개편은 무위에 그쳤지만 정조는 조선에서 성공한 마지막 임금이었다. 그의 시대에는 미래가 있었고, 그래서 희망이 있었다. 만약이지만, 그가 조금만 더 살아서 아들 순조가 정순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을 받지 않고 이가환·정약용 같은 신하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정조의 개혁 정치를 이어갔다면 조선은 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미래 대신 과거를 지향하는 정권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은 수도 없이 검증된 역사적 사실이다. 미래 지향의 정치는 힘들고 과거 지향의 정치는 쉽다. 그래서인지 지난 정권에 이어 현 정권도 이 쉬운 길을 선택함으로써 실패의 길을 반복해서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비극적 교훈을 정조의 지난했던 삶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잘 말해주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