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그룹 4세대 후계 구도에 이상 기류
  • 정태선│이데일리 기자 ()
  • 승인 2015.06.02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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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원 부사장 입지 급부상

기업들의 주주총회가 한창이던 지난 3월 말. 두산의 정기이사회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120년 역사를 지닌 국내 최장수 기업 두산그룹이 4세대로 이어지는 ‘사촌 경영’으로 국내 재벌사에 또 다른 장을 펼칠 수 있을지 시선이 모아졌다. 두산이 4세 경영을 시작하면 국내 재벌 중에서는 첫 사례가 된다. 물론 두산의 후계 구도 재편은 아직 가시화되지 않았다. 이사회를 앞두고 국세청의 특별 세무조사가 시작됐고, 최근 중앙대 사태 등 악재로 후계 구도 재편은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그룹이 박용만 두산 회장을 마지막으로 3세 시대를 끝내고, 조만간 4세대에 접어들 것이란 전망이 재계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두산그룹의 이상 기류는 올해 초부터 조금씩 감지됐다. 박용만 회장(60)이 물러날 것이란 얘기가 최측근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두산그룹 오너 일가가 가족 모임을 통해 그룹 회장직을 3년으로 정하고, 4세대가 돌아가면서 맡기로 의견을 모았다는 것.

박용성 전 중앙대 이사장 겸 두산중공업 회장 ⓒ 시사저널 박은숙
4세대 ‘사촌 경영’ 밑그림, 변수 여전

이에 따라 박용만 회장이 그룹을 대표하는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조카이자 4세대 장자인 박정원 (주)두산 회장(53)이 그룹 회장직을 공식적으로 맡을 예정으로 알려졌다. 지주사인 ㈜두산 의장직을 박정원 회장이 맡는 형태로 후계 구도를 공식화한다는 것이다. 박용만 회장도 2012년 3월 말 형인 박용현 전 두산그룹 회장이 용퇴하면서 ㈜두산의 이사회 의장을 맡는 형식으로 그룹 경영 전면에 등장한 바 있다.

두산그룹은 박두병 초대회장 작고 이후 ‘박용곤→박용오→박용성→박용현→박용만’ 회장으로 경영권이 이어져왔다. 두산가 3세의 막내인 박용욱 이생그룹 회장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일찌감치 두산그룹을 나와 개인 사업을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재계에서는 박용만 회장 이후 박정원 (주)두산 회장-박지원 두산중공업 부회장-박진원 (주)두산 사장 등으로 이어지는 오너 4세 간 ‘사촌 경영’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해왔다.

이미 오너 일가의 지분 관계는 4세로 대부분 정리가 끝난 상태다. 박용만 회장 등 3세들이 지닌 그룹 지주사 지분율은 11.59%인 데 반해, 4세들의 지분율은 30%에 달한다. 4세 경영의 선두 주자인 박정원 회장은 두산그룹의 가장 큰 어른인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으로 ㈜두산 지분 6.40%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이어 차남인 박지원 두산중공업 부회장이 4.27%로 2대 주주고, 박용만 회장(4.17%)은 3대 주주에 머물러 있다. 이 밖에도 4세인 박진원 전 두산 산업차량BG 사장(박용성 전 중앙대 이사장 겸 두산중공업 회장 장남)이 3.64%, 박석원 두산엔진 상무(박용성 전 이사장 차남)가 2.98%, 박태원 두산건설 부사장(박용현 두산연강재단 이사장 장남) 2.69%, 박서원 오리콤 부사장(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장남)이 1.96%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국세청 조사나 중앙대 사태 등 대형 악재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변수가 생겼다. 총수 자리를 놓고 기존에 형성됐던 4세 간 균형이 흔들리고 있다. 맏형인 박정원 회장이 그룹 총수 후보 1순위로 떠오르고 있지만, 동시에 자질 검증 문제가 부담이 되고 있다. 박정원 회장은 2012년부터 박용만 회장과 함께 지주사인 (주)두산의 회장을 맡으면서 그룹 경영의 큰 흐름을 익혀왔다. 아버지인 박용곤 명예회장도 틈틈이 지분을 넘기면서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렇지만 그가 도맡아온 두산건설의 실적 악화는 한동안 그룹 전체에 부담을 줬다. 두산이 신성장 동력으로 삼는 연료전지나 3D 프린팅 사업, 핵심 사업인 ISB(인프라 지원 서비스)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는 데 공을 세워야 하는 처지다. 또 인력 구조조정으로 위축된 그룹 내부 결속을 다지는 것도 만만치 않은 과제다. 하지만 박 회장은 아직까지 그룹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반면 박용만 회장의 입지는 더욱 커졌다. 그룹뿐 아니라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왕성한 대외 활동을 하면서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1955년생으로 젊은 편이고, 합리적이면서 격의 없는 행보로 보수적인 두산그룹의 이미지를 바꿔나가고 있다. 또 그룹의 DNA를 주류·식품 업종에서 중공업·기계 산업 중심으로 바꾼 일등공신이란 평가도 받고 있다. 경기 침체 속에서 터져 나온 각종 악재를 수습하기 위해서라도 박용만 회장 체제가 더 유지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이 과정에서 한동안 그룹과 거리를 뒀던 박서원 부사장의 입지도 탄탄해지고 있다. 지난해부터 계열사인 오리콤 경영에 합류하면서 4세들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지분이 적은 박서원 부사장이 후계 구도에 당장 이름을 올릴 수 있는 형편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 그룹 총수인 박용만 회장의 장남이고, 광고 천재로 불리며 개인 회사를 운영한 독특한 이력도 있다. 박 부사장은 계열사에 들어온 이후 대형 광고를 연속으로 수주하며 자신만의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는 등 그룹 안팎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 연합뉴스
위기 돌파 위한 경영진 세대교체 탄력받나

반면 기대주였던 박진원 전 두산 산업차량BG 사장은 후계자 그룹에서 멀어졌다. 그는 2011년 적자로 골치를 앓던 부서를 흑자로 돌려놓고 안정적인 매출 구조를 달성한 공로를 인정받아 사내 특별상을 받았다. 4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경영 능력을 보였다. 행동이 시원시원하고 주관이 뚜렷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내부 신망도 두터웠다. 20년 가까이 경영 일선에서 가업을 물려받을 준비를 해왔지만, 개인적인 문제로 인해 한순간 그룹 내 입지가 약화됐다. 아버지 박용성 전 두산중공업 회장도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했다. 박 전 회장은 2005년 터진 ‘형제의 난’으로 경영에서 물러났다가 복귀했다. 하지만 최근 뜻하지 않은 중앙대 사태로 또다시 불명예 퇴진하게 됐다. 두산가 후계 구도 재편의 핵심 축이었던 ‘부자’가 거의 동시에 무너진 셈이다.

일각에서는 경기 불황에 대형 악재까지 이어지면서 두산그룹의 4세 경영 체제가 예상보다 빠르게 전환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두산은 지난 2005년 고 박용오 전 회장의 비자금 폭로로 형제 3명이 법정에 서는 이른바 ‘형제의 난’을 겪었다. 그룹에 대한 신뢰가 바닥에 떨어지자 회장직을 사퇴하고 비상경영위원회를 가동해 위기를 모면한 경험이 있다. 이번에는 4세를 전면에 내세워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르면 하반기 구체화될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두산가 4세들이 경영권을 물려받는 데 필요한 지분 정리는 충분히 이뤄졌지만, 경영인으로서 인정받을 만한 성과를 보여줬는지 생각해봐야 한다”며 “그룹의 차세대 성장 동력을 육성하는 등 능력을 보여줘야 향후 경영권 승계를 논의할 명분이 생기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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