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연-김남길의 종잇장처럼 얇은 사랑
  • 이은선│<매거진 M> 기자 ()
  • 승인 2015.05.26 18:3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승욱 감독이 메가폰 잡은 영화 <무뢰한>

“거칠고 투박하고 어떻게 보면 끔찍한 세상,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는 하나도 없는 캐릭터들이 바글거리는 속에서 결국은 종잇장처럼 얇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보여주는 남과 여의 이야기다.” 5월13일 서울 왕십리 CGV에서 열린 <무뢰한> 언론시사회 기자회견에서 오승욱 감독이 한 말이다. 

이 영화는 잠적한 살인범을 잡아야 하는 형사 재곤(김남길)과 살인범의 애인 혜경(전도연)의 이야기다. 재곤은 범인을 잡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혜경은 살인범 준길(박성웅)을 검거할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다. 재곤은 영준이라는 이름으로 정체를 숨긴 채 혜경이 일하는 단란주점의 영업상무로 들어가 위장 수사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준길을 잡겠다는 목표 하나만 좇던 재곤. 그러나 혜경의 곁에 머무르는 동안 점차 그녀에게 마음이 기운다. 언제 올지 모를 준길의 연락을 기다리면서 그에게 이용만 당하고 있던 혜경 역시 자신의 옆을 지키는 재곤에게 서서히 마음을 연다. 그의 진짜 정체는 눈치 채지 못한 채로.

‘무뢰한(無賴漢)’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아무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자신이 쟁취할 목표나 해야만 하는 행동이 있을 때 어떤 방향으로든 나아갈 수 있는 존재. 오로지 목표 지향적인 그는 자신의 행동이 선한지 악한지 구분하려 들지 않는다. 무뢰한에 대한 단상은 오승욱 감독이 15년 전 <킬리만자로>(2000년)를 만들 때부터 시작됐다. 당시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조직폭력배와 형사를 취재했다. 그러면서 범죄자와 법의 수호자라는 상반된 세계에 속해 있는 이들의 행동 본질은 똑같다는 데 흥미를 느꼈다. 목적은 다르지만 그들은 투박하고 때론 폭력적인 방식으로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의 전도연 ⓒ CGV아트하우스 제공
범인 애인이 일하는 술집 위장취업

감독의 이 같은 생각은 <무뢰한>의 재곤에게 그대로 투사된다. 재곤은 수사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한다. 그런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범죄자와 나를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다. 범죄는 악, 그들을 단죄하는 일은 선. 애초 재곤에게는 그 구분이 명확했다. 그런데 준길에게 복수하기를 원하는 조직이 재곤에게 은밀한 제안을 해오면서 그는 자칫 범죄자의 위치에 놓일 수도 있는 상황이 된다. “(이렇게 그 조직에) 매수되는 것이냐”고 묻는 재곤에게 그의 선배는 이렇게 말한다. “사냥하는데 매수가 어디 있나. 잡으면 되는 거지.” 잡혀서 목을 물어뜯기지 않으려면 먼저 잡아야 하는 비정한 세계. 정체를 숨길 수밖에 없는 재곤처럼 가짜가 난무하는 그 한가운데 사는 <무뢰한>의 인물들이 서로에게 묻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정체의 진실 그리고 감정의 진실이다.

진짜와 가짜 사이의 진실게임. 이는 오승욱 감독이 <킬리만자로>에서부터 펼쳐온 줄다리기다. <킬리만자로>는 쌍둥이 형제 이야기다. 형 해식(박신양)은 가족을 내팽개친 채 사는 불한당 같은 경찰이고, 동생 해철(박신양이 1인 2역)은 비록 건달이지만 동료들과 신뢰를 주고받을 줄 아는 인물이다. 그런 해철이 해식이 보는 앞에서 권총으로 자살한다. 동생의 유골을 들고 고향 주문진을 찾은 해식. 그곳에서 해철과 호형호제하던 들개(안성기) 일행을 만난다. 들개 일행은 해식을 보며 떠났던 해철이 돌아온 것으로 오해하고 극진히 대접한다. 해식은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동생인 척 행세한다. 그러면서 해식은 관심도 없었던 동생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해식은 자신의 삶 반쪽에 죽은 동생 해철을 채워넣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것은 ‘무뢰한’으로 살았던 해식이 잃어버렸던 인간성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 끝은 결국 철저하게 비극을 향한다.

<무뢰한>은 이와 닮은 듯 다르다. 비정한 풍경에 대한 묘사는 같되 그 안에 멜로가 있다는 점에서다. 이 영화가 표방한 ‘하드보일드 멜로’란 새로운 장르가 아니라, 멜로를 만드는 영화적 스타일과 더욱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뢰한>에는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노래하는 인물들이 없다. 사랑과 괴롭힘을 구분할 수 없는 건조하고 거칠고 투박한 말과 행동만이 존재한다. 오승욱 감독은 그것이야말로 삶의 나락에 떨어진 이들이 지닌 슬픔과 고통에 제대로 접근해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초반 장면은 이를 분명히 한다. 혜경을 만나기 전, 재곤은 준길이 저지른 살인 사건 현장에 도착해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의 시체와 그 옆에서 넋이 나가 있는 한 여자를 본다. 상황을 파악하려는 재곤에게 동료 형사는 이렇게 말한다. “원래는 앉은 채로 찔려 죽었는데 저 애인이라는 여자가 안 된다는데도 한사코 시체를 반듯이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겁니다.” 이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켜주려는 마음에 다름 아니며, 바로 <무뢰한>이 그리는 사랑의 정수다. 그 사랑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서로에게 엄청난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치명적 약점이 된다.

영화 의 김남길 ⓒ CGV아트하우스 제공
김남길·전도연 혼신 연기로 식상한 스토리 극복

<무뢰한>은 새롭지 않다. 위장 경찰이 범인의 여자에게 사랑을 느낀다는 설정이 신선하다고 볼 순 없다. 이야기는 재곤과 혜경이 서로의 마음을 두고 벌이는 진실게임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미덕은 분명하다. 인물의 감정에 더없이 착 달라붙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데 안정적으로 도달한다는 점이다. 그걸 가능하게 한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혼란스러운 감정을 서걱거리는 표정 안에 담아낸 김남길도 발군이지만, 전도연은 ‘역시’라는 감탄사를 절로 부르는 연기를 펼친다. 그가 연기하는 혜경은 위태로운 감정의 드라마를 단단하게 지탱하는 축이다. 혜경은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사는 인물이 아니다. “상처 위에 또 상처, 더러운 기억 위에 또 더러운 기억”을 쌓고 사는, 그럼에도 사랑을 유일한 꿈으로 품고 있는 여자다. 오승욱 감독은 그런 혜경을 ‘끔찍한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견뎌내고 자신의 존엄에 대해서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여자’로 그렸다. 두 배우의 호연과 감독의 뚝심은 오랜만에 인물의 감정과 쉽사리 타협하지 않고 진득한 멜로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

이 영화는 현지 시각으로 5월15일 68회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상영작으로 소개됐다. <밀양>(2007년)으로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고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던 전도연에 대한 예우이긴 하지만, 작품으로서도 현지에서 꽤 호평받았다. ‘스크린데일리(Screendaily)’는 “누아르풍 스릴러와 멜로 드라마가 합쳐져 독특한 세계를 만들어낸다”고 평했다. ‘할리우드 리포터(The Hollywood Reporter)’는 “다양한 층위를 지닌 영화”라며 “캐릭터의 혼란스러운 심리 뒤에 숨은 갈등의 결을 전부 보여줬다”고 배우들에 대해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