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39. 나라 위한 눈물엔 백성도 함께 운다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5.05.26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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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전사 소식에 온 백성 통곡…선조는 자기 보신 위해서만 부끄러운 눈물

눈물은 억울한 사람들이 흘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의 눈물은 조금 다른 듯하다. 조선 제20대 임금 경종(재위: 1720~1724년) 때 집권 세력 ‘노론(老論)’이 집단으로 눈물을 흘린 일이 있었다. 노론은 자신들이 죽인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즉위하자 왕위 빼앗기에 나섰다. 경종 원년(1721년) 8월 노론 소속의 사간원 정언(正言) 이정소(李廷?)는 “전하의 춘추가 한창이신데도 후사(後嗣)가 없어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고 인심이 흩어져 있다”면서 후사를 빨리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만 서른셋이었던 경종에겐 아들이 없었다. 노론은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영조)을 의중에 두고 이런 소동을 벌인 것이었다.

노론, 쿠데타 위해 경종에게 ‘후사’ 다그쳐

이정소의 상소는 노론의 치밀한 각본에 따른 것이었다. 바로 그날 밤 영의정 김창집 등 정승들과 병조판서 이만성 등 판서들, 대사헌 홍계적, 대사간 홍석보 등 대간(臺諫)들, 그리고 승지 조영복 등이 경종에게 떼거리로 몰려가 후사를 당장 결정해야 한다고 다그쳤다. 아들 없는 임금에게 “오늘 당장 차기 임금이 누구인지 결정하라”고 다그치는 것이니 태종 때 같았으면 모두 능지처참을 당할 일이었다. 경종 지지 세력인 반대파 ‘소론(少論)’이 알기 전에 해치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태종 때 같았으면 영의정부터 나서 “이정소의 목을 베소서”라고 주청해야 하지만 영의정 김창집은 거꾸로 “지금 대신(臺臣·이정소)의 말이 지당하니 누가 감히 이의가 있겠습니까?”라고 가세했다.

‘경종 독살설’에 시달리며 신하 앞에서 눈물까지 보였던 영조. 사진은 SBS 드라마 의 한 장면. ⓒ SBS 제공
경종도 이것이 쿠데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정승·판서·대간·승지가 모두 가담한 노론의 공세를 막을 힘이 없었기에 수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노론 대신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선왕(先王,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수결(手決)을 요구했다. 정사에 관여할 수 없는 대비까지 끌어들인 것은 훗날 역모로 몰릴 때에 대비해 안전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종이 한밤중 대비전에 들어가서 수결을 받는 동안 노론 대신들은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경종은 새벽녘에 나와서 인원왕후의 수결을 노론 대신들에게 넘겼는데, <경종실록>은 이 장면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김창집이 (봉서를) 받아서 뜯었다. 피봉 안에는 종이 두 장이 들었는데, 한 장에는 해서(楷書)로 ‘연잉군’이란 세 글자가 써 있었고, 한 장은 언문 교서(敎書)였는데, “효종 대왕의 혈맥과 선대왕(숙종)의 골육(骨肉)은 다만 주상(경종)과 연잉군(영조)뿐이니, 어찌 딴 뜻이 있겠소?”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읽어 보고는 울었다.’(<경종실록> 1년 8월20일)

드디어 쿠데타가 성공한 것이었다. 노론 대신들이 흘린 눈물은 쿠데타에 성공한 당인(黨人)들의 눈물이었다. 쿠데타를 위한 눈물이자 당을 위한 눈물인 것이었다. 그러나 쿠데타에 가담한 노론 이외에는 아무도 같이 울지 않았다. 소론은 자신들도 모르게 차기 임금이 결정된 것에 분노의 눈물을 흘렸다.

노론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같은 해 10월에는 사헌부 집의 조성복을 시켜 왕세제 대리청정을 주청하게 했다. 사실상 세제 연잉군에게 정권을 내주라는 요구였다. 왕조 국가에서 신하가 대리청정을 요청하는 것은 그 자체가 역모였다. 경종은 이때도 “진달(進達)한 바가 좋으니 어찌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면서 세제 대리청정을 수락했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소론 좌참찬 최석항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와 눈물을 흘리며 입대(入對)를 요청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노론의 탄핵을 받아 조정에 나오지 않던 소론 우의정 조태구도 옷깃을 눈물로 적시면서 “대리청정 명의 환수는 신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곧 온 나라 사람의 말입니다”라고 호소하자 경종은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취소했다. 소론 최석항과 조태구가 흘린 눈물은 힘없는 임금 경종을 위한 눈물이자 나라를 위한 눈물이었다.

노론의 백주 쿠데타는 소론의 심한 반발을 낳았다. 이해 12월 소론 강경파인 사직(司直) 김일경이 노론 4대신을 사흉(四凶)으로 공격하는 상소를 올려 정권을 노론에서 소론으로 교체한 데다, 이듬해에는 목호룡이 “노론 집안 자제들이 경종을 살해하려 했다”고 고변하면서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등 노론 4대신이 사형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쿠데타 성공 때 흘렸던 기쁨의 눈물이 통곡의 눈물로 변한 것이다.

‘경종 독살설’ 이어 사도세자 죽음 이어져

그러나 경종은 재위 4년 만에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노론에 의해 세제로 추대된 연잉군이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영조였다. 이런 무리수로 왕위에 오른 영조의 앞날이 순탄할 수 없었다. 영조는 즉위 내내 ‘경종 독살설’에 시달렸고, 그때마다 눈물을 흘려야 했다. 영조 재위 31년(1755년) 2월 나주 객사(客舍)에 ‘간신이 조정에 가득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었다. 범인을 체포하니 영조 즉위 직후부터 영조 31년까지 30년 이상 귀양살이하고 있던 윤지(尹志)를 비롯한 소론 강경파들의 소행이었다. 이들은 영조가 경종을 독살한 역적이고 자신들이 경종의 충신이라고 믿는 확신범들이었다. 경종이 세상을 떠나기 나흘 전인 경종 4년(1724년) 8월21일자 <경종실록>은 ‘임금에게 어제 게장을 진어하고 이어서 생감을 진어한 것은 의가(醫家)에서 매우 꺼려 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게장을 먹고 생감을 먹는 것은 경종 같은 환자에게는 치명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의학적 경고였다.

소론 강경파는 게장과 생감을 진어한 장본인이 왕세제 연잉군과 대비 인원왕후 김씨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주 벽서 사건으로 체포된 신치운은 “신은 갑진년(경종 4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다”라고 말했고, 이 말을 들은 “임금이 분통하여 눈물을 흘렸다”라고 <영조실록> 31년(1755년) 5월20일자는 적고 있다. 세제 시절 노론과 손잡고 임금을 제거하려 했던 영조의 그릇된 과거가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러나 이 눈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 눈물이 결국 노론과 손잡고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둬 죽이는 결과로 나타났다. 어찌 보면 이는 독살설 속에서 죽은 경종이 수십 년 후에 뿌리는 복수의 피눈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임진왜란 중 선조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KBS 드라마 의 한 장면. ⓒ KBS 제공
선조의 눈물은 자신 위해 혼자 흘리는 ‘사루’

지도자가 못나면 백성이 눈물을 흘리게 되어 있다. 조선 14대 임금 선조가 그런 용군(庸君)이었다. 재위 25년(1592년) 4월 임진왜란 때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도망갈 생각만 앞세웠다. <선조실록> 25년 4월28일자는 선조가 도망갈 생각을 내비치자 “대신 이하 모두가 눈물을 흘리면서 부당함을 극언하였다”고 전한다. 박동현이 이때 “전하의 연(輦·가마)을 멘 인부도 길모퉁이에 연을 버려둔 채 달아날 것입니다”면서 ‘목 놓아 통곡하니 상(선조)이 얼굴빛이 변하여 내전으로 들어갔다’고 <선조실록>은 전한다. 그러나 자기 살 궁리만 앞선 선조는 4월30일 비 내리는 새벽 도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주했다. <선조실록> 25년 4월30일자는 “궁인(宮人)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걸어서 따라갔다”라고 전한다.

이렇게 못난 선조가 전쟁 영웅 죽이기에 나섰는데 이순신이 그 대상이었다. 선조와 ‘서인(西人)’들이 이순신을 죽이기 위해서 체포해가자 지나는 곳곳의 백성들이 모여들어 “사또는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통곡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임금께서 이 일이 모두 사실은 아닐 것이라 의심해서 성균관 사성 남이신을 보내 한산도로 가서 사찰(査察)하도록 하였다. 남이신이 전라도에 들어가니 군사와 백성들이 길을 막고 이순신의 원통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나 남이신은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정유년(1597년) 7월21일자 <난중일기>에는 “오후에 노량에 이르니 거제현령 안위, 영등포만호 조계종 등 여러 사람이 와서 통곡하고, 피하여 나온 군사와 백성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전한다. 백성들은 이 비운의 영웅의 고통을 자신들의 것으로 일체화시켰다. <난중일기> 9월9일자는 “낙안에 이르니 사람들이 오리(五里)까지 많이 나와 환영했다…군청에 이르니 관청과 창고가 모두 다 타버렸는데, 관리와 마을 사람들이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고 와서 봤다”라고 전한다.

이순신은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전사하는데, <선조실록> 31년(1598년) 11월27일자는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선조는 예외였다. <선조실록> 31년(1598년) 11월24일자는 명나라 군문(軍門)에서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전하며 그 후임자를 즉시 차출해야 한다고 전하자 선조는 이렇게 전교한다. “알았다. 오늘은 밤이 깊어 할 수가 없다. 내일 아침에 승지는 배첩(拜帖)을 가지고 나아가 치사(致謝)하라. 통제사는 즉시 비변사로 하여금 천거해서 차출케 하라. 모든 일을 승정원이 살펴서 시행하라.”

선조는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온 백성이 울부짖는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선조는 정적(政敵)의 죽음을 알리는 희소식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선조는 자신을 위해서는 여러 차례 눈물을 쏟았지만 백성을 위해서나 이순신 같은 전쟁 영웅을 위해서는 울지 않았다. 그래서 선조의 눈물은 혼자 흘리는 사루(私淚)였다.

지금 툭하면 눈물을 쏟는 정치인들은 왜 국민이 함께 울지 않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국민은 울지 않는데 혼자 우는 눈물은 부끄러운 눈물일 수밖에 없다. 정치인이 공인(公人)이라면 그들의 눈물도 공루(公淚)여야 한다. 그러나 근래 들어 흔해진 정치인의 눈물은 사루(私淚)에 불과하다. 함께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함께 공루를 흘릴 수 있는 정치인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비단 필자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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