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엔지니어링, 직원 사망 사건 진실 게임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승인 2015.05.21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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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현지 법원 조사 보고서 입수…삼성 측 “경호업체 거짓 주장”

지난해 8월3일 이라크 현장에 근무하던 삼성엔지니어링 직원 차 아무개씨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회사 측이 작성한 사고 초기 보고서에 따르면 차씨는 이날 오후 8시30분쯤 이라크 바그다드 남동쪽에 위치한 바드라(Badra) 현장을 떠났다. 다음 날 오전 9시로 예정된 이라크 석유장관과의 미팅을 위해서였다. 경호 차량을 포함해 두 대의 차량이 출발했고, 차씨는 최 아무개 공무팀장과 경호원 등 4명과 함께 뒤쪽 승합차에 탑승했다. 차씨가 타고 있던 차량은 아지지야(Aziziyah) 지역 인근의 고속도로를 지나던 중 사고를 당했다. 오른쪽 뒷바퀴 타이어가 펑크 나면서 차량이 5~6번 굴렀고, 차씨는 열린 차문으로 튕겨져나가 사망했다. 이때가 밤 10시45분이었다. 보고서에는 ‘차씨가 중간 휴식 이후에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적시돼 있다.

경호업체 ‘불가’ 통보에도 밤 8시30분 출발 강행

2014년 8월 이라크 현장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망한 삼성엔지니어링 직원의 아버지가 5월14일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서울 상일동 사옥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유족들은 삼성의 발표에 불신을 표시했다. 동승했던 직원들의 증언이 보고서 내용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나마 진술 내용도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었다. 이들은 사건 초기 유족들을 만나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은 사람은 최 아무개 공무팀장”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공무팀장은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고, 안전벨트를 맨 차씨는 외부로 튕겨져 사망한 것이다. 사고 시점도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보고서에는 ‘사고 차량이 시속 80㎞로 주행하다 전복됐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사고 현장에 있던 직원들의 증언은 달랐다. 사고 차량은 시속 100㎞ 이상으로 달리는 상태였다. 사망한 차씨가 운전사에게 “과속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줄 정도였다고 한다. 유족들은 “삼성이 경호업체와 짜고 사건을 은폐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삼성엔지니어링 측은 “이라크 당국에서도 단순한 교통사고로 사건을 처리했다”며 은폐 의혹을 부인했다.

시사저널은 삼성이 발표한 사고 경위와 사망 시간, 경호업체의 대응, 삼성의 후속 처리 등이 석연치 않아 지난해 8월부터 여러 차례 사건을 보도했다. 특히 사고 차량은 경호업체인 N사 소유가 아니라 정부 차량이어서 의문이 컸다. 추가 취재 과정에서 이라크 법원의 사건 조사 보고서를 입수할 수 있었다. 보고서에는 당시 사고 차량 운전자와 동승한 경호원, 법적 대리인의 진술이 포함돼 있다.

사고 당시 차씨가 이용했던 차량은 이라크 광산부 소유 차량이라는 점이 우선 눈에 띈다. 운전자 역시 광산부 소속으로 경호업체인 N사와는 무관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라크 법원 보고서에 기록된 운전자 H씨의 진술을 정리하면 이렇다. 그는 사고 당일 정오에 광산부 지시로 바그다드에서 바스라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이 과정에서 차량에 고장이 발생했다. 상부에 보고하고 바그다드로 돌아가던 중에 택시(렌터카 추정) 한 대가 고장 나서 도로 옆에 서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일행 중에 안면이 있는 경호업체 직원도 있었다. 이 직원은 바그다드로 데려다줄 것을 부탁했고, 일행을 태우고 가는 도중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내용이었다. 경찰뿐 아니라 법원 증언도 동일했다. 이라크 광산부의 법적 대리인 F씨는 “사고 차량은 광산부 소속으로 한국인 희생자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법원에서 진술했다.

사고 당시 차씨와 동승했던 경호업체 직원 A씨의 법정 진술도 비슷하다. 그는 “차량 한 대를 대여해 한국인 3명과 함께 바그다드로 가다 고장을 일으켰고, 우연히 H씨를 만나 바그다드로 가다 사고가 발생했다”고 진술했다.

차씨 일행이 경호 차량을 포함한 두 대의 차량에 나눠 타고 현장을 출동했다는 당초의 삼성 측 주장과 배치되는 것이다. 특히 삼성은 N사와 경호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계열사인 에스원도 컨소시엄에 참여시켰다. 재판 과정에서 직원 경호에 실패한 것으로 드러날 경우 불똥은 계열사인 에스원 등으로 튈 것으로 예상된다.

본지가 입수한 이라크 법원의 조사 보고서 공증본.
사망한 직원 아버지 1인 시위 계속

삼성의 발표를 의심하고 있던 유족들도 반발하고 있다. 법원 조사대로라면 삼성이 사고 초기부터 허위 보고서를 작성해 유족 등에게 알린 셈이 되기 때문이다. 차씨의 아버지는 5월6일부터 매일 아침 서울 상일동 삼성엔지니어링 사옥 앞에서 진상 규명을 요청하며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는 5월14일 기자와 만나 “삼성이 그동안 아들 사건을 은폐한 사실이 법원 조사에서 드러난 것”이라며 “삼성이 사과하고 진실을 밝힐 때까지 1인 시위를 계속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삼성엔지니어링 측은 “경호업체인 N사와 광산부 직원이 허위 진술을 하고 있다”며 “경찰과 법원 조사 과정에서 왜 갑자기 입장을 바꿨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삼성 측은 뒤늦게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하고 이라크 법원에 허위 진술이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삼성 관계자는 “사고 당일 문제의 차량을 배차했다는 N사의 이메일을 보관하고 있다”며 “N사에도 지속적으로 허위사실의 정정을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삼성엔지니어링 측은 현재 N사와의 계약 해지도 검토 중이다. 회사 관계자는 “N사의 차량 배치 문제나 보고 지연 및 누락 등 계약상 해지 사유가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며 “당장 경호업체를 교체할 경우 현장 안전 확보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여러 상황을 고려하면서 경호업체 교체를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위증을 주장한 경호업체가 삼성엔지니어링의 파트너 회사와 이라크 정부 당국이어서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경호업체의 법률 고문 A씨는 법원에서 “사건 당일 밤에 삼성의 프로젝트 매니저 등이 석유장관 주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바그다드행 운송편을 요청했다”며 “보안 차량은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만 운행할 수 있기 때문에 민간 차량을 이용해 이동하는 것에 대해 삼성 측의 동의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삼성이 밤 9시에 현장 출발을 강행한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이 생긴다. 삼성 또한 왜 9시 출발을 강행했는지, N사가 어떻게 해서 광산부 차량을 이용하게 됐는지에 대해 명확히 소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회사 관계자는 “현장의 차량 운행일지나 CCTV 등이 보관돼 있지 않다”며 “운전자와 경호업체 직원들이 진술을 번복한 이유는 비공식적으로 정부 차량을 섭외한 데 따른 불이익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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