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統一)은 대박이 아니라 통일(通一)”
  • 조철│문화 칼럼니스트 ()
  • 승인 2015.05.07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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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선생 삶과 철학 오롯이 담긴 <담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출소 후 많은 독자를 만난 신영복 선생(76)이 한 시대를 돌아보는 책 한 권을 얹었다. 진영 논리를 떠나 강단에서 강의하고 제자들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옮긴 것이다. <강의>에 이은 <담론>이라는 책이다.

신 선생은 194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과 강사를 거쳐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있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복역한 지 20년 20일 만인 1988년 8월15일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다.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2006년 정년퇴임 후에는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담론>은 그가 지난해 말 마지막 강의를 한 것을 계기로 그동안 해온 강의를 정리해 엮은 것이다. 25년 동안 대학 강의를 한 셈인데, 선생은 더 이상 강단에 서지 못하는 미안함을 이 책으로 대신한다고 밝히고 있다.

“강의는 사람과 삶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즉 인간과 세계에 관한 인문학적 담론이다. 당연히 여러분이 살아오면서 고민한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 돌베개출판사 제공
<논어>의 화동(和同) 담론 현대 문맥으로 읽다

신 선생의 강의실에는 늘 웃음이 넘쳤다. 칠순을 넘긴 노학자가 가진 재치와 유머는 젊은 사람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교재가 있지만 미리 읽어오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 미리 읽어오라고 해봐야 읽어올 사람이 몇 안 된다는 것. 둘째, 한 사람이 교재를 낭독하고 전체가 조용히 함께 듣는 교실의 풍경은 공감(共感) 공간의 절정(絶頂)이라는데…. 수강생 한 명이 교재를 낭독하는 동안 강의실에는 교감 에너지가 넘치면서 ‘아!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라는 가슴 뭉클한 위로가 전해진다는 것이다.

신 선생의 강의에 현 정부의 성급한 통일 논리에 일침을 가하는 내용이 있어 눈길을 끈다. 신 선생은 <논어>를 이야기하면서 “‘통일은 대박’이라는 관념은 패권주의이며 동(同)의 논리”라며 강의를 이어갔다.

“<논어>에서 화동(和同) 담론은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를 줄여서 붙인 이름이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군자와 소인이 대비의 개념인 것처럼, 화(和)와 동(同)도 대비의 개념으로 읽어야 한다.  이 화동 담론은 춘추시대 유가학파의 세계 인식이다. 전쟁을 통한 병합을 반대하고 큰 나라, 작은 나라, 강한 나라, 약한 나라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화(和)의 세계를 주장한다. 화(和)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관용과 공존의 논리인 반면에, 동(同)은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다.”

신 선생이 화동 담론을 현대의 문맥으로 다시 읽는 까닭은 동(同)의 논리로 오늘날의 패권적 구조를 조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패권적 질서는 우리 시대의 대세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달러 헤게모니를 지키기 위한 강대국의 폭력이며, 동(同)의 논리라는 것이다. 신 선생은 엄청난 파괴와 살상으로 점철되는 강대국의 패권 구조가 과연 지속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찬가지로 화동 담론은 한반도의 ‘통일 담론’으로서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를 갖는다. 신 선생은 통일(統一)을 ‘通一’이라고 쓴다.

“평화 정착과 교류 협력, 그리고 차이와 다양성의 승인이 바로 ‘通一’이다. ‘通一’이 되면, 언제일지 알 순 없지만 ‘統一’로 가는 길 또한 순조로울 것이다.”

신 선생의 말을 대입해보면 현 정부가 슬로건처럼 내세운 ‘통일은 대박’이라는 관념은 지극히 경제주의적 발상이며, 그 근본은 동(同)의 논리라는 것이다. 민족의 비원(悲願)이며 눈물겨운 화해를 ‘대박’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은 통일을 경제적 논리로 본 것이다.

‘햇볕’ 있는 한 누구도 자살해선 안 되는 이유

신 선생은 남한산성에서 사형수로 1년을 보낸 다음 무기수로 민간교도소에 이송됐다. 그 후 20년 동안의 감옥 생활을 ‘나의 대학 시절’이라 술회한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 끝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긴 동굴이었을 것이다. 신 선생이 있는 감옥에서 수형생활 10년 차의 재소자가 자살했다. 한밤중에 화장실에서 손목을 긋고 죽었다고 한다. 감옥의 ‘재소자 준수사항’에 자살하면 안 된다는 조항이 있다고 하니, 이런 일이 빈번하다는 뜻일 것이다. 신 선생은 남한산성에서 사형수로서 혹독한 임사(臨死) 체험을 했고 이후 20년의 무기징역을 살아오면서 수시로 고민을 했다고 한다. “나는 왜 자살하지 않고 기약 없는 무기징역을 살고 있는가.”

선생이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햇볕’ 때문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길어야 2시간밖에 못 쬐는 신문지 크기만 한 햇볕을 무릎 위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은 살아 있음의 어떤 절정이었다고 한다. 선생에게 겨울 독방의 햇볕은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였고 생명 그 자체였다.

남한산성에서의 끔찍한 임사 체험과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과도 같은 무기수의 삶 속에서도 선생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속에서 역사를 배우고 사회를 배우고 인간을 배웠다. 지난해 말까지 매주 목요일 저녁 8시면 어김없이 신 선생의 강의실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던 이유다. 수강생들 중에는 성공회대학 학생들도 있었지만 나이 지긋한 청강생들이 제법 많았다.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그곳은 신영복 선생의 강의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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