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돈 폭풍’에 권력 지도 쩍쩍 갈라져
  • 양정대│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5.04.28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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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완종 게이트’로 친박 초토화…비주류 쪽으로 무게중심 쏠려

여권의 권력 지도가 ‘성완종 리스트’ 파문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다. 지난해부터 지지부진하던 친박(親朴) 주류는 이번 파문의 직격탄을 맞고 사실상 초토화된 상황이다. 당·정·청은 물론 지방정부까지 망라해 권력의 심장부에 있는 대통령 측근들이 이처럼 한꺼번에 ‘검은돈’ 의혹에 휩싸인 건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다. 그만큼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친박계는 권력의 정점에 여전히 박근혜 대통령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상당 기간 주류로 불리겠지만, 이미 권력의 무게중심은 비주류 쪽으로 넘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대통령이 전 방위 사정을 통해 국정 장악력을 유지하더라도 이미 트인 물꼬를 되돌리기는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4월19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 등이 국립 4·19 민주묘지에서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열린 제55주년 4·19 혁명 기념식에 참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비주류, 당권파ㆍ신보수ㆍ구친이계 정립 구도

사실 여권 내 비주류에는 단일한 중심이 형성돼 있지 않다. 이명박 정부 당시 ‘정치인 박근혜’를 중심으로 친박계가 강고한 흐름을 형성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아직 뚜렷한 ‘미래 권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데, 시기적으로도 박 대통령의 임기는 아직 반환점을 채 돌지 않은 상태다. 한 여권 관계자는 “이전 정부에서 박 대통령이 여당 내 야당을 자처하며 강력한 구심력을 발휘했던 것 자체가 예외적인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물론 크게 보면 세 그룹이 점차 상대적으로 기반을 형성해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뚜렷한 흐름은 김무성 대표를 정점으로 한 당권파다. 지난해 7·14 전당대회 당시 친박계 좌장인 서청원 최고위원을 큰 격차로 따돌렸던 김 대표는 지난 9개월간 꾸준히 당내 기반을 넓혀왔다. 특히 김 대표가 과거 친박계의 좌장이었던 데다, 18대 국회에서 탈박(脫朴)했을 당시 친이(親李)계 및 소장·쇄신 그룹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한 게 현재는 상당한 자산이 되고 있다.

김 대표는 이미 이군현 사무총장과 강석호 제1사무부총장, 김학용 대표 비서실장, 김성태·서용교·이현승 의원 등을 중심으로 상당히 폭넓은 세를 구축했다. 아직까지 서용교 의원 정도를 제외하고는 큰 판을 읽어내고 기획할 만한 측근이 부족하지만, 한 비주류 의원은 “김 대표가 지난 1년 가까이 여권 내 차기 대권 주자 선두를 유지해온 만큼 잠재력은 상당하다”고 평가했다.

물론 김 대표 입장에선 ‘현실 권력’인 박 대통령과의 관계 설정이 가장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지난 대선에서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박 대통령을 당선시킨 일등공신이긴 하나 박 대통령과의 껄끄러운 관계는 여전하다. 김 대표는 지난해 9월 중국 베이징 방문 당시 ‘개헌 논의 봇물’ 언급으로 곤욕을 치른 뒤 복지·세금 논쟁 등 민감한 현안이 불거질 때마다 의식적으로 ‘박근혜 지킴이’를 자처하고 있다. 하지만 한 친박계 재선 의원은 “솔직히 미덥지는 않다”고 말했다.

다른 한 축은 최근 정치적 재기를 도모하고 있는 옛 친이계다. 지금은 어정쩡하게 비주류로 묶여 있고, 이재오 의원이 이따금씩 박 대통령과 친박 주류를 향해 ‘쓴소리’를 하는 정도다. 정병국·원유철·심재철 의원 등 수도권에 기반을 둔 4선 중진들이 있지만, 정치적 무게감에서는 두드러진 활동이 없는 상태다.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주목받는 이유다.

김 전 지사나 오 전 시장의 당내 기반이 그리 뚜렷한 건 아니지만, 이 두 사람이 주목받는 건 내년 총선과 이듬해 대선까지의 정치 일정 때문이다. 친박 주류와 선을 그어온 구친이계 입장에선 미래 권력의 가능성에 베팅을 해볼 수 있는 ‘유이’한 대상인 것이다. 한 수도권 비주류 의원은 “예전 친이계를 재건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지만 적어도 ‘내 편’이라는 생각이 드는 대권 주자가 필요한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당장 현실 정치 공간에서 운신할 수 있는 분명한 입지를 확보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김 전 지사는 현재 내년 총선 출마지로 지난 20여 년간 정치적 기반으로 삼아온 수도권 대신 대구를 염두에 두고 있다. 대구·경북(TK) 지역의 대표성을 확보하는 게 대권 가도에 유리할 것이란 판단 때문이다. 오 전 시장도 내년 총선에서 국회 재입성을 노리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한 측근은 “새누리당 내 차기 대권 경쟁에서 김 전 지사나 오 전 시장이 뭔가 역할을 한다면 이명박(MB) 정부에 대한 정당한 평가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잠재력 큰 유승민 그룹, 정파로 발전할지 주목

비주류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그룹은 유승민 원내대표를 축으로 ‘신(新)보수’를 지향하고 있는 세력이다. 유 원내대표가 지난 2월 친박계 이주영 전 해양수산부장관을 제치고 19대 국회 마지막 원내 수장에 오른 과정을 전후해 이미 이혜훈 전 최고위원과 김세연 정책위 부의장, 조해진 원내수석부대표, 이종훈·민현주 원내대변인, 이이재·김희국 의원 등 ‘유승민 사단’이 형성됐다.

사실 유 원내대표는 여권 내에서 꾸준히 가능성을 인정받으며 차세대 TK 주자로 인식돼왔다. 외교·안보 분야의 강경 보수 색채와 경제·사회 분야의 중도 개혁 성향이 조화를 이룬 만큼 여권 인사들 가운데에선 객관적인 경쟁력에서도 상당히 앞서 있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지난 4월8일 원내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통해 그가 지향하는 ‘따뜻하고 개혁적인 보수’의 밑그림을 선보였고, 야당 의원들로부터도 자발적인 박수를 받을 만큼 정치권 내에서 적잖은 반향을 끌어냈다.

유 원내대표의 향후 행보가 주목받는 또 다른 지점은 진영·정두언 의원, 남경필 경기도지사 등 여권 내 대표적인 중도·쇄신파와의 결합 여부다. 3선의 진 의원과 정 의원은 상대적으로 뛰어난 개인 역량에도 불구하고 당내 조직 기반이 취약하다. 남 지사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유 원내대표를 포함해 이들은 어찌 됐든 여권 내에서 소수파다. 유 원내대표의 한 측근 의원은 “유 원내대표의 신보수 선언이 언론과 여론의 호평을 받았지만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선 당내 기반을 넓히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현 시점에서 이들이 화학적으로 결합할 수 있을지를 예단하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유승민-진영’ ‘유승민-정두언’ 관계는 겉으로 알려진 것보다 상당히 친밀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 원내대표와 남 지사 역시 정치 개혁의 요체를 협치(協治)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기투합할 가능성이 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유승민-진영-정두언-남경필 네 사람의 결합이 현실화할 경우 여권 내 계파와 지역을 뛰어넘어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될 수 있고 야당과의 차기 대권 경쟁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이어 “유 원내대표의 신보수 선언이 현실화할 수 있다면 그 과정에서 참여정부 시절 열린우리당 내 김근태계와 마찬가지로 정파(政派) 형성이 가능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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