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주주총회를 개최한 중견기업 중에는 오너 3세들을 경영 일선에 본격적으로 배치한 기업이 적지 않다. 이런 기업들은 2세 경영을 통해 회사가 한 단계 도약했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에, 2세 못지않은 경영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들은 주주총회를 통해 새로 등기이사에 이름을 올린 만큼 본격적인 시험 무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에 속하는 기업들로는 SPC그룹·사조그룹 같은 식품기업을 비롯해 유진그룹·한솔그룹 등이 꼽힌다.
주총 통해 본격 시험무대 등장
올해로 창립 70주년을 맞은 SPC그룹은 지난 3월20일 허영인 회장의 장남 허진수 파리크라상 전무(38)와 차남 허희수 비알코리아 전무(37)를 삼립식품 주총에서 등기이사로 신규 선임했다. 삼립식품은 SPC그룹의 모태이자 유일한 상장사다. 허진수 전무와 허희수 전무는 각각 11.47%, 11.44%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동안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허 회장은 삼립식품 허창성 창업주의 둘째 아들로 1993년 샤니를 물려받아 본격적으로 경영 전면에 나섰다. 허 회장은 이후 파리바게뜨·파리크라상 등 제빵 브랜드뿐만 아니라 던킨도너츠·베스킨라빈스 같은 프랜차이즈 식품 브랜드를 론칭하며 SPC를 명실상부한 국내 최대 베이커리업체로 성장시켰다. 2000년 4800억원이던 SPC그룹 매출액이 2011년 3조원을 넘어서더니 2013년에는 4조원을 돌파할 만큼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국내 중소 제빵기업에서 이제는 세계 1위 제과 브랜드를 목표로 할 만큼 허 회장이 이룬 성과가 크다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그의 두 아들이 가질 부담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사조그룹 경영권 승계 가시화
창업자인 주진우 회장(66)이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사조그룹은 주 회장의 장남 주지홍 사조대림 기획실장(38)이 그룹 주요 계열사의 등기이사에 올랐다. 사조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사조오양과 사조대림 등은 3월27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주 실장을 등기이사에 선임했다. 주 회장은 주주총회 전 가졌던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젊고 건재하기 때문에 경영권 승계에 속도를 낼 필요가 없다”고 말한 바 있지만, 주 실장으로 경영권이 이동하고 있는 조짐이 포착되고 있다.
주 실장의 등기이사 선임뿐만 아니라 사조오양의 사조남부햄 인수도 그러한 징후 중 하나다. 현재 사조그룹은 주진우 회장→사조산업→사조대림→사조오양을 축으로 순환출자 구조를 이루고 있다. 사조남부햄의 경우 최대주주가 사조대림(지분 91.08%)과 주 실장(8.92%)인데, 사조오양이 사조남부햄을 흡수 합병하기 위해서는 합병 비율(1 대 6.36652)에 따라 사조대림에 사조오양 주식을 넘겨야 한다. 사조오양과 사조남부햄의 합병이 완료되면 사조오양에 대한 사조대림의 지분율은 20.01%에서 58.19%로 크게 올라간다. 주 실장 역시 사조오양 지분 약 4.79%를 쥘 수 있기 때문에 이를 경영권 승계를 위한 사전 정지 작업으로 보는 시선이 적지 않다.
한솔그룹은 범(汎)삼성가 기업 중에서는 처음으로 오너 4세가 등기이사에 올랐다. 주인공은 조연주 한솔케미칼 기획실장(36·부사장)이다. 조 실장은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장녀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의 장손녀이자 조동혁 명예회장의 1남 2녀 가운데 장녀다. 한솔그룹에서는 3세지만, 범삼성가로 보면 4세다. 조 부사장은 펜실베이니아 와튼스쿨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보스턴컨설팅그룹 컨설턴트, 빅토리아 시크릿 브랜드 매니저로 근무하다가 지난해 3월 한솔케미칼에 합류했다. 그는 3월27일 주주총회에서 등기이사에 선임됐다.
조 실장은 이미 지난해부터 회사 경영에 활발하게 참여해왔다. 그는 기획실장으로 일하면서 지난 3월에 있었던 한솔케미칼의 미국 벤처기업 ‘니트라이드 솔루션’ 33억원 투자와 지난해 OCI 자회사 OCI-SNF 지분 50% 인수 작업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는 등기이사에 선임된 만큼 보폭이 더욱 넓어질 전망이다.
이번 주주총회를 통해 본격적으로 경영 일선으로 뛰어든 2~3세들을 보면 나이가 대부분 30대 초반에서 후반 사이에 걸쳐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일부 기업을 제외하고는 선친이 경영 일선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굳이 이른 나이부터 전면에 나서서 외부의 주목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을 등기이사라는 자리에 앉혀서 경영에 참여하게 하는 것은 모두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경영을 배우라는 의미라고 재계에서는 해석하고 있다.
특히 등기이사의 경우 회사에 대한 법적 책임도 질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에 모든 판단에 있어 신중을 기하게 된다. 이는 최근 재계 일각에서 지적되고 있는 ‘오너 리스크’와도 연관이 깊다. 실제로 최근 몇몇 기업들을 보면 오너가 경영 준비가 되지 않거나, 법적 책임감이 떨어져 오히려 오너들이 회사에 해를 끼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이 법적 책임을 지는 등기이사 자리에서 경영에 대한 고민을 한다면 아무래도 ‘오너 리스크’는 다소 감소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