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계와 패션계의 거식증 공방
  • 최정민│파리 통신원 ()
  • 승인 2015.03.31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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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관련 법안 놓고 시끌…패션업계에선 시큰둥

파리 패션계에 지진이 일어났다. 3월16일 프랑스 라디오 ‘유럽1’은 ‘지진’이라는 표현을 썼다. 진원지는 ‘깡마른 모델 퇴출 법안’이었다.

출발은 정치권에서 이뤄졌다. 신경외과 출신인 사회당의 올리비에 베랑 의원은 현재 활동하는 모델들에게 ‘건강진단서’를 의무적으로 제출하도록 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단순히 깡마른 모델을 퇴출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건강관리를 위해서, 그리고 마른 모델들의 이미지로 영향받는 ‘거식증’ 환자를 위한 대책으로 내놓은 개정안이었다. 너무 마른 모델을 고용하는 에이전시에는 최대 6개월의 징역과 7만5000유로에 달하는 벌금을 매기도록 했다. 베랑 의원은 개정안이 상정된 후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패션계가 거식증 위험을 감수하도록 하는 현실을 더는 방치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프랑스 청소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패션업계의 ‘사회적 책임’을 상기시켰다.

3월11일 끝난 프랑스 파리 패션위크의 모습. 최근 깡마른 모델을 퇴출하려는 프랑스 정치권의 시도는 패션업계의 반대에 부닥쳤다. ⓒ AP 연합
프랑스에서 ‘거식증’은 사회적 문제다. 퇴치를 위한 움직임 역시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미 2008년 우파인 대중운동연합의 발레리 부와이에 의원이 유사한 법안을 상정한 적이 있었는데 상원 표결에 부쳐지지도 못한 전례가 있다. 이번 개정안 역시 진도가 더디다. 마리솔 투렌 보건복지장관의 지지까지 끌어냈지만, 상원에 올라가기 전에 하원에서 반려됐다. 베랑 의원은 3월 말 공청회를 거쳐 다시 수정안을 제출할 것이라고 벼르고 있지만 상황은 간단치 않다. 먼저 프랑스 산업의 중요 축인 패션업계에서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지 미지수다. 이번 법안 발의가 보도된 직후부터 샤넬·구찌·생로랑·에르메스 등 대다수 패션 명가들은 어떠한 입장도 내놓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다. 투렌 장관이 개정안에 원칙적으로 지지를 보이면서도 “구체적인 액션에 대해서는 검토가 필요하다”고 한 발짝 물러선 것도 그 때문이다.

막강한 패션업계 눈치 보느라 지지부진

2008년 우파 내각에서는 당시 로즐린 바슐로 보건복지장관의 제안으로 거식증 퇴치를 위한 운동을 추진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모델 노조 대표와 패션잡지 편집장을 한 테이블에 불러 모은 뒤 헌장을 만들어 서명을 하는 데까지 성공했지만 이후 어떠한 결실도 맺지 못했다. 그나마 서명이라도 한 것은 바슐로의 정치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시라크 내각은 물론 사르코지 선거 캠프에서 대변인을 지냈고, 오페라 마니아로 문화예술계에 영향력이 컸다. 익명을 요구한 한 모델 에이전시 대표는 “어떤 패션 브랜드도 당시 거식증 퇴치 운동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 2008년과 2015년의 파리 패션쇼를 비교한 프랑스 방송에 따르면, 모델의 실루엣은 과거보다 더 얇아졌다.

이런 실정이 비단 프랑스 문제만은 아니다. 또 다른 패션 중심지인 이탈리아 밀라노 역시 2006년 유사 법안을 밀라노 시의회가 상정했고 시장이 승인했지만, 패션계는 동의하지 않았다. 밀라노의 모델 에이전시 대표인 리카르도 그레이는 당시 ‘헤럴드트리뷴’과의 인터뷰에서 “그러한 제재를 받아들였다면 밀라노에서 활동하는 모델의 80%가 무대에 설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도 마찬가지다. 정부 차원에서 법안을 상정했고 패션업계도 동의하는 듯했지만, 영국패션협회(BFC)가 막판에 입장을 번복하면서 제재 법안이 마련되지 못했다. 당시 힐러리 리바 BFC 집행위원장은 “이런 제재는 국제적인 차원에서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프랑스의 거식증 환자는 3만~4만명으로 추산되는데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중 90%가 청소년이라는 점이다. 프랑스에서 BMI(신체의 비만 정도를 측정하는 단위) 수치가 낮은 10대의 경우 약 5%만이 영양 섭취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95%는 ‘거식증 위험군’에 속해 있는 셈이다. 베랑 의원은 10대들의 과도한 다이어트를 이유로 패션업계를 정조준했다. 아울러 이처럼 과도한 감량을 부추기는 이른바 ‘프로-아나(pro-ana)’라고 불리는 다이어트 블로그 및 매체들도 제재 대상에 포함시켰다. ‘르피가로’는 “프랑스는 패션의 중심지이지만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뒤처져 있다”고 지적했다.

“파리가 앞장선다면 세계가 따를 것”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곳은 프랑스가 아닌 영국이나 스페인이다. 비록 법안 제정에는 실패했지만 마른 모델 이미지가 유통되는 것을 제어하면서 대안 마련에 나섰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모델 아만다 헨드릭의 사례가 있다. 1980년생인 헨드릭은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활동하는 톱모델이다. 2011년 그녀는 영국의 패션업체인 드롭 데드의 비키니를 입고 사진 촬영을 했는데, 이게 당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다. 너무 마른 몸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민간 단체인 ‘광고 표준 에이전시’는 이 사진을 고발했다. 이 단체는 민간이지만 영국에서 유통되는 광고에 대한 심의권을 갖고 있고 유통되는 광고를 감시하고 고발하는 등 압력을 행사한다. 모토로라의 주력 모델이었던 아트릭스의 광고 문구가 ‘허위’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중단시킨 것도, 기독교 단체의 신앙 치유 광고 문구를 수정시킨 것도 이 단체였다. 이들이 헨드릭의 사진을 광고에서 철회할 것을 요구하며 내건 이유는 ‘사회적 무책임’이다. 톱모델의 깡마른 몸은 사회적인 의무를 소홀히 한 것이라는 이유인데, 아만다는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우아한 여성’으로 뽑힐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인시드(INSEAD) 경영대학원에서 패션과 유행의 사회학을 연구하는 프레드릭 고다르 박사는 “미국에서 평범한 여성의 BMI는 27인데, 모델의 경우 16에 불과하다. 역사적으로 이렇게 격차가 크게 벌어진 적은 없다”고 지적하며 파리의 책임감과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파리가 만약 이번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거식증 퇴치 움직임에 뛰어든다면, 전 세계 패션업계에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파리는 그만한 영향력이 있다.” 고다르 박사가 파리를 유독 강조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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