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28. 류성룡 내쫓은 양반들, 병역 면제 성역 되다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5.03.12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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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 이익만 챙긴 악법 나라 망쳐…‘김영란법’ 논쟁 데자뷰

조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법치국가였다. 국왕도 선조들이 만든 법이란 뜻의 ‘조종(祖宗)의 성헌(成憲)’ 아래 있는 존재였다. 연산군이 쫓겨난 이유도 자신을 법 위의 존재로 착각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조선이 법치국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는 사례 중 하나가 노비도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성종 16년(1485년)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성종실록> 16년 7월28일자는 ‘충청도 진천에 사는 사노(私奴) 임복이 곡식 2000석을 바쳤다’고 전하고 있다. 감동한 성종이 노비 신분에서 면제해주는 면천(免賤)으로 보상하려 하자 승지들이 “본래 면천하여 양민이 되려고 곡식을 바친 것”이라며 반대했다. 임금이 소원을 묻게 하자 임복은 “4명의 아들이 면천되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말했다. 성종이 임복의 면천 문제를 논의하게 하자 찬반이 잇따랐다. 임복은 1000석을 더 기부해 물의를 잠재우고 양인 신분을 얻었다. 그러자 같은 해 8월30일 전라도 남평의 사노 가동이 또 곡식 2000석을 바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양인 신분을 얻기 위해 바쳤다는 이유로 종량(從良·양인 신분으로 바뀜)을 거부했다. 성종은 “종량이 불가하면 곡식을 바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옳다”며 곡식을 받지 않았다.

서애 류성룡의 개혁 정책을 다룬 KBS 드라마 의 한 장면. ⓒ KBS 제공
태종의 ‘종부법’ 개혁 계승 못한 세종의 한계

조선 중기, 조헌이 <중봉집(重峯集)>에서 “우리나라는 천얼(賤孼·천인과 서얼)의 무리들이 혹 사노 100여 명을 가진 자가 있다”라고 말한 것처럼 노비가 노비를 소유할 수도 있었다. 노비들의 재산을 보호하는 법적인 장치가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2000~3000석의 큰 재산을 바쳐서라도 양인이 되고 싶을 정도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는 점이다. 노비제도는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은 가장 큰 주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문제가 많았다.

조선은 토지 문제의 해결을 왕조 개창의 정당성으로 삼았던 나라였다. <고려사>의 ‘식화지(食貨志)’에는 한 집안이 가진 토지의 크기가 ‘산천(山川)으로 경계를 삼는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올 정도로 소수의 권세가들이 토지를 독식했다. 그 결과 가난한 백성들은 새벽부터 밤중까지 들판에 달라붙어 일해도 부모나 자식을 봉양할 수 없었다. 토지 문제 해결이 왕조 개창의 길이라는 정도전의 설명을 이성계가 받아들이면서 고려는 멸망의 길에 접어든다. 역성혁명파는 ‘위화도 회군’ 2년 후인 공양왕 2년(1390년) 공사(公私) 전적(田籍), 즉 관청 소유의 토지문서와 개인 소유의 토지문서를 개경의 궁 앞에 쌓아놓고 불을 질러 기존의 토지 소유를 무효화했다. 이런 토대 위에서 이듬해에 새로운 토지제도인 과전법(科田法)을 공포함으로써 이성계는 구민(丘民), 즉 들판 백성들의 민심을 얻었고, 그 이듬해 드디어 조선을 개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역성혁명파들도 노비 문제 해결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조선이 개창하던 1392년 인물추변도감(人物推辨都監·노비와 관련된 일을 맡아보던 관아)에서 양인과 천인이 서로 통혼(通婚)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의 노비를 권세가의 집에 주거나 사찰에 바치는 것을 금지하고, 노비 매매를 금지한 것 정도가 대책이었다. 노비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선 인물은 태종이었다. 노비 문제의 핵심은 신분이 다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의 신분은 부모 중 누구의 신분을 따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부모의 신분이 다를 경우, 대부분 부친의 신분이 높고 모친은 노비일 가능성이 많았다. 그래서 모친의 신분을 따르는 종모법(從母法)을 실시하면 노비의 숫자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부친의 신분을 따르는 종부법(從父法)을 실시하면 줄어들게 되어 있었다. 조선도 고려를 이어서 종모법을 실시했는데, 이는 대다수 양반 사대부들의 이해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재위 14년(1414년) 6월28일 종부법 개정을 단행했다. 이로써 조선의 노비 문제는 상당 부분 해결되었는데, 과전법 이후 23년 만에 종부법 시행으로 조선 개창의 당위성은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세종이 즉위하자 양반 사대부들은 일제히 “종모법으로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세종은 “조종의 성헌을 고치기 어렵다”며 논의를 꺼리다가 종모법 환원 요구가 계속되자 법 개정 당시 담당 승지였던 조말생을 불러 그 경위를 물어보았다. 조말생은 “지난 갑오년(태종 14년)에 신이 대언(代言·승지)으로 있었는데, 하루는 태종께서 편전에서 ‘아비를 따라 양민으로 삼는 법(종부법)을 세우고자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숙번이 옳지 않다고 극력 말했으나 태종이 듣지 않으시고 신에게 법령 집필을 명하셨으며 친히 하교(下敎)하여 법을 세우셨습니다”(<세종실록> 14년 3월15일)라고 답변했다.

“양반도 병역 의무” 주장한 류성룡 파직

이숙번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 때 칼을 들고 싸웠던 태종의 측근이자 공신으로서 이른바 혁명 동지였다. 태종이 그런 혁명 동지의 강한 반대까지 무릅쓰고 종부법으로 개정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만약 이때 세종이 “선왕께서 굳센 의지를 갖고 만드신 성헌을 고칠 수 없다”고 버티며 종부법을 유지했다면, 조선은 개인 대신 국가에 세금을 내는 양인이 지속적으로 증가해 강한 나라, 강한 사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이 양반 사대부들의 강압에 못 이겨 종모법으로 개악하는 바람에 조선의 신분제는 결정적으로 악화되었다. 태종은 일반 백성들의 이익, 즉 국가의 이익과 양반 사대부의 이익이 충돌할 경우 국가의 이익을 우선했다. 그러나 세종이 양반 사대부들의 손을 들어 종모법으로 환원하면서 노비 숫자가 대폭 늘어났고, 이것이 사회 불안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종모법과 함께 조선을 위기에 몰아넣은 또 하나의 악법이 중종 36년(1541년)의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였다. 군적수포제란 지금의 병역법을 뜻한다. 조선은 정도전이 개국 프로그램을 짤 때는 양반·상민 할 것 없이 모두 병역 의무가 있는 ‘개병제(皆兵制)’를 선택했다. 양반은 양반대로, 상민은 상민대로 모두 병역의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수양대군, 즉 세조가 계유정난이란 쿠데타를 일으킨 후 양반들의 지지가 필요하다 보니까 양반들이 점차 병역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인하기 시작했다. 또한 개국 후 100년 이상 큰 전쟁이 없다 보니 각 관아에서도 백성들에게 병역의 의무를 지우는 대신 화폐 역할을 하는 포(布)를 받고 군역을 면제시켜주는 ‘방군수포(放軍收布)’를 음성적으로 실시했다.

병역 의무자에게 포를 받아서 그보다 낮은 가격에 군역을 지는 대역자(代役者)를 고용하고는 그 차액을 관아에서 사용하거나 지방관 및 아전들이 착복하는 것이었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금지시켰지만 각 관아에서 광범위하게 시행했으므로 피할 수 없는 추세가 되었다. 그래서 중종 36년(1541년), 1년에 두 필의 군포를 납부하면 병역 의무를 수행한 것으로 인정하는 방군수포제를 입법한 것이다. 문제는 이때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 대상에서 면제한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양반 사대부들은 병역 의무가 면제되고, 가난한 백성들만 병역 의무를 져야 하는 가치관의 전도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이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붕괴 직전까지 갔던 데는 종모법과 군적수포제라는 두 악법이 있었다.

3월3일 국회에서 열린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김영란법’ 처리와 관련해 여야 간사인 새누리당 홍일표 의원(왼쪽)과 새정치민주연합 전해철 의원이 얘기하는 것을 이상민 법사위원장(맨 오른쪽)이 지켜보고 있다. ⓒ 연합뉴스
기득권 앞세우기 급급했던 양반 사대부

백성들은 오히려 궁궐과 관청을 불태우고 일본군에 가담하는 것으로 체제에 저항했다. 도주하기 바빴던 선조를 대신해 영의정 겸 도체찰사 자격으로 전란을 총지휘했던 서애 류성룡이 ‘속오법(束伍法)’을 만들어 양반들에게도 군역의 의무를 지운 것은 이런 반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선조와 양반 사대부들은 전란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류성룡을 파직시키고, 양반들은 다시 병역 면제라는 성역으로 되돌아갔다. 숙종 때 개혁파였던 ‘청남(淸南)’의 영수 윤휴가 양반 사대부들에게도 예외 없이 군포를 납부받자는 ‘호포제(戶布制)’를 주장한 것은 류성룡의 이런 개혁 정책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러나 숙종 6년(1680년) 정권이 남인에서 서인으로 넘어가자마자 서인들이 윤휴를 사형시켰는데, 주 요인 중 하나가 바로 호포제 실시를 주장한 데 있었다. 이후 영조가 이 문제에 손을 댔지만, 결국 양반 사대부들에게는 군포를 걷지 못하고, 백성들의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감해주는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이조차도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결국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고종 8년(1871년)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걷는 호포법을 단행했다. 호포법 실시는 서원 철폐와 함께 흥선대원군 실각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서세동점(西勢東漸·외세가 점차 밀려들어오는 것)이란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들의 기득권 앞세우기에 급급했던 양반 사대부들이 지배층으로 있는 한, 그 나라가 망하지 않을 도리는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김영란법’이라고도 불리는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한 데 대해 연일 비판적인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돈이 발언하면 다른 모든 것은 침묵한다’는 말이 있다. 그간 한국 사회는 돈이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부패가 일상화되었다. 공직자들의 부정부패에 대한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은 분명히 존재하고, 그런 취지에서 당초 김영란법은 많은 지지를 얻었다. 다만 법안을 만든 당사자인 국회의원들은 정작 이 대상에서 빠져나가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법 자체에 대한 발목 잡기 대신 이 법이 행여 ‘비판 언론 재갈 물리기’ 등 정권에 악용될 우려가 있는 부분에 대한 대책 마련에 나서는 것은 필요하다. 각종 카르텔을 해체하는 새로운 법 제정에 나서는 것이 좀 더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지름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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