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27. 무한 권력 독점하려다 망국의 길로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5.03.05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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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시대착오적 전제군주 꿈꿔…입헌군주제 채택한 메이지와 대조

한때 국내 사학계에서 일부 학자들에 의해 고종을 훌륭한 임금으로 재탄생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과연 고종은 용군(庸君·어리석고 변변하지 못한 임금)이 아닌 성군(聖君)이었을까. 필자가 고종이 몇 년 동안 왕위에 있었는지 물어보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44년이었다”고 말해주면 대부분 놀란다. 고종에 대한 평가를 동시기의 일본 왕이었던 메이지(明治)와 비교해보면 좀 더 명확해진다. 고종은 메이지와 1852년생 동갑인데, 고종은 1864년에 즉위했고, 메이지는 3년 늦은 1867년에 즉위했다. 1912년 세상을 떠난 메이지는 45년간 왕위에 있었는데, 재위 기간에 전국시대의 영웅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도 못 이룬 꿈을 달성해 조선을 점령했다.

개화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이나 분석 없어

자신의 재위 기간에 나라를 빼앗긴 고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착각 속에서 세상을 살았다는 점이다. 망국 후 자결했던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고종은 자신이 웅대한 지략과 불세출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며 권력을 모두 쥐고 세상일에 분주했다”고 평가했다. 고종은 자신과 세계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부족하다 보니 ‘자신이 웅대한 지략과 불세출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며 ‘세상일에 분주’했던 결과 500년 사직이 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 체결에 항거하기 위해 민영환은 본가에서 자결했다.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충정공 민영환 자결 순국 기록화. ⓒ 독립기념관
고종이 망국을 맞은 요인은 여럿 있는데 자질구레한 것은 제외하고 큰 것만 말하면 하나는 시대 흐름에 역행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재 발탁에 실패한 것이다. 메이지는 1867년 도쿠가와 막부의 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로부터 통치권을 돌려받는 이른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통해 왕정복고(王政復古)를 달성했지만 이는 명목상에 불과했다. 모든 정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메이지 유신의 주도 세력이 수행했다. 메이지는 이 하급 무사 출신들이 주도하는 근대국가 프로그램에 따라 메이지 헌법을 반포해 입헌군주제를 채택했고, 지조개정(地租改正) 등을 통해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선택했으며, 학제(學制)를 개편하고, 징병령을 실시하는 등 개혁으로 나라를 부강시켰다.

반면 고종은 일본의 발전된 결과물은 부러워했으나, 그런 결과를 낳은 과정은 걷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마치 고득점을 바라면서도 놀러 다니는 수험생 같았다. 고종 역시 목표는 일본 같은 근대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개화파 정치 세력과 손을 잡아야 했다. 당시 조선의 개화파에는 두 부류가 있었는데, 한 세력은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였고, 또 한 세력은 김홍집과 어윤중 등을 중심으로 한 ‘온건 개화파’였다. 고종은 재위 10년(1873년)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부친 흥선대원군을 몰아내고 친정(親政)을 단행한 후 대원군의 모든 정책을 뒤집는 차원에서 개화를 선택했다. 재위 13년(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는데, 하필이면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첫 단추부터 잘못 꿰고 말았다.

이때 조선은 일본과 이미 국교가 수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조약을 체결할 필요가 없었다. 설혹 새로운 조약을 체결한다고 해도 불평등 조약을 맺을 필요는 없었다. 물론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당시 고종이 나라를 개화 쪽으로 끌고 가려 한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개화가 고종 자신의 뚜렷한 세계관이나 국제 정세에 대한 분석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제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개화와 수구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락가락하는 혼란이 빚어졌다.

재위 21년(1884년) 급진 개화파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수구파인 민씨 척족 정권과 손잡고 청나라를 끌어들여 급진 개화파를 모두 제거했다. 재위 33년(1896년)에는 느닷없이 러시아 영사관으로 도망가는 아관파천을 단행한 후 경무관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불러 김홍집 등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갑오개혁을 주도하던 온건 개화파 총리대신 김홍집은 경무청 문 앞에서 군중에게 참살당했고, 어윤중도 군중에게 맞아 죽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한 이유에 대해 “헌정에 속박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분석했다. 메이지는 재위 22년(1889년) 일본 국민들에게 입헌군주제 헌법(憲法)인 메이지 헌법을 하사하는 형식으로 일본을 헌법, 즉 헌정(憲政)이 지배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그러나 고종은 입헌군주제든 입헌공화제든 간에 ‘헌정’에 속하는 자체를 거부했다. 세상은 이미 저만큼 앞서 나가고 있었지만, 자칭 ‘불세출의 영웅’ 고종은 무한 권력을 독점하는 시대착오적인 전제군주를 꿈꿨던 것이다.

을사늑약 주역 박제순 승진시켜 저항 초래

고종의 인사 스타일은 그가 왜 망했는지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황현이 <매천야록>에서 “과거의 초시(初試)는 200~500냥이고 회시는 대략 1만냥”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관직매매로 돈을 긁어모았다. 고종의 인사 스타일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는 을사늑약 체결 후 외부대신 박제순을 오히려 중용한 것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일본 추밀원장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42년(1905년) 11월17일 주무 장관인 외부대신 박제순 등 을사오적(乙巳五賊)과 ‘한국이 부강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아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은 12월21일 초대 통감이 된 이토 히로부미에게 쥐어졌는데, 그는 외교뿐만 아니라 국정 전반을 관장하는 사실상의 준(準)총독이었다. 을사늑약 체결 사실이 전해지자 조야에 큰 소동이 일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백성이 조약 체결을 담당한 외부대신 박제순과 이에 동의한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을 ‘을사오적’으로 지칭하며 처형을 요구했다.

황성신문(皇城新聞)은 조약 체결 다음 날(11월18일), “수십 인의 군중이 이완용 집에 돌입하여 불을 질렀다”고 보도했고, 20일에는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이 ‘이날을 목 놓아 통곡한다(是日也放聲大哭)’라는 유명한 논설로 항의했다. 전국 각지에서 오적 처단과 조약 파기를 외치며 의병이 봉기했다. 그러나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결정된 다음 날인 11월22일 오히려 외부대신 박제순을 과거의 정승 격인 의정부 의정대신으로 승진시켰다. 23일 전 의정대신 조병세는 고종에게 “박제순에 방형(邦刑·사형)을 실시하고 나머지 대신들도 매국(賣國)의 율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청한 다음 며칠 후 자결했고, 11월30일 시종부무관장 민영환과 주영(駐英) 서리공사 이한응이 영국에서 음독 자살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의 주역이 되는 의정부 참찬 이상설은 11월22일 다음과 같은 강한 항의 상소를 올렸다.

“이번에 체결된 조약은 강요로 맺어진 것이니 마땅히 무효입니다. (중략) 폐하(고종)께서 힘껏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준엄하게 물리쳐야 하는데, 천주(天誅·역적들을 죽임)를 단행해 빨리 여정(輿情·여론)을 위로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도리어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 수괴를 의정대신 대리로 임명해 신에게 그 아래 반열에 나가게 하시니 신은 분노가 가득 차고 피가 텅 비며 뜨거운 눈물이 강처럼 흘러, 정말 갑자기 죽어서 모든 것을 잊고 싶습니다.”(<고종실록> 42년(1905년) 11월24일)

조선 제26대 왕 고종황제. ⓒ 연합뉴스
긍정할 만한 인생 산 사람들 발탁해야

이상설은 이 상소에서 “아! 장차 황실이 쇠해지고 종묘가 무너질 것이며, 조종이 남겨준 유민들은 남의 신하와 종이 될 것입니다”라고 제국의 운명을 정확히 예견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당시 이상설 자결 미수 사건 목격담을 싣기도 했다. 김구가 자결한 민영환의 집에 조문을 갔다가 나오는 도중에,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어떤 사람이 흰 명주 저고리에 갓망건도 없이 맨상투 바람으로 옷에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채 여러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인력거에 실려 가면서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누구냐고 묻자 참찬 이상설인데 자살 미수에 그쳤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성토 대상이 된 을사오적은 12월16일 공동으로 상소를 올려 “새 조약의 주지로 말하면, 독립이라는 칭호가 바뀌지 않았고 제국이라는 명칭도 그대로이며 종사는 안전하고 황실은 존엄한데, 다만 외교에 대한 한 가지 문제만 잠깐 이웃 나라에 맡겼으니 우리나라가 부강해지면 도로 찾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이후 이상설은 나라를 되찾으려 동분서주하다가 1917년 망명지 니콜리스크에서 천추의 한을 남기고 순국한 반면, 을사오적은 계속 승승장구하다가 망국 후 박제순과 이근택, 권중현은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수여받았고, 이완용과 이지용은 백작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매국의 대가로 막대한 은사금이 뒤따랐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역사에서 얻는 소중한 교훈은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지향하고, ‘병역 면제,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등이 기본 스펙인 사람들 대신 보통 사람들이 긍정할 만한 인생을 산 사람들을 발탁한다면, 설령 지금까지 다소 부진했다 하더라도 향후 오히려 약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의병장이었던 배용길(1556~1609년)이 인용한 <대학전(大學傳)>의 말처럼 ‘선한 사람을 보고도 등용하지 않고, 선하지 않은 사람을 보고도 멀리하지 않는 거만한’ 행태를 계속한다면, 그 미래는 보지 않아도 훤하다 할 것이다.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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