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22. 정치공작 일삼은 노론, 나라까지 팔아먹어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5.01.22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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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외교권 넘긴 을사오적 전원 노론…이완용은 마지막 당수

영조 38년(1762년) 5월22일 나경언이 형조에 반역을 고변(告變)했다. 그런데 그 고변 대상이 놀랍게도 사도세자였다. <영조실록>은 나경언에 대해 “액정별감 나상언의 형으로 사람됨이 불량하고 남을 잘 꾀어냈다”고 전하고 있고, 또 정조가 편찬한 부친 사도세자의 일대기인 <어제장헌대왕지문>에는 ‘대궐의 하인으로 있던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양반 사대부가 아닌 상민(常民)이란 뜻이다. 정조 즉위년(1776년) 8월 영남 유생 이응원이 “저군(儲君·세자)을 형조에 정소(呈訴·소장을 관청에 냄)한 것은 천하 만고에 나라와 백성이 있어온 후로는 듣지 못하던 일”이라고 상소한 것처럼 세자를 반역 혐의로 고변한 사건은 유사 이래 없었다. 게다가 당시 사도세자는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실시하고 있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다룬 SBS 드라마 의 한 장면. ⓒ SBS 제공
사도세자 죽게 한 노론, 세손 제거 노려

나경언의 고변을 접수한 당사자는 형조 참의 이해중이었는데, <영조실록>은 “이해중이 영의정 홍봉한에게 달려가서 고하니 홍봉한이 ‘이는 임금께 청대해서 계품(啓稟·임금에게 아룀)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고 이해중이 세 차례나 청대했다”고 전하고 있다. 문제는 홍봉한이 사도세자의 장인이라는 점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면 일개 상민이 차기 임금이 될 자신의 사위를 역적으로 몰았다면, 즉각 그 상민을 조사해 역적으로 처단해야 했음에도 오히려 홍봉한은 국왕에게 보고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해중은 홍봉한의 처남으로서 사도세자는 조카사위였다. 결국 사도세자는 장인 홍봉한과 처삼촌 이해중에 의해 죽음으로 밀려 들어갔던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홍봉한이 바로 사도세자의 반대파였던 노론의 영수였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주범이 사도세자의 처가이자 노론 영수였던 홍봉한 일가라는 말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혜경궁 홍씨가 훗날 친정을 변명하기 위해 <한중록>을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변 소식을 들은 사도세자는 즉시 시민당 뜰에 거적을 깔고 대죄했으나, 홍봉한이 대죄 사실을 영조에게 보고한 것은 대죄 7일째인 5월29일이었다. 영조가 “나는 세자가 대명(待命·처분 명령을 기다림)하고 있는지 몰랐다”고 답할 정도로 사도세자는 고립되어 있었다. 사도세자는 집권 노론에서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뒤주에 갇히던 날 세자궁의 관원 조유진을 시켜 춘천에 가 있는 소론 출신의 전 우의정 조재호를 급하게 불렀다. 그러나 이 사실은 혜경궁 홍씨에 의해 홍봉한에게 전해졌고 홍봉한은 조재호를 집중적으로 감시했다. 세자가 음력 윤5월 중순의 뙤약볕 아래에서 여드레 동안이나 신음하는 동안 영조나 홍봉한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일상적으로 행동했다. 그리고 홍봉한은 세자가 죽은 다음 달, 소론 영수 조재호가 “한쪽 사람들(노론)이 모두 소조(小朝·세자)에게 불충했지만 나는 동궁(세자)을 보호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영조에게 보고해서 그를 사형에 처하게 했다. ‘노론은 세자를 제거하려 했으나 소론은 보호하고 있다’는 조재호의 이 말이야말로 사도세자 사건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사도세자 제거에 성공한 노론은 그다음 표적으로 세자의 아들인 세손(世孫·정조)을 겨냥했다. 자신들이 죽인 세자의 아들이 즉위했을 경우의 후과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노론은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罪人之子, 不爲君王)’는 ‘8자흉언(八字凶言)’을 만들어 유포시켰다. 그러나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던 영조와 혜경궁 홍씨가 세손 제거에 반대하면서 노론이 벽파와 시파로 갈리고 세손은 겨우 숨 쉴 공간이 마련됐다.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선 노론 벽파는 그 아들까지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파였고, 시파는 그 아들까지 제거하는 것에는 반대하는 정파였다. 영조는 세손이 사도세자 3년상을 마친 재위 40년(1764년)에 세손의 호적을 효장세자(孝章世子·영조의 맏아들로 사도세자의 형, 10세 때 일찍 죽음)에게 입적시켜 일종의 ‘호적 세탁’을 시켜주는 것으로 세손을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노론 벽파는 세손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그치지 않았다. 정조는 세손 시절 일기인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에 “흉도(凶徒)들이 내 거처를 엿보아 말과 동정(動靜)을 탐지하고 살피지 않는 게 없었기 때문에 옷을 벗고 편안히 잠을 자지도 못했다”(영조 51년 윤10월5일)라고 토로할 정도로 극도의 공포 속에서 세손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나마 영조가 재위 51년(1775년) 12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고 이듬해 3월 세상을 떠남으로써 기적적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정조는 즉위 일성으로 “오호라!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를 이어받도록 명하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간 효장세자의 법적인 아들로 지내왔지만 자신은 본래 사도세자의 아들이란 선언이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노론 벽파는 잔뜩 긴장했지만 정조는 보복의 칼날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대신 정조는 부친을 죽인 적당(敵黨)인 노론 벽파도 포용하면서 함께 미래로 가자고 설득했다. 정조는 대리청정 하는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는 비정상적인 노론 일당 독재 체제로는 미래로 갈 수 없다는 생각에서 대개혁을 주도했다. 이렇게 실시된 정조의 개혁 정치는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된다.

정조 제거 찬반 갈려 벽파·시파로 분열

첫째는 노론 일당 독재를 다당제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성호 이익의 종손인 이가환, 정약용과 형 정약전, 매형 이승훈 같은 남인들이 중용되었다. 둘째, 노론에서 유일사상으로 신봉하는 성리학(주자학)뿐만 아니라 양명학(陽明學)은 물론 천주학까지도 용인하는 것으로 사상의 다원화를 꾀했다. 셋째는 서자들도 벼슬길에 진출시키는 것으로 극심한 신분제를 완화하려고 노력했다. 정조는 재위 1년(1777년) “아! 저 서류(庶流·서자)들도 나의 신자(臣子)인데, 그들로 하여금 제자리를 얻지 못하게 하고 또한 그들의 포부도 펴보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또한 과인의 허물인 것이다”라면서 이조와 병조에 ‘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을 작성하라고 명했다. ‘서자 벼슬 진출법’이라고 할 수 있는 ‘서류소통절목’ 덕분에 그간 차별에 신음하던 서자들도 벼슬길에 나갈 수 있게 됐다. 재위 3년(1779년)에는 이덕무·박제가·유득공·서리수 등 네 명의 서자를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으로 특채했다. 이렇게 발탁된 4명의 검서관은 ‘규장각 사검서(四檢書)’라는 보통명사로 불리며 조선의 지식계를 바꿔버렸다. 그동안 신분제의 질곡에 얽매어 있던 머릿속의 지식이 규장각 검서관이란 날개를 달자 하늘 높이 비상했던 것이다.

남인들을 천주교도로 몰아 핍박

노론 벽파는 정조의 이런 개혁 정치를 좌절시키기 위해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모는 사상 검증을 펼쳤다. 이승훈·정약용 등 남인들이 한때 천주교를 신봉했던 것을 빌미로 이들을 제거하려 한 정치공작이었다. 정조는 노론 벽파의 사상 검증을 막아내는 한편 조선의 경제 체질을 바꾸는 실용 정책을 실시했다. 당시 조선에는 관청 및 노론 벌열과 결탁한 시전(市廛) 상인들이 일반 상인들의 상행위를 금지시킬 수 있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을 갖고 있었다. 독점 상인인 이들은 물가를 마음대로 조절하면서 부를 독점하고 정치자금을 헌납했다. 정조는 재위 15년(1791년) 남인 출신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의 건의로 금난전권을 철폐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을 반포했다. 신해통공 하루 만에 물가가 반으로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조선의 상업 질서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 조치였다.

정조는 사도세자와 모친 혜경궁 홍씨가 칠순이 되는 1804년을 기점으로 대대적인 정치 개혁을 단행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4년 전인 1800년 재위 24년을 끝으로 독살설 속에 생을 마감했다. 정조의 의문스러운 죽음과 동시에 정권은 수렴청정을 맡은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와 심환지를 중심으로 한 노론 벽파의 수중으로 되돌아갔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순조 1년(1801년) 1월 대왕대비인 정순왕후는 “지금 듣건대 이른바 사학(邪學·천주교)이 옛날과 다름이 없어서 서울에서부터 기호(畿湖)에 이르기까지 날로 더욱 성해지고 있다고 한다”는 ‘사학 엄금 하교’를 내려 천주교도에 대한 대살육의 문을 열었다. 표면상 명분은 정학(正學·성리학)을 보호하고 사학을 종식시킨다는 것이었지만, 정조 때 성장한 남인들을 천주교도로 몰아 제거하려는 정치공작이었다. 전 공조판서 이가환, 전 평택현감 이승훈, 권철신, 정약종 등이 아무런 죄도 없이 사형당하고 정약용과 정약전 등 수많은 남인은 기약 없는 유배 생활에 처해졌다.

이렇게 노론은 남인들을 절멸시키고 다시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노론 일당 독재는 정조 사후 노론 소수 벌열이 정권을 독차지하는 세도 정치로 퇴행했고, 더 이상 정상적인 정치 시스템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 농민들은 순조 11년(1811년) 홍경래의 난으로 불리는 서북 농민항쟁을 비롯해 철종 13년(1862년) 진주민란으로 불리는 삼남 농민항쟁으로 체제에 저항했다. 고종 31년(1894년)에는 전봉준이 주도하는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나자 노론은 이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청나라 군사의 파병을 요청했는데, 이는 갑신정변 이듬해인 고종 22년(1885년) 청일 양국이 체결한 천진(天津)조약에 의거해 일본군의 파병으로 이어졌다. 1905년 외교권을 넘긴 을사오적(乙巳五賊:이완용·박제순·이지용·이근택·권중현)이 전원 노론이고, 이완용이 마지막 노론 당수인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노론은 당론으로 나라까지 팔아먹었다. 정치공작으로 다른 당을 절멸시킨 노론 일당 독재가 결국은 나라까지 팔아먹는 극단으로 치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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