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부자들에 러브콜 “국적 사세요”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5.01.01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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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난 허덕이는 남유럽 국가들 너도나도 ‘여권 장사’

금은 경기가 불안할 때 값어치가 올라간다. 단기적인 시장 변화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는 안전 자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기가 불안할수록 가격이 내려가는 ‘금’도 있다. 거액을 투자하면 쉽게 받을 수 있는 금빛 비자, 즉 ‘골든 비자’ 얘기다. 일부 유럽 국가들이 골든 비자 프로그램 확대에 나섰는데 포르투갈·스페인·그리스·키프로스·헝가리·라트비아 등 경제난을 겪고 있는 국가들이 투자 이민의 장벽을 크게 낮춘 것이다.

투자 이민 제도를 가장 먼저 완화한 나라는 포르투갈이다. 이 나라는 2012년 골든 비자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포르투갈 영토 내에 50만 유로 이상을 지불하고 부동산을 구입하면, 5년간 체류 허가를 받고 나중에 시민권도 신청할 수 있는 제도다. 유럽연합 회원국에서 영주권을 받으려면 보통 어학 성적과 다년간의 거주 이력은 물론 상식 테스트 성적까지 충족시켜야 한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골든 비자 소지자들은 첫해에 7일, 이듬해부터 매년 1년에 14일만 포르투갈에 체류하면 된다. 이렇게 규제를 완화한 이후 3년간 무려 1800여 명이 골든 비자를 받았다. 포르투갈로 흘러들어온 돈은 10억 유로가 넘었다.

“중국 부호 잡아라” 경쟁 나선 EU 국가들

포르투갈이 골든 비자 장사로 성공을 거두자 다른 유럽 국가들도 벤치마킹에 나섰다. 키프로스는 2012년 8월부터 30만 유로 이상을 투자한 외국인들에게 3년간 거주 허가를 주고 있다. 이웃나라 그리스는 한 술 더 떠 키프로스보다도 낮은 가격인 25만 유로에 5년짜리 거주 허가를 내주고 있다. ‘가격 대비 성능’을 따지자면 그리스를 따라잡을 나라가 없다. 포르투갈과 키프로스의 체류권이 1년에 10만 유로인 반면, 그리스는 그 절반인 5만 유로만 투자하면 된다. 이렇게 헐값에 시장에 나온 골든 비자를 사는 사람은 대부분 중국 부호들이다. 영국의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올해 10월까지 포르투갈 정부가 발급한 1800여 개의 골든 비자 중 81%가 중국인 투자자의 손에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키프로스는 아예 중국인들을 상대로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골든 비자 제도가 시행된 지 석 달 만에 무려 600여 개의 부동산을 사들일 정도로 그들이 보여준 구매력은 엄청났기 때문이다. 이 중 90%의 거래가 이뤄진 휴양도시 파포스에서 중국어로 된 부동산 광고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 됐다. 심지어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이어져온 카니발이 매년 열리는데, 지난해 테마는 아예 ‘중국’이었다. 중국 민요와 의상, 음식을 선보이며 투자자들의 환심을 샀다.

이렇게 키프로스에서 쏘아올린 구애의 화살은 대륙의 심장에 적중했다. 중국 최대의 검색엔진 ‘바이두’에 키프로스를 치면 자동 연관 검색어로 ‘키프로스 새 이민 정책’ ‘키프로스 주택 구매 이민’이 나올 정도로 중국인들의 관심은 높다. 검색을 통해 찾은 중국의 한 중개업체는 키프로스 대통령과 업체 대표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려놓아 키프로스 정부가 중국인들의 투자 이민에 걸고 있는 기대를 짐작하게 한다.

중국 부호들은 왜 하필 경제난으로 휘청거리는 국가의 영주권을 취득하려는 것일까. 포르투갈의 경우 골든 비자를 취득한 사람 중 의무 거주 기간인 ‘1년 중 7일 이상’을 포르투갈에서 보내는 사람은 다섯 명 중 한 명꼴에 불과하다. 속사정을 잘 아는 현지 이민 브로커들은 포르투갈이나 키프로스, 그리스 같은 경제 위기 국가가 목적지가 아니라 유럽에 발을 들이기 위한 관문에 불과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 국가가 거주지로서는 매력이 없지만 EU 회원국이기 때문에 일단 거주 허가나 시민권을 얻고 나면 EU 내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솅겐 조약을 통해 다른 EU 국가로 이주하기가 수월하다는 것이다.

중국의 부유층이 EU 시민권을 취득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부동산 기업을 운영하는 찰스 로버츠는 “투자 이민 시장에서 주류를 이루는 사람은 정치·경제·종교적으로 불안정한 국가에 사는 부유층”이라고 분석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EU 시민권은 중국 부유층에게 어려운 때를 대비한 보험이다. 뉴욕타임스는 중국의 부유층이 제2, 제3의 국적을 사는 데 쓰는 금액이 매년 20억 달러가량이라고 보도했다. 유럽 일부 국가의 재정난과 중국 부유층의 불안이 만나 국적 장사가 성행하자 EU는 문단속에 나섰다. 비비안 레딩 유럽위원회 부위원장은 이미 “시민권을 사고팔아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포르투갈의 유럽의회 의원인 아나 고메즈는 “투자 이민 사업에 부패와 범죄 조직이 관여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포르투갈에선 돈세탁 창구로 활용되기도

고메스 의원의 우려는 곧 현실이 됐다. 2013년 11월13일 포르투갈 경찰은 뇌물을 받고 투자이민을 허용해준 포르투갈의 고위 공직자와 중국인 브로커 등 11명을 구속했다. 이 가운데는 마누엘 하멜라 팔로스 포르투갈 이민국(SEF) 국장과 마리아 안토니아 아네스 법무부 서기장, 알베르티나 곤칼레스 환경부 서기장 등 행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포함돼 있어 페드로 파소스 코엘료 정부에 큰 타격을 줬다. 특히 부동산 구매가를 실제 지불한 가격보다 높게 신고하고 차액을 불법 자금으로 사용하는 등 골든 비자 프로그램이 돈세탁 창구로 활용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코엘료 총리에 대한 사퇴 요구까지 불거졌다.

이런 분위기에도 중국인들의 투자 이민 행렬은 당분간 줄어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240만명에 이르는 중국의 백만장자 중 무려 65%가 이미 중국을 떠났거나 이민을 계획 중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이민정책을 운용하는 나라들은 애를 태우는 중이다. 데이비드 핸슨 영국 노동당 내각 이민장관은 지중해의 섬나라 말타를 향해 “외국인들에게 EU로 들어오는 뒷문을 열어줬다”고 비판했지만,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영국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는 외국의 백만장자들에게 말타 제도가 더 매력적이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영국도 2008년부터 투자이민 제도인 ‘티어1(Tier 1)’을 시행 중인데, 투자 금액이 클수록 영주권을 빨리 받을 수 있다. 다만 그 금액이 100만 파운드부터 시작해 ‘가격 경쟁력’에서 밀린다.

북아프리카 보트피플이 목숨을 걸고 유럽으로 넘어올 때 “유럽의 문화와 정체성을 지키자”고 부르짖던 목소리는 골든 비자 문제에선 좀처럼 들을 수 없다. “외국인들이 유럽의 복지 체제에 기생한다”던 외국인 혐오주의자들도 이민자들이 가지고 오는 수십억 유로의 돈에 대해서는 침묵 중이다. 분쟁과 경제난으로 뒤숭숭한 오늘날의 세계가 만들어낸 씁쓸한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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