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몰이’ 먹잇감이 사라졌다
  • 양정대│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5.01.01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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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진당 해산 따른 새누리당의 ‘시원섭섭한’ 속내의 실체

“앞으로 김진태 의원이나 한기호 의원 같은 분들, 이제 뭘 가지고 언론에 나올지 궁금하다.” 지난 12월19일 헌법재판소가 ‘종북(從北) 성향’을 이유로 통합진보당 해산을 결정하자 일부 국회 출입기자들 사이에서 나온 우스갯소리다. 보수를 넘어 사실상 극우적인 입장에서 진보 진영을 공격해온 몇몇 새누리당 의원들에겐 이제 ‘먹잇감’이 없어진 것 아니냐는, 기자들 특유의 시니컬함이 묻어나는 얘기다.

사실 남북 대치 상황에 기대온 반북(反北) 보수 진영에는 종북주의에 대한 비판이 ‘전가의 보도’였다. 이들이 야권과 진보진영에 종북 딱지를 붙이고 나면 일부 보수 언론과 새누리당은 이를 정치적으로 십분 활용해왔다. 큰 선거 때면 어김없이 북풍(北風)이 몰아쳤고, 공안 사건들은 정국의 고비마다 터져 나왔다. 종북주의 논란은 특히 보수 진영이 위기 국면에 빠질 때면 빠지지 않는 단골메뉴였다. 이번 헌재의 통진당 해산 결정도 결과만 놓고 보면 이른바 ‘정윤회 문건’으로 촉발된 비선 실세 국정 개입 의혹으로 수세에 몰린 박근혜정부와 새누리당이 공세적으로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2014년 12월18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오른쪽)와 이완구 원내대표가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 ⓒ 연합뉴스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종북몰이’

헌재 결정 직후만 해도 불필요한 이념 논쟁 촉발을 우려한 듯 신중한 모습을 보이던 여권은 이튿날 박근혜 대통령의 ‘역사적 결정’ 발언을 기점으로 태도가 돌변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집권만을 위해 통진당과 연대했다”며 새정치민주연합을 향해 ‘종북 숙주론’을 제기했다. 검찰은 보수 성향 시민단체들의 고소·고발이 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정희 전 통진당 대표 등 지도부는 물론이고 10만여 명에 달하는 일반 당원들까지 수사 범위를 넓힐 태세다. 경찰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코리아연대’ 사무실과 관련자들의 주거지를 압수수색하는 등 공안 수사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종북 논란의 경우 여론의 반응도 대부분 즉각적이다. 비선 실세 국정 개입 의혹으로 대구·경북(TK)에서도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급증했다는 언론 보도가 무색할 만큼 통진당 해산 결정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영남 지역에서는 다시 한 번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 지지세가 확연해졌다. 통진당 해산 결정 이후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정윤회 문건’ 파문에서 벗어나 연말연초 정국의 주도권을 틀어쥔 듯한 모습이다. 이제 관심은 조갑제씨를 비롯한 반북 보수 진영이 제기한 ‘종북 척결’ 수준으로 상황을 몰아갈 것인지 여부다. 헌재 결정에 대해 긍정적인 여론이 압도적인 만큼 가능성은 꽤 열려 있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다.

최근 몇 년간은 ‘종북몰이’ 대상이 통진당으로 좁혀진 상태였다. 2012년 총선 비례대표 부정 경선 파문을 거치면서 PD(민중민주)계열이 정의당으로 딴살림을 차린 이후의 통진당에는 사실상 진보 진영 내에서도 종북 논란에 곧잘 휩싸여왔던 NL(민족민주)계열만 남았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을 포함한 보수 진영에는 야권 내에서도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는 통진당이 좋은 ‘먹잇감’이었다. 여전히 실체가 불분명한 ‘경기동부연합’ 조직도를 꺼내들어 과거 대표적 공안 사건이었던 ‘민족민주혁명당’ 사건과 오버랩시켰고, 결국 지난해에는 이번 헌재 결정의 핵심 근거였던 RO(혁명 조직)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여권 내에선 통진당이 정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 상황에 대한 양면적 감정이 적잖이 감지된다. “앓던 이가 빠졌다”(서청원 최고위원)며 환영하고 반기는 분위기가 뚜렷하지만, 한 꺼풀만 더 들춰내고 보면 “화풀이 대상이 없어졌다”(한 영남권 중진 의원)며 아쉬워하는 기류도 역력하다. 실제로 청와대나 새누리당 입장에서 보면 통진당의 해산이 전략적으로는 최선의 결과가 아닐 수 있다. 한 정치권 인사는 “종북몰이 대상이 여의도 정치권 내에 있을 때는 정치적 효과가 상대적으로 크지만, 시민사회단체 수준에서 존재한다면 얘기가 좀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위기 때마다 꺼내들어 재미를 봐온 ‘종북 프레임’이 더 이상 유효한 대야 전략으로 기능하기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향후 선거 전략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2012년 총선 이후 새정치연합과 통진당의 야권연대가 불가능해진 이후엔 사실상 통진당이 야권 표를 분산시키는 요인 중 하나로 기능해왔다. 그런데 통진당이 정치 무대에서 사라질 경우 이 같은 상황을 기대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전략통으로 꼽히는 한 새누리당 재선 의원은 “더 이상 ‘불로소득’은 없을 것 같다”고 내다봤다. 보수 진영으로서는 막상 통진당 해산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자 그간 통진당 공격을 통해 취해왔던 정치적 이득이 사라지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한 여권 인사는 “새해 초까지는 통진당 해산 과정에서 이런저런 논란이 일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정치적 효과가 있겠지만, 그마저도 이전만큼 강력하진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 해산 심판 청구 선고일인 2014년 12월19일 보수단체가 헌법재판소 앞에서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을 요구하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당·청 전반 걸쳐 갈등 기류 확산될 수도

헌재의 통진당 해산 결정 이후의 정치 구도가 어떻게 자리 잡을지는 오는 4월에 있을 재·보궐 선거에서 일차적으로 판명 날 전망이다.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 모두 그야말로 일대일 진검승부를 펼쳐야 한다. 그런데 재·보선 전망에서도 여권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여권에는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을 감안할 때 2015년 한 해가 쉽지 않은 1년이 될 수 있다. 당장은 봉합되는 듯한 모습이지만 청와대 비선권력 개입설은 2015년 후반기에 가면 어떤 식으로든 다시 불거질 가능성이 크다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박 대통령이 단행할 개각과 이에 연동될 원내대표 경선을 거치면서 여권 내 권력지도가 바뀌거나, 김무성 대표가 박세일 여의도연구원장 카드를 고집하는 등의 인사 문제가 다시 불거질 경우 당·청 전반에 걸쳐 갈등 기류가 확산될 수 있다.

이 경우에도 내부의 갈등 확산을 막고 외부에 공적(公敵)을 만들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인 종북몰이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여권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새정치연합 한 수도권 재선 의원의 “통진당을 ‘색깔론’ 도마에 올려놓고 해산으로 몰아갈 때까지는 좋았겠지만, 아마도 이제는 ‘해산까지는 말고 남겨둘걸 그랬나’ 하고 후회하는 이율배반적인 고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촌평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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