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여자, 돌, 더하여 ‘건축’이 있다
  • 김석윤 건축가·박길룡 국민대 건축과 명예교수 ()
  • 승인 2014.12.11 14:2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에 가면 꼭 봐야 할 현대건축 명물 톱9

제주를 만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가장 최신의 접근 방법은 건축이다. 현대건축의 경연장이라고 불릴 만큼 국내외의 내로라하는 건축가의 작품이 제주에 집중적으로 들어선 까닭이다. 최근 나온 <제주체>라는 책에서 지역 건축가(김석윤 건축가)와 외래의 시선으로 조감하는 외방 평론가(박길룡 국민대 건축과 명예교수), 시각적 이해를 전하는 건축 사진가(이재성)는 제주의 건축을 제주의 유전자와 역사·문화, 아열대 풍광 등 지역적인 배경과 건축적 경관에 맞물려 설명한다. <제주체>의 저자 3인을 길라잡이로 삼아 ‘제주로 떠나는 현대건축 여행’에 나서보자.

■ 전통의 형식, 민속자연사박물관

얕은 구릉 위에 높은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축을 얹어놓았다. 높낮이를 따라 공간을 풀면서 자연스럽게 내외를 넘나드는 구성을 이룬다. 동선을 길게 끌어, 오르고 내리며 여러 각도에서 공간의 전이를 만날 수 있다. 이러한 구조, 즉 누하진입(樓下進入)이라든지 점증하는 시각적 전이 또는 음과 양이 교차하는 공간은 전통 건축에서 흔히 보던 것이다. 마당을 끼고 도는 공간은 전통 가옥에서 익숙한 것이며 물매가 적당한 지붕은 제주의 초가에서 끌어온 것이다. 제주 돌을 재료로 해 전체적으로 묵직하고 투박한 것이 제주의 토속적 심미를 전한다.

포도호텔 ⓒ 이재성 건축전문 사진가 제공
■ 도시 건축의 윤리, 기적의 도서관

건축은 도시를 이루는 사회의 소인(素因)이다. 핍박한 사회에서는 답답한 건축밖에 만들 수 없고, 자유로운 사회는 새로운 가치를 만든다. 건축은 특히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미적 의미나 기능적 효용보다 사회적 가치가 중요할 수 있다. 기적의 도서관은 건축가 정기용이 무료 설계를 자청하며 건축의 사회적 기여를 시작한 후 전국에 11개가 지어졌다. 정기용은 그중 여섯 곳을 설계했고, 제주에는 제주시와 서귀포시에 각각 한 곳씩, 두 곳이 있다. 기적의 도서관은 건축가가 어린이 친화 공간에 힘을 기울인 덕분에 건축이 맑고 밝다. 크고 작고, 가라앉고 솟아오르는 공간 속에서 어린이는 책과 자유롭게 만난다. 건축가 정기용의 어린이 사랑이 건축으로 이어지는 생각을 읽는 재미가 있다.

■ 제주가 기억하려는 것, 제주4·3평화기념관

지역의 역사적 경험을 기억으로 남기려는 것이 기념건축이다. 절망의 사건이건 환희의 일들이건 다음 세대에게 전달할 의무가 있기에 기념비를 세우고 기념관을 짓는다. 제주가 가지고 있는 검은 기억 중 하나가 4·3 사건이다. 오름의 형상이 그렇듯이 만유인력은 통상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공간을 원하는데, 건축가는 이를 뒤집어놓았다. 건축의 형태를 역삼각형의 원추(圓錐)로 한 것은 다분히 기념물을 의식한 조형이다. 거꾸로 꽂힌 원추는 불안정하기에 역동적이다. 주변이 넓게 터진 대지에서 역원추 모양의 건축은 그 자체로 기념비처럼 서 있다.

■ IT와 제주의 만남, 넥슨컴퓨터박물관

제주 자연의 야수성과 IT라는 극단의 인공 문물이 결합한다는 것은 단순히 디지털 문명을 상대한다는 뜻이 아니라, 첨단의 문물이 자연과 만나서 만드는 문화경관을 의미한다. 사람에 대한 애정, 자연을 포섭하려는 생각이 IT를 위한 건축의 발상이다. 넥슨컴퓨터박물관은 에지(edge)가 분명하고 콘크리트와 유리의 상대성이 두드러진다. 큰 박스형 덩어리를 기하학적으로 저며 시선과 사람을 통한다. 건축은 주제가 게임이니 아톰이나 하다못해 레이저 광선이라도 나올 법한데 점잖다. 현관에 들어서면 날카롭게 예각으로 저민 오픈 스페이스로 계단이 타고 오른다. 이 오픈 스페이스는 각층 전시실을 연결하는 수직 동선이다. 계단은 오르고 꺾이는 속성 때문에 다이내믹하기 마련인데 건축가는 그 운동감을 아트리움 공간으로 극대화한다.

부영호텔 ⓒ 이재성 건축전문 사진가 제공
■ 아열대 건축, 부영호텔

제주는 가까스로 아열대 기후에 발을 딛고 있다. 특히 중문관광단지는 제주에서도 그중 남쪽이라 조금 더 해양과 아열대 기후의 성질에 가깝다. 부영호텔의 전체적인 인상은 적갈색이 지배하는 원색성과 빛을 받아내는 요소가 풍부하다는 것이다. 멕시코의 원색은 보색 관계를 마다하지 않는데 멕시코 출신 건축가 레고레타는 좀 더 세련된 계산을 했다. 원색이라 하더라도 중성색(백색·회색)을 섞어 가라앉히고 채색면에 질감을 둠으로써 미묘한 음영 위에 색채를 얹었다. 거기에다가 건축은 차양·발코니·그릴 등의 요소를 통해 햇볕과 그늘이 구성되는 효과를 만든다. 그래서 레고레타의 색채는 빛과 함께 있어야 한다. 건축의 볼륨에서 공간을 가급적 깊이 두고 그늘과 그림자를 연출하면서 아열대의 열기를 피한다.

■ 현상으로서 건축, 포도호텔 

하늘·땅·숲·바다·빛·바람·소리 등 제주가 거느린 모든 풍광의 요소는 정태(靜態)가 아니라 동태(動態)이며, 물상(物象)이 아니라 현상(現象)이다. 얕은 구릉 안에 앉혀진 포도호텔은 오름 또는 초가 마을을 연상케 한다. 단층의 건축은 긴 복도로 이어지고, 그것이 구불구불한 전통 마을의 골목길을 걷는 느낌이다. 이 실내의 골목길은 구부러지고 이어지며 간혹 객실 사이에 틈을 내 밖을 내다볼 수 있다. 아연판 지붕과 외벽의 목재 등 호텔의 건축 재료는 물질을 넘어 현상의 차원을 갖는다. 보도 바닥이나 담장이 화산석이고 마당에서는 야생화가 제주 바람에 실려 몸을 흔든다. 

■ 자연이 건축을 만나는 법, 제주현대미술관

제주에서 건축이 누리는 빛의 은혜, 울렁이는 대지의 모성, 바람의 향기, 그것은 축복이다. 미술관 외부는 제주 돌 현무암으로 마감됐다. 현무암은 회색에, 반짝일 줄 모르고, 문양도 두드러지지 않는, 완벽한 중성 색조다. 이 색조가 자연의 녹색, 하늘색과 어우러지면 자신은 배경이 되면서 뒤로 물러앉는다. 한 켜씩 비워 쌓기에 햇빛이 비치면 직조한 베옷처럼 바람이 숭숭 통하는 것이 제주 돌담을 성글게 쌓는 이유와 상통한다. 아무리 큰 프로젝트도 잘게 자르는 김석윤의 스케일은 한 덩이로 크게 하지 않는 제주 풍토의 크기 감각이다. 공간의 분할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통로는 마을의 골목길을 기억나게 한다. 한국의 건축이 원래 그러하듯 비움(虛)을 중시하고 그곳으로 바람과 기(氣)와 여러 가지가 드나들게 한다.

■ 옴팡의 기억, 제주돌박물관

제주에서 바람과 땅은 분리된 물상이 아니라 한통속이다. 바람이 건축의 형태를 지시하고, 건축은 땅을 파고들며 품에 안긴다. 이러한 공간적 양태(樣態)를 옴팡이라 해 일찍부터 일상의 생활공간에서 응용했다. 제주에서 이 움푹한 공간, 옴팡은 아주 구체적인 생존 전략이다. 제주돌박물관은 대부분의 공간을 지하에 묻었다. 건축이 바람에 맞서지 않고 지하로 들어간 덕분에 건물 주변의 들판과 오름의 풍광이 온전한 모습으로 남았다. 건축에 들어가는 일은 마치 땅의 충적층을 보러 내려가는 것 같다. 우리는 그 안에 길게 연속되는 동굴에서 돌의 향연을 만난다.

■ 풍광이 되려는 건축,  지니어스 로사이

건축가가 땅을 읽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제주에서 땅은 어머니다. 그래서 건축은 토템(totem) 세우듯 하거나 온몸으로 덮치는 애정과 같다. 지니어스 로사이는 힘의 근원(Ginius)과 땅을 지키는 수호신(Loci)으로 신화와 기호와 상징을 한데 모아놓은 개념이다. 제주 관광의 떠들썩한 놀이를 비웃듯이 묵직한 대화를 걸어오는 듯한 건축은 콘크리트를 주조로 만들어 무겁지만 차갑지 않은 느낌으로 콘텐츠를 담는다. 공간은 몇 개의 단계로 이어지는데, 사유하고 명상하고, 다시 되뇌며 고해하기를 건축이 조르는 듯하다. 어떤 공간과 프로그램을 만들어놓고 사용자를 들여보낸 후 ‘자, 이제부터 느껴보세요’라고 하는 느낌은 불편할 수도 있다. 지니어스 로사이는 건축이라기보다는 연면적 1185㎡에 압축된 고해 장치이며, 안도 다다오가 이끄는 수사학 미술관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