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 퍼주다 서쪽 살림 쪼들린다”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4.12.11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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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서부 지역 통일연대세 불만…장벽 무너진 지 25년 됐지만 갈등 여전

11월9일 저녁, 7000여 개의 하얀 풍선이 베를린 하늘로 날아올랐다. 베를린 장벽 철거 25주년을 맞아 설치한 15㎞의 ‘풍선 장벽’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가정의 TV 앞에서 독일 시민들은 장벽이 하룻저녁 사이에 신기루처럼 무너졌던 날을 기념했다.

그런데 최근 독일의 동부와 서부에서는 해묵은 지역감정 불씨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돈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1990년 통일 이후 옛 동·서독 지역 간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통일기금이 조성됐다. 뒤이어 1993년과 2001년에는 1·2차 연대협약이 체결됐고, 1995년에는 통일연대세도 신설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연방정부의 동부 개발 프로젝트는 자치단체와 납세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특히 연방정부가 2차 연대협약을 통해 2005년부터 2019년까지 총 1560억 유로의 연방재정보충교부금을 신연방주에 주기로 약속한 이후 ‘우선순위’에서 밀린 지역에서 불만이 커졌다.

가장 먼저 불만을 제기한 곳은 독일 서부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RW) 주다. NRW 주는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독일 광산업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산업 구조가 변하면서 지역 경제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고, 현재는 430여 개 기초자치단체 중 빚이 없는 곳은 8군데에 불과할 정도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다. 인구당 자치단체 부채 액수는 구(舊)동독 5개 주보다 높은 실정이다.

재정난에 허덕이는 독일 겔젠키르헨 시에서는 집을 판다는 안내문을 흔히 볼 수 있다. ⓒ EPA 연합
통일연대세 내기 위해 빚지기도

루르 지역의 작은 도시인 겔젠키르헨은 ‘가난한 옛 서독 도시’의 대표적인 사례다. 시내 곳곳에 갈라진 아스팔트 도로는 예산 부족으로 그대로 방치되고 있고, 공설 수영장은 문을 닫았다. 마틴 슐만 겔젠키르헨 시 대변인은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복지 분야의 수많은 새로운 과제를 해결하려면 연방과 주정부가 정기적으로 충분한 돈을 줘야 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런데 제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이 도시가 1991년 이후 지금까지 통일연대세 명목으로 연방에 낸 액수는 총 2억4500만 유로에 달한다. 심지어 부채의 일부는 연방에 의무적으로 내야 하는 통일연대세를 마련하는 데 쓰였다. 빚을 져가면서 남의 살림을 돕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내 몫부터 챙기자”…고통 분담은 뒷전

상황이 이렇게 되자 지역 정치인들과 주민들 사이에서 불만이 커졌다. 사회민주당(SPD)의 한네로레 크라프트는 이러한 민심을 간파하고 2010년 지방선거 당시 연대협약을 적극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앞으로는 방위(方位)가 아니라 필요도에 따라 돈을 분배해야 한다. 동부에 있든 서부에 있든 가난한 도시는 가난한 도시”라며 연대협약 때리기에 집중했고, 이 덕분에 NRW 주의 정권을 잡으면서 장관 직에 올랐다.

크라프트의 성공 이후 연대협약은 다른 정치인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2년 후인 2012년에는 선거를 앞두고 오버하우젠·겔젠키르헨·도르트문트 등 루르 지역 도시의 사민당 후보들이 일제히 지역 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자극했고, 연대협약을 조기 폐기하자는 선거전을 펼쳤다.

NRW 주가 동부 개발 자금에 먼저 숟가락을 대자 곧 다른 지역과 정당이 뒤를 따랐다. 이러한 양상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 바로 최근의 연방의회다. 독일 연방의회와 16개 주 대표들은 2019년 연대협약 만료를 앞두고 연구회를 조직해 올해 말까지 향후 재정안을 새로 짜기로 했다. 그런데 이 연구회는 한목소리로 2019년 이후에도 통일연대세를 계속 매기자고 동의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통일연대세는 애초에 사용처가 정해져 있지도 않고 기한도 없는 ‘눈먼 돈’이기 때문이다.

통일연대세는 전체 소득세와 법인세의 5.5%로 정해져 있는 일종의 부가세인데 독일 경제가 성장하면서 그 액수도 자동적으로 커지고 있다. 올해 걷힌 통일연대세는 150억 유로인데 이 중 실제로 동독 개발 사업에 편성된 예산은 절반뿐이다. 나머지는 연방정부가 다른 목적으로 사용한다.

논의에 나선 각 주 장관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이렇게 연방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눈먼 돈이다. 말로는 “필요한 곳에 연대세를 주자”고 하지만 자동차산업이 발달한 독일의 대표적인 ‘알부자 동네’ 바덴-뷔르템베르크 주나 금융업이 발달한 헤센 주 역시 숟가락을 들고 제 몫을 확보하기 위해 나섰다. 이들에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다. 그동안 다른 어떤 주보다도 통일연대세를 많이 냈으니 이제는 좀 돌려받아야겠다는 것이다.

‘내 몫부터 챙기고 보자’는 행태가 만연하지만, 그에 대한 비판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동안 인프라 구조가 낙후되었다는 핑계로 생산지를 옮기고 시설 투자 부담은 공적 영역으로 미뤄온 기업들은 정치인들과 한목소리로 “서쪽에도 교부금을 달라”고 외쳤다.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던 루르 지역 주민들도 지자체에 돈이 들어온다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 보니 통일연대세 명목으로 계속 세금을 거두는 대신 아예 이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중도 좌파 성향인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의 마크 바이제 경제부장은 비디오 칼럼을 통해 아예 “통일연대세는 그 자체로 엄청난 선동적 거짓말”이라고 규정하고 “납세자의 세금 부담을 줄이려면 연대세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역 자치단체가 재정난을 겪는 이유는 연방과 주 정부에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제대로 분배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통일 이후 독일 사회가 겪고 있는 박탈감과 연대 이념의 상실은 한반도 통일 이후 우리 사회에서도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장벽이 무너진 지 25년째인 독일의 동과 서는 여전히 서로 멀다. 부와 자원의 분배가 공정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고통 분담은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통일 독일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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