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스타 X파일] #5. “자옥이 남편 역은 내가 더 했어, 어디서 오버야?”
  • 이기진│PD ()
  • 승인 2014.12.04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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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 않은 공주’로 떠난 김자옥…기자·PD·작가 누구나 좋아해

‘공주’의 마지막 가는 길은 결코 외롭지 않았다. 배우 김자옥. 그가 떠났다. 예순셋, 너무 아까운 나이에 그가 예고 없이 우리 곁을 떠나버렸다. 하지만 장례식장 어느 곳에도 그가 노래했던 ‘외로운 공주’는 없었다. 대중도, 언론도 그리고 그 많은 동료도 모두 슬퍼하고 아쉬워했다. 김희애·김희선·강부자·강석우·임현식·이미연·윤소정·이승기·박지성 등 많은 동료 스타가 찾아와 장시간 빈소를 지키며 아쉬워하고 펑펑 울음을 쏟아냈다. 수많은 스타의 장례식장을 다녀온 필자 입장에서도 그의 빈소 풍경은 의외였다. 더욱이 장례식장이 너무 무겁고 침울해지자 동료들이 애써 분위기를 바꾸는 일들도 벌어졌다.

KBS-MBC 스카우트 전쟁 불러

“여보! 왜 먼저 가는 거야? 내 아내 역을 제일 많이 해놓고서….” 부인 혜은이와 함께 빈소를 찾은 동료 배우 김동현은 눈물이 너무 난다며 차마 빈소 안을 못 들어가다, 동료 탤런트 노주현이 나타나자 불쑥 이런 말을 뱉어냈다. 그런데 그다음 노주현의 멘트가 더 걸작이었다. “야, 자옥이 남편 역은 내가 더 많이 했어. 어디서 오버야?” 이미 중년을 훌쩍 넘긴 두 스타의 장난스러운 조크에 순간 장례식장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11월19일 폐암으로 별세한 배우 김자옥씨의 발인식이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가족과 동료 연예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됐다. ⓒ 시사저널 구윤성
김자옥은 참으로 많은 매력을 지닌 배우다. 아담한 키, 조용조용 뱉어내는 말 속에 언뜻 비치는 카리스마. 버림받는 가녀린 청춘 스타에서 울음의 여왕, 외로운 푼수 공주로, 그리고 원숙미 넘치는 중년의 연기자까지. 그래서일까. 그는 선배 연기자, PD·감독들로부터 귀여움과 사랑을 많이 받았고, 후배들에게도 존경과 존중을 받았다. 특히 곰살맞은 마음 씀씀이와 배려는 그를 따르는 수많은 팬 사단을 만들어냈다. 그의 인맥은 비단 연기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기자·PD·작가·가수는 물론 많은 개그맨과 스포츠 스타들도 있다. 이번 빈소와 영결식에서 펑펑 울던 이성미·박미선·이경실 등 개그우먼들은 평소 그를 친언니처럼 따른 ‘졸개(?)’들이다. 

어린 시절 김자옥의 열렬한 팬이었던 필자는 지금도 그의 데뷔 시절을 생생히 기억한다. 1970년 MBC가 야심 차게 선발한 공채 1기 탤런트 중에서도 그는 최고로 주목받는 신인이었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이 있었다. 그는 데뷔 후 TBC·KBS·MBC의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 속에 KBS로 옮겨간다. 그리고 <심청전>의 주역을 맡아 일약 스타로 떠오른다. 그러자 그의 친정 MBC는 온갖 노력을 들여 그를 다시 스카우트해간다. 그러고는 신인급에게는 상상도 못할 배역을 맡긴다. 그 작품이 바로 일일극 <수선화>다.

당시 무명의 신인 작가이던 김수현씨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기도 한 드라마 <수선화>는 그에게 그해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최우수연기상을 안겼다. 그 작품에서 그는 당시 떠오르던 청춘 스타인 현석·이정길·박근형 등을 차례로 거치며 그들에게 버림받고, 상처받고 배신당하는 비련의 여인 역을 해냈다. 영화에 비해 안방극장의 인기가 열세이던 그 시절, <수선화>는 <여로> <꽃피는 팔도강산> 등과 더불어 브라운관의 열풍을 이끌어낸 기폭제였고 그 한가운데 김자옥이 있었다. 이듬해 그는 영화 <보통여자>로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한다. 신인급 연기자가 TV와 영화 두 부문을 모두 석권한 것이다. 그는 한혜숙·김영애와 더불어 브라운관 트로이카로 불리면서 1970년대 TV와 영화를 넘나들며 최고의 전성시대를 구가한다.

탐나는 노래 “내 남편이 불러야”하며 뺏기도

“그 스스로 가수로도 데뷔했지만 실제 노래를 너무 좋아했어요.” 동료들의 증언이 아니더라도 배우 김자옥이 음악을 좋아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어디서나 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자랑을 늘어놓곤 했다. 시인이자 음악교사였던 아버지 김상화는 그에게 대중예술인의 끼와 재능을 물려준 장본인이다. 후일 영화 쪽 일에 종사하기도 한 아버지는 끼가 넘치던 어린 딸을 아역 성우로, 또 탤런트로 데뷔시켰다. 특히 김자옥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음악적 감수성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 때문일까. 그가 사랑했던 첫사랑도 가수였고, 후일 “사랑에는 실망했지만 사람에는 실망하지 않았다”라는 말을 남기며 헤어진 첫 남편 최백호 역시 가수였다. 이어서 1984년 재혼, 마지막까지 옆을 지킨 친구이자 동료인 남편 오승근도 역시 가수다. 1970년대 임용재와 함께 결성한 ‘금과 은’을 통해 수많은 히트곡을 내며 인기를 누렸던 오승근은 결혼 후 결핵늑막을 앓아 가수를 그만두고 사업가로 전직했다.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았던 그는 외환위기 당시 70억원에 이르는 거액의 부도를 내고 절망에 빠진다. 그때, 곁에서 함께 아파하고 위로하며 재기를 도운 사람이 바로 아내 김자옥이다.

“아내가 떠나면서 선물을 주고 갔어요. 너무 소중한 선물을….” 장례식장에서 오승근은 최근 빅히트를 치고 있는 <내 나이가 어때서>에 얽힌 뒷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사실 이 노래는 송대관을 비롯해 여러 가수가 탐을 낸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이 노래를 들은 김자옥이 작사가이자 매니저인 박웅씨에게 전화를 걸어 무조건 오승근이 불러야 한다며 강제로 뺏어갔다고 한다. 이 노래는 노래교실 등을 통해 알려진 후 빅히트를 치면서 오승근이 제2의 전성기를 누리는 계기가 되었고, 그 덕분에 가수로서 다시 일어서기도 했다.

<공주는 외로워>라는 노래가 한창 인기 절정이던 시절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부모의 사망과 언니의 자살, 연기에 대한 회의 등으로 우울증에 빠져 있던 김자옥이 주변의 권유로 택한 탈출구가 바로 ‘공주’를 콘셉트로 한 노래 도전이었다. 하지만 한창 인기가 치솟던 어느 날, 그는 미용실에서 마주친 한 선배가 “연기자의 품위를 지키라”고 질책하자 방송 녹화 현장에 와서도 한참을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 노래를 그만 하겠다며 속상함에 눈물을 쏟아냈다. 하지만 각박한 삶 속에서 웃음을 잃은 대중이 노래를 듣고 희망을 찾고 있다고 설득하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무대에 올랐다. 그러고는 더 밝고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빈소에 놓인 영정 사진 속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그를 보니 그날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푼수 같지만 카리스마가 대단했던, 결코 외롭지 않은 공주인 김자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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