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15. 뇌물 받으면 패가망신에 자자손손 벼슬길 막혀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4.12.04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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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 벼슬아치 <장리안>으로 엄격 관리 오늘날 활개 치는 ‘낙하산’ ‘○피아’ 세태에 경종

조선은 벼슬아치들의 부정부패를 강력하게 처벌한 국가였다. 공직자의 부정부패 처벌은 당대에 끝나지 않고, 그 후손들의 벼슬길까지 막았다. 벼슬아치가 직위를 이용해 재물을 긁어모은 것을 장죄(贓罪)라고 하고, 그런 벼슬아치를 장리(贓吏)라고 했다. 조선은 장리의 명단인 <장리안(贓吏案)>을 따로 작성해 관리했다. 이를 <장안(贓案)>, 또는 ‘뇌물을 받은 더러운 인간들의 장부’라는 뜻에서 <장오인녹안(贓汚人錄案)>이라고도 했는데, 여기에 한번 이름이 오르면 그 자신은 물론 자자손손 벼슬길이 막혔다.

조선은 과거를 볼 경우 아버지·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외할아버지에 대한 사항을 기록한 ‘사조단자(四祖單子)’를 제출했는데, 장리안에 이름이 올랐을 경우 이를 그대로 기록해서 제출해야 했다. 혹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청현(淸顯)한 자리에는 나가지 못했다. 청현한 자리란 맑고도 권력 있는 자리를 뜻하는데, 대간(사헌부·사간원)이나 승지, 문·무관의 인사권이 있는 이조나 병조의 벼슬을 뜻한다. 다른 죄는 국왕이 즉위하거나 대비 등이 병에 걸렸거나 자연재해가 있을 때 시행하는 대사면 때 사면받을 수 있지만, 장죄는 이때도 사면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부정부패 사범으로 걸리면 글자 그대로 패가망신(敗家亡身)하는 것이다.

뇌물을 받는 조선시대 탐관오리들의 부패상을 다룬 영화 의 한 장면. ⓒ ㈜영화사 월광
태종 “탐오한 사람의 딸 궁중에 둘 수 없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국왕이나 대통령의 측근이 부정부패를 저질렀을 경우 처벌이 쉽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태종이 상왕(上王)으로 있던 세종 3년(1421년) 발생한 전 평안도관찰사 김점의 부정부패 사건은 조선이 그 이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부패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김점의 부정부패 혐의가 불거졌지만, 대신들은 이를 감히 세종에게 아뢰지 못했다. 김점은 태종이 총애하던 후궁 숙공궁주 김씨의 부친이었기 때문이다. 국왕이 총애하던 여인과 관련된 사건의 경우 언론을 책임진 대간에서 말할 수 있지만, 상왕이 총애하는 여인의 경우는 달랐다. 세종은 즉위년(1418년) 8월 태종에게 헌수(獻壽·장수를 비는 술잔)를 올릴 때 무릎걸음으로 상왕 태종 앞까지 나가서 잔을 올릴 정도였다. 

세종 초기 상왕 태종과 관련한 일을 거론하는 것은 금기에 속했다. 그런데 김점의 혐의는 사대부의 염치를 저버린 비루한 사건이었다. 김점은 평안도관찰사로 가면서 가인(賈人·장사꾼) 최오을마대를 반인(伴人)으로 삼아 재물을 긁어모았다. 최오을마대는 주(州)와 군(郡)을 돌아다니며 관찰사를 팔아서 뇌물도 받고 벼슬도 팔고 죄수들을 상대로 옥사(獄事)도 팔았다. 평안도에는 현지인들에게 정5품 이하의 벼슬을 하사하는 특별한 관직인 토관(土官)이 있었다. 여진인들과 분쟁이 생길 경우에 대비한 자리였는데 이 자리도 재물을 받고 팔았다. 또한 북경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사람들의 짐바리까지 손댔다. 사신 일행을 수행하는 사람들 중에 상인이 있으면 이들의 짐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압수해놓고 뇌물을 바치면 보내주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세종실록> 3년(1421년) 10월조에는 “(김점이) 갈려서 돌아올 때는 짐이 150여 바리나 되어 세 차례로 나누어 운반했는데, 수레의 왕래가 끊이지 않아서 보는 사람들이 놀랄 정도였다”고 말하고 있다. 때마침 사직(司直) 김유간이 평양에 근친(覲親·부모를 뵈러 가는 것) 갔다가 이웃 사람들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었다. 김유간은 태종과 관련된 사건임을 알고는 직접 상소를 올리는 대신 정승 이원에게 말했다. 이원도 공개적으로 문제 삼지 않고 태종에게 조용히 알렸다. 태종은 승지와 병조를 시켜서 김유간에게 묻게 했다. 김유간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자 의금부에 하옥시켰는데, <세종실록>은 “태상왕(태종)은 김점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김점은 평소 타인의 허물이 있으면 친소(親疎)를 가리지 않고 직언해 강직하다는 평을 받았기 때문에, 그가 이런 비루한 일을 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태종은 대간과 형조와 의금부에 이 사건을 조사하도록 시켰는데, 드디어 김점의 부패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태종은 김유간을 즉각 석방하고 한 발짝 더 나가서 김점의 딸인 숙공궁주 김씨를 출궁시켰다.

“김점이 범한 죄를 지금 유사(有司·관련 기관)가 국문하고 있는데, 만약 그 딸이 그대로 궁중에 있으면 공의(公義)와 사은(私恩)의 두 가지가 혐의될 것이다. 내가 지금 출궁시켜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김점을 대할 것이니 유사도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예로 다스리라.”(<세종실록> 3년 10월19일) 정승 이원이 만류했지만, 태종은 “탐오한 사람의 딸을 궁중에 둘 수 없다”며 윤허하지 않았다. 의금부에서 조사하니 장물이 1000관이나 나왔는데, 태종은 이를 관주(官主), 즉 빼앗긴 사람들에게 돌려주게 했다. <세종실록>에는 김점이 옥에서 눈물을 흘리며 “나의 악명(惡名)은 반드시 사책(史冊)에 씌어져 훗날까지 전해질 것이다”라고 슬퍼했다고 전한다. 김점은 사형 위기에 몰렸다가 겨우 목숨만 건질 수 있었지만, 집안은 이미 결딴이 난 상황이었다. 태종이 이처럼 후궁의 부친까지 엄하게 다스리자 다른 벼슬아치들은 더욱 목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는 것은 감독자가 감독 대상과 함께 부패하는 공동 부패 현상이다. 각종 ‘○피아’가 다 그런 종류인데, 이는 우리 사회의 제도적 자정 기능이 갈 데까지 갔다는 뜻이다. 이럴 경우 조선에서는 어떻게 처리했을까. 이를 ‘지키는 자가 도둑질했다’는 뜻에서 ‘감수자도(監守自盜)’라고 불렀다. ‘감독에 임해야 할 자가 도둑질을 했다’는 뜻으로 ‘감림자도(監臨自盜)’라고도 불렀다. 조선의 형법 역할을 했던 <대명률(大明律)> ‘형률(刑律)’에는 ‘감수자도’ 조항이 있다. ‘무릇 감독으로 나가 지켜야 할 자 자신이 창고의 돈이나 곡식을 도둑질하면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가리지 않고 장죄로 논죄한다’는 규정이다.

벼슬아치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장죄로 논의되면 자자손손 벼슬길이 막혔다. 세종 29년(1447년) 7월 사헌부는 ‘경상도 의령 현감 허계가 기생 초계에게 관청 쌀 20말을 준 것’이 감수자도에 해당한다면서 곤장 80대를 치고 자자(刺字)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세종은 곤장만 치고 자자는 하지 말라고 감해주었다. 이마나 팔뚝에 검은 먹으로 죄명을 찍어 넣는 것이 자자다. 쌀 20말 정도의 혐의로 곤장을 맞고 자자손손 서용에서 제외되는 것이니 벼슬아치들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수자도 자체에 대한 처벌도 엄격했다. <성종실록>은 “(수뢰한 금액이) 1관(貫) 이하면 장(杖) 80대, 1관 이상 5관에 이르면 장 100대, 17관 500문(文)이면 장 100대에 도(徒) 3년, 25관이면 장 100대에 유(流) 3000리, 40관이면 참형(斬刑·목을 벰)에 처한다”(<성종실록> 1년 7월6일)고 기록하고 있다.

처벌이 너무 엄격하다 보니 부작용도 있었다. 조선 인조 때 문신 이덕형의 수필집인 <죽창한화(竹窓閑話)>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이덕형의 고향 사람인 송평이 종이를 만드는 조지서(造紙署)의 별제(別提)로 있을 때 의녀(醫女) 하나를 첩으로 두었다. 그는 중국에 국서를 보낼 때 쓰는 두꺼운 자문지(咨文紙) 한 장으로 전모(氈帽)를 만들어서 첩에게 주었다. 그런데 대관(臺官) 중에 이 여인을 독점하려던 자가 송평을 탄핵해서 장죄로 하옥시켰다. 혐의를 부인하자 대관이 형장을 치려고 했는데, 본래 성질이 굳센 송평은 화를 내면서, “내 비록 죽을지언정 어찌 이 형장을 받는단 말이냐”라고 혐의를 승복했다. 그래서 장안에 기록되어 그 자손까지 금고(禁錮)되고 말았다. 그의 증손 송복견이 문과에 올랐으나 청현한 벼슬자리에 나가지 못하고 시원치 않은 반열로만 돌다가 국가의 의례를 관장하던 통례원(通禮院)에서 겨우 당상관에 올랐다. 다른 후손들도 미관말직을 전전해야 했다.

‘낙하산’ 등 인사 문제가 계속 지적되자 박근혜정부는 최근 인사혁신처를 출범시켰다. ⓒ 시사저널 포토
<장리안> 채찍과 더불어 청백리 선발 ‘당근’도

그렇다고 조선이 벼슬아치들에게 채찍만 휘둘렀던 것은 아니다. <장리안>에 이름을 적어 자자손손 벼슬길을 막는 것이 ‘채찍’이라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하는 것이 ‘당근’이었다. 청백리의 자손들은 <장리안>에 기록된 자식들과는 정반대로 2품 이상 대신이 천거할 경우 특채되거나 관직에 의망(擬望·후보에 오름)되었다. 부정부패 사범의 자손은 오욕을 안고 살아가야 했지만 청백리의 자손은 영예를 안고 살아갈 수 있었다. 성호 이익은 ‘청렴과 탐오(貪汚)’라는 글에서 자신이 사는 마을에 청백리였던 고관이 있었으나 청렴하기 때문에 가난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자손이 사방으로 흩어져 100여 년간 미관말직도 하지 못했다고 한탄하고 있다. 이익은 “국조(國朝) 이래 청백리에 선발된 자가 약간 명에 지나지 않는데, 조정에서 매번 그 자손을 등용하라는 명령은 있으나, 오직 뇌물을 쓰며 간구(干求)하는 자가 간혹 벼슬에 참여되고 나머지는 모두 초야(草野)에서 굶주려 죽고 만다”라고 덧붙였다. 이익은 또한 “세상에 장리(贓吏)의 법이 엄중하지만 대소 관원들의 집이 다 화려하고 노비마저 다 살쪘음에도 한 명도 법에 걸려 죽은 자가 없다”면서 “법망(法網)에서 벗어난 자가 너무 많다”고 한탄하고 있다.

현재 공직사회에 대한 한국 사회의 부정적 인식을 청산하려면 <장리안>과 청백리 포상 같은 양방향의 대책이 필요하다. 이익은 “탐오(貪汚)를 금지하는 방도는 단순히 이마에 자자(刺字)해서 형벌로 징계하는 것만이 아니라 염치와 의리를 고무해서 권장해 본받게 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형벌보다도 청렴한 사람을 들여 쓰는 것이 더 근본적인 대책이란 뜻이다. 그러나 지난 몇 번의 청문회에서 드러난 것처럼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청백리 성향의 전문가보다는 장리안에 기록되면 딱 알맞을 비전문가들을 주로 들여 쓰는 게 현실이다. 숱한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잇단 ‘낙하산’에 각종 ‘○피아’로 얼룩진 현재의 우리 사회 상황을 조선시대의 판서 이익이 본다면 무엇이라고 한탄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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