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거래 “오면 세금 줄여줄게”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4.11.25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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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이케아·아마존에 조세 특혜 EU 국가 “도둑질”이라며 반발

50만 룩셈부르크인들은 지금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세금 혜택을 미끼로 외국 기업을 적극 유치해 국부와 복지 근간을 마련한 ‘룩셈부르크 모델’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7일 호아퀸 알무니아 EU(유럽연합) 경쟁 집행위원의 발언이 시발점이었다. 그는 2003년 아마존이 룩셈부르크에 유럽 지사를 세울 당시 특혜를 받았다는 ‘근거 있는 의혹’을 품고 있다고 말했다. 아마존이 유럽에서 올린 수익을 룩셈부르크 지사로 보내는 대가로 세금 할인을 받을 수 있도록 당국과 특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마존유럽이 지난 10년간 유럽 전체에서 올린 매출에 대해 룩셈부르크 세무 당국이 매긴 법인세율은 1%도 되지 않았다. 룩셈부르크의 법인세율은 원래 29%다.

EU가 수사를 시작한 지 한 달 만인 11월6일, 국제탐사보도협회(ICIJ)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특혜를 받은 것은 아마존뿐만이 아니었다. 펩시·이케아·페덱스 등 전 세계 340여 개의 다국적기업이 룩셈부르크 당국과 결탁해 자회사를 설립하고 법인세 할인을 받아왔다고 폭로했다. 룩셈부르크가 국제적인 조세 회피처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구체적인 기업의 이름과 회계 자료가 공개된 것은 처음이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의 대화를 뒤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장-클로드 융커 유럽집행위원장. ⓒ EPA 연합
“룩셈부르크가 이웃 나라 세금 가로챈다”

폭로 보도가 나온 직후 기업들은 물론 정부 관료들까지 “룩셈부르크 모델은 합법적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의견은 다르다. 클레멘스 퓌스트 유럽경제연구소(ZEW) 소장은 “몇몇 기업에만 비밀리에 세금 혜택을 주는 것은 경쟁을 왜곡하고 의심을 사는 길”이라고 비판했다. 독일 재무부의 한 관계자 역시 시사저널과의 전화통화에서 “룩셈부르크 모델이 합법적이기는 하지만 정당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기업들이 절세 혜택을 누려온 배경에는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 등 세계적인 회계법인이 법의 허점을 노려 만들어낸 절세 구조가 있다. PwC가 가구 기업 이케아를 위해 만들어낸 기업 구조는 전문가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복잡하다. 그만큼 그 효과는 탁월했다.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이 100여 쪽 분량의 이케아 재무 자료를 분석한 결과 룩셈부르크에 위치한 ‘인터이케아홀딩’은 2010 회계연도에 25억7243만6000유로의 순수익을 냈지만 세금 신고액은 0.002%에 불과한 4만8000유로였다. 

이처럼 룩셈부르크 모델은 기업 간 경쟁을 왜곡할 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재정에도 심각한 손해를 입힌다. 2012년 아마존은 독일에서만 68억 유로의 매출을 기록했다. 독일 세법에 따라 정상적으로 세금을 냈더라면 이 중 30%인 20억4000만 유로가 독일 국고에 들어왔어야 했다. 하지만 아마존은 독일 세무 당국에 1020만 유로의 세전 수익만을 신고했고, 세금은 320만 유로만 냈다. 원래 매출의 0.0004%에 불과한 금액이다. 나머지 돈은 모두 룩셈부르크의 아마존유럽으로 이체되었고, 룩셈부르크는 1%도 안 되는 법인세를 매겼다. 결국 룩셈부르크와 아마존이 독일의 국고에 들어갔어야 할 돈을 가로챈 셈이다.

절세 혜택으로 다국적기업들의 합법적 탈세를 도운 실상이 밝혀지면서 룩셈부르크는 다른 EU 회원국들로부터 뭇매를 맞고 있다. 특히 금융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절한 구조조정에 돌입한 스페인·포르투갈·그리스와 유로존을 위해 천문학적 금액의 지원금을 출연한 독일 언론은 불만을 감추지 않는다. 

불똥은 장-클로드 융커 유럽집행위원장에게까지 튀었다. 그가 룩셈부르크 총리로 재임한 1995~2013년 사이 18년간 340여 개 기업이 특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의 경제 일간지 ‘디아리오 에코노미코’는 “융커는 유럽을 더 망쳐놓기 전에 물러나야 한다”며 융커 책임론을 부각했다.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는 룩셈부르크 모델을 ‘도둑질’로 규정하고 “이를 눈감아온 융커가 부채 국가에 경제 개혁을 요구할 명분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때는 지금이다” 극우의 융커 불신임론

EU 해체를 외치는 극우파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융커에 대해 총공세에 나섰다. 영국의 나이젤 패러지와 프랑스의 마리 르펜 등 극우 정당 대표를 비롯한 76명은 11월18일 유럽의원들의 서명을 받아 융커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이 때문에 유럽국민당(EPP)과 유럽진보연합(S&D)은 “융커를 일단 믿어보자”며 ‘EU 회의론’ 진화에 나섰다. EU가 더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서다. EPP의 만프레드 베버 총재는 트위터를 통해 “융커 불신임은 유럽의회는 물론 유럽연합 전체에 대한 공격이며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혀 융커 축출에 제동을 걸었다.

여론은 들끓지만 EU 각 회원국 정상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쥐트도이체 차이퉁’은 이를 두고 “각 나라에 법인세 우대 관행이 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EU는 룩셈부르크뿐만 아니라 아일랜드와 네덜란드에 대해서도 비슷한 의혹을 품고 조사 중이다. 네덜란드는 올해 6월 커피전문점 스타벅스에 법인세 혜택을 준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공교롭게도 네덜란드의 재무장관인 자론 제이잘블럼은 유로존 국가들의 예산 정책과 공적 재무를 감독하는 유로그룹의 의장을 맡고 있다. 이 때문에 지골트 유럽 녹색당 의원은 “네덜란드야말로 유럽 최대의 조세 회피 천국”이라며 “제이잘블럼 의장이 융커 스캔들에 대해 놀라는 척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곳간의 앞문과 뒷문 열쇠를 모두 쥐고 있는 유럽 정치인들이 과연 조세 정의 실현을 이룰 수 있을지 의문시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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