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13. 이순신 죽이려던 왕에게 “불가하옵니다”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4.11.19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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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서 나라 구한 류성룡·이원익…당파 초월한 뛰어난 재상 중요성 일깨워

리더의 자질은 위기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만약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선조도 그저 중간 정도의 임금으로는 평가받았을 것이다. 선조는 삼도순변사 신립(申砬)의 패전 소식을 듣자마자 도망갈 궁리부터 했다. 신립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나흘째인 선조 25년(1592년) 4월17일 패전하는데, 그나마 이날 좌의정 류성룡을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임명한 것이 선조가 한 선택 중 거의 유일하게 탁월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도체찰사란 전시에 정1품 의정(議政)이 맡는 최고 군직을 뜻하는데, 류성룡은 이후 영의정 겸 도체찰사 신분으로 각종 개혁을 주도하며 나라를 망국의 위기에서 건져냈다.

선조는 4월28일 이조판서 이원익을 징병체찰사(徵兵體察使)로 삼아 평안도로 보내 민심을 수습하라고 말하면서 “(적이) 서울 가까이 온다면 관서(평안도)로 옮겨야 하니 이런 뜻을 경은 잘 알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자신이 곧 평안도로 도주할 테니 미리 길을 닦아놓으라는 이야기였다. <선조실록> 4월29일자는 ‘이때 나라를 버리는 논의가 이미 결정되었는데 종실(宗室) 해풍군(海?君) 이기 등 수십 명이 합문을 두드리며 통곡하자 상이 “가지 않을 것이고 마땅히 경들과 목숨을 바칠 것이다”라고 전교하자 이기 등이 물러갔다’고 전하고 있다. 이는 이기 등을 물러가게 하기 위한 거짓말에 불과했다. <선조실록>은 ‘이날 밤 호위하는 군사들은 모두 달아나고 궁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았으며 금루(禁漏)는 시간을 울리지 않았다’고 망국 직전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왜군이 나타나기도 전에 선조는 도망갈 생각부터 하는 것이었다. 다음 날인 4월30일 새벽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주할 때 나라가 망한 것을 슬퍼하듯이 비가 쏟아졌다. 궁인(宮人)들이 통곡하면서 뒤를 따랐는데, 보통 임금의 행차는 4000~5000명 정도가 호위해야 하지만, 종친과 호종하는 문무관이 채 100명도 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도주 길이었다. 이미 체제는 무너져 내려 벽제관에서 점심을 먹을 때 왕과 왕비의 반찬만 겨우 준비되었을 뿐 광해군은 반찬도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전란을 진두에서 지휘해야 할 임금이 잔뜩 겁을 먹고 도망가기 바쁜 상황에서 대신들은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해나가야 했을까. 류성룡(1542~1607년)과 이원익(1547~1634년)의 경우로 살펴보자. 

임진왜란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을 걱정하는 재상 류성룡과 선조. 사진은 드라마 의 한 장면. ⓒ KBS 제공
이순신을 피가 스며들 정도로 극력 변론

<선조수정실록> 25년 5월1일자는 선조의 만주 피란에 대해 ‘류성룡이 거듭 안 된다고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만약 이때 류성룡이 만류하지 않고 선조가 압록강을 건넜다면 조선은 망하고 말았을 것이란 점에서 대신들의 원칙 있는 반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선조가 이원익을 평안도에 먼저 보낸 것은 그가 5년 전(1587년) 안주목사였을 때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이원익은 극심한 흉년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던 백성들에게 양곡 1만석을 구해 구호하고, 파종에 쓸 종곡(種穀)도 나누어주었다. 뽕나무를 심고 누에 치는 기술을 가르쳐 백성들이 이원익에게 ‘뽕나무 상(桑)자’를 써서 이공상(李公桑)이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이원익은 군역(軍役)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당시 양반 사대부들은 군역에서 면제되고, 상민들만 군역 의무를 지고 있었다. 백성들은 15세부터 60세까지 1년에 3개월씩 번(番)을 서야 했는데, 그 고통이 극심했다. 이원익이 이를 1년에 2개월씩 서는 것으로 완화시키자 평안도 백성들이 이원익을 크게 존경했다는 것이다.

성공한 재상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가 인재를 천거하고 보호하는 것인데, 이 점에서 류성룡과 이원익은 이심전심이었다. 이순신을 천거해서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삼은 주인공이 류성룡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이 연전연승하면서 백성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떠오르자 선조는 이순신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선조가 재위 30년(1597년)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내린 ‘비망기’(備忘記·임금의 명령이나 의견을 직접 적은 문서)에는 이순신을 반드시 죽이려는 선조의 결기가 느껴진다.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欺罔·속임)한 것은 임금을 없는 것(無君)으로 여긴 죄이고, 적을 놓아주고 공격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負國) 죄이며,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모함한 것은 방자하여 기탄함이 없는 죄이다. 이렇게 허다한 죄상이 있으면 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 없고 율(律)을 의거해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인신(人臣)으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여야지 용서할 수 없다.”(<선조실록> 30년 3월13일)

선조는 이 비망기를 가지고 대신들과 논의해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한마디로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고 보고하라는 것이다. 유교정치를 표방한 조선은 신하들이 죽이자고 청해도 임금이 ‘차마 못 죽이겠다’고 관용을 베푸는 인정(仁政)을 기본으로 삼고 있었다. 임금이 먼저 무군(無君)·부국(負國) 등의 용어를 써가면서 ‘반드시 죽여야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보다 앞선 2월6일 선조는 이순신을 몰래 잡아오라는 밀부(密符)를 내렸는데, 2월25일 동지사 노직이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병선 40여 척을 건조하고 있는데 아직 마치지 못했다고 합니다”라고 보고했다. 이순신에 대한 일종의 간접 응원이었다. 그러자 선조는 “다만 중국이 구원해주기를 믿을 뿐이다”라고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러나 이는 엉뚱한 것이 아니라 선조의 본심이었다. 나라를 구한 것은 명나라 구원군이지 이순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순신을 죽이려는 선조에게 강하게 제동을 건 인물이 이원익이었다. 이원익의 문집에 실린 ‘일사장(逸事狀)’에는 이원익이 이때 “장차 원균으로 이순신의 임무를 대신하려 하자 공(이원익)이 치계를 올려 ‘원균의 기용과 이순신의 파직은 불가능하니 이를 재고해달라’고 조정에 상주했고 선조가 다시 묻자 피가 스며들 정도로 극력 변론했다”(<오리집>)고 전하고 있다. 이원익은 이순신 같은 공신을 죽이면 나라가 망한다는 생각에 이 문제에서는 시종 이순신을 옹호했다. 그 전인 선조 29년(1596년) 10월에도 선조가 “(이순신이) 그 후 태만한 마음이 없지 않다고 하였다”면서 부정적인 견해를 늘어놓자 이원익은 “소신의 생각으로는 경상도에 있는 많은 장수 가운데 이순신이 제일 훌륭하다고 여겨집니다”라고 반박했다. 그 다음 달에도 선조가 “내가 듣기에 군사를 청해서 수전(水戰)을 했는데, 원균은 그 공이 많고 이순신은 따라간 것에 불과하다”면서 이순신을 비난했을 때 이원익은 “원균은 당초에 많이 패했으나 이순신만은 패하지 않고 공이 있었으므로, 다투는 시초가 여기에서 일어났습니다”라고 이순신을 끝까지 옹호했다. 이렇게 류성룡과 이원익은 인재를 천거하고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정홍원 국무총리가 11월11일 국립중앙의료원을 찾아 에볼라 감염 환자 이송 시 치료에 나설 의료진의 특수 방호복을 살펴보고 있다. ⓒ 연합뉴스
남인의 대동법, 서인의 김육이 확대 실시

류성룡은 혁명에 가까운 개혁이 아니면 망한 나라를 살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혁명에 가까운 개혁이란 양반 사대부의 기득권을 타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류성룡은 속오군(束伍軍)을 만들어 그간 군역에서 면제되어 있던 양반들에게도 군역을 지웠다. 또한 납세자의 빈부 격차를 고려하지 않고 수백만 평의 농지가 있는 대부호와 송곳 꽂을 땅 한 평 없는 전호(佃戶·소작인)에게 똑같은 세금을 부과하던 공납(貢納)의 폐단을 개혁했다. 부과 기준을 가호(家戶)에서 농지의 많고 적음으로 바꾸어 쌀로 통일해서 납부받는 작미법(作米法·질미법)을 시행한 것이다. 농지가 많은 양반 사대부들은 이런 개혁 입법에 격렬하게 반발했으나 류성룡이 영의정 겸 도체찰사 자격으로 밀어붙인 것이었다. 양반 사대부들은 전시에는 할 수 없이 이런 개혁안을 받아들였다가 전쟁이 끝날 무렵 류성룡에 대한 공격으로 돌아섰다. 남이공 등이 “(류성룡이) 국정을 담당한 6~7년 동안에… 훈련도감과 체찰군문에서 속오·작미법을 만들고…”(<연려실기술>)라고 공격한 것이다.

속오법을 만들어 양반들에게도 군역 의무를 부과하고 작미법으로 토지가 많은 양반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두었다는 비판이었다. 선조가 여기에 동조하면서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류성룡은 결국 파직당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류성룡이 파직된 선조 31년(1598년) 11월19일은 이순신이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이었다. <서애선생 연보>는 “통제사 이순신은 고금도(古今島)에서 선생이 논핵되었다는 말을 듣고 실성해서 크게 탄식하며 ‘시국 일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는가’라고 탄식했다”고 전한다. 류성룡이 실각된 후 그가 전시에 시행했던 작미법을 비롯한 대부분의 개혁 입법들은 폐기되었다.

안동의 하회마을로 낙향한 류성룡은 선조 40년(1607년) 사망했지만, 그의 개혁정책은 광해군 즉위년(1608년) 영의정에 제수된 이원익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원익의 ‘행장’은 ‘공(이원익)이 선혜청을 설치해 대동법(작미법)을 실시하기를 청하자 광해군이 경기도에 먼저 시범 실시하게 했는데, 부호들이 그 이익을 잃게 되므로 저지하기 위한 논의를 집단으로 일으키자 광해군이 그만두려고 했지만 경기 백성들이 그 편리함을 다투어 말해서 그만두지 못했다’(<오리집>)고 전하고 있다. 이렇게 이원익은 재상이 되면서 류성룡이 실시했던 작미법(대동법)을 되살려냈다. 그리고 이 불씨는 남인이었던 류성룡·이원익과 달리 오히려 당파를 달리했던 서인의 김육이 살려내 충청도 및 전라도까지 확대 실시했다. 류성룡이 전시에 실시했던 작미법(대동법)은 경기도에 시범 실시된 지 100년 만인 숙종 34년(1708년)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지금 다시 총리 인선설이 나오고 있다. 지금 한국 사회는 남북 문제 및 사회 양극화를 비롯해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조선의 재상 류성룡·이원익·김육이 말해주는 교훈은 그 시대의 문제를 간파하고 정면에서 그 해법을 찾는 능력 있는 재상의 필요성이다. 이들처럼 당파를 초월해서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재상이 절실히 요구된다. 인재를 천거하고 보호하며 핵심 정책을 장기적으로 입안하고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실천할 수 있는 참 재상감을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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