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과 을이 뒤집혔다
  • 전성인 |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
  • 승인 2014.11.06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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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9년 8월23일,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84개 금융기관장을 불러놓고 금융기관 시장 안정 간담회를 개최했다. 대우 사태로 금융 시장이 크게 흔들리는 상황에서 일종의 ‘군기 잡기’ 성격의 간담회였다. 이 간담회에서 금융기관들은 이 위원장이 ‘요구’한 △수익증권 환매 자제 △투신사에 대한 은행권의 원활한 자금 지원 △채권 매각 자제 △대우 협력업체 자금 지원 협조 등을 모두 수용했다. 깔끔한 ‘백기 항복’이었다. 이날의 백미는 이들 결정이 모두 정부의 ‘요구’에 의한 것이지만 그 형식은 ‘업계 자율 결의’ 형식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업계 결정이니 정부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세상에 누가 ‘갑’이고 누가 머슴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2. 2014년 10월29일, 하나은행과 외환은행은 각각 이사회를 개최해 두 은행 통합을 결의했다. 그다음 날 하나은행의 김종준 행장은 사퇴했다. 11월 초에는 금융위원회에 합병 승인을 신청할 것이라는 말도 흘렸다. “우리가 이렇게 하기로 결정했으니 감독당국은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이미 써놓은 각서 따위는 안중에 없다. 그것을 뒤집는 모든 부담은 감독당국이 지라는 것이다. 론스타 탈출 때 계약 다 해놓고 감독 당국을 압박하면서 목적을 달성할 때부터 맛을 들여도 단단히 들였다. 역시 세상에 누가 ‘갑’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지난 15년 동안 세상이 많이 변했다. 금융 시장의 역학관계도 달라졌다. 옛날에는 어디 은행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감독 당국에 대들 수 있었는가. 기업 하나 부도내는 것도 온갖 눈치 다 보면서 결정하고 감독 당국이 호출하면 은행장이고 상무고 가릴 것 없이 ‘총알처럼’ 대령하는 것이 ‘예의’이자 ‘상식’ 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감독 당국의 수장이 자신이 연임되는지를 금융지주회사 회장에게 물어보는 형국이 됐다. 감독기구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꿈도 금융기관에 가서 회장이나 하다못해 감사라도 한자리 꿰차는 것이 됐다. 과거에는 결정은 관료가, 집행과 책임은 금융기관이 졌는데 지금은 결정은 금융기관이, 사후 뒤처리는 감독기구가 하는 형국이 됐다.

이것은 데자뷰다. 언제 이런 일이 또 있었는가. 정부와 재벌의 관계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과거 재벌은 정부의 ‘밥’이었다. 정부가 자금줄을 꽉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수석이 부르면 비서실장이 오고, 대

통령이 부르면 총수들이 달려왔다. 지금은 어림도 없는 소리다. 금융위가 됐건 공정위가 됐건 국장급 이하의 공무원이 재벌에 대해 단독으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옛날 얘기가 돼버렸다. 좋게 말하면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간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정부가 포획된 것이다.

지금 금융지주회사들이 정확히 재벌 흉내를 내고 있다. 각서 파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너희들이 뒤치다꺼리해봐”라며 관료에게 공을 넘긴 하나-외환 통합 시도가 그 예다. 지금 이들을 막지 않으면 나중에 막기는 더 어려워질 것이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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