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또 다른 잔치의 시작이다”
  • 조철│문화 칼럼니스트 ()
  • 승인 2014.11.06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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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일담 같은 성장소설 펴낸 최영미 시인

언제나 어디서나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작가로 소개되는 최영미 시인. 시인은 이제 새로운 꼬리표를 달 듯하다. ‘쉰, 또 다른 잔치의 시작이다’라는 슬로건과 함께 새로운 모습을 선보인 최영미 소설가. 최 작가는 지금까지 10여 권 펴낸 책 중 소설로는 두 번째인 <청동정원>을 펴내며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소설을 마무리하는 중에 한 모임 자리에서 지인이 ‘오십, 또 다른 잔치의 시작’이라는 말을 해 웃었던 일도 들려줬다. 

<청동정원>은 문학 계간지 <문학의 오늘> 2013 여름호부터 다섯 번에 걸쳐 연재한 소설이다. 지난해 여름 초입 첫 연재를 끝낸 후 만났을 때 그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경기도 고양시 아람누리도서관을 집필실로 삼은 그는 큰 가방에 오래된 노트북을 넣어 다녔다. “컴맹은 아니라 해도 새 기계를 도입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이번 소설의 초고가 컴퓨터 파일이었다면 아마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초고는 26년 전에 원고지나 노트에 썼던 것이다.”

<청동정원>의 초고는 1988년 이미 써놓았던 것이다. 시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훨씬 전이다. 그는 원고지 450장 분량으로 썼던 것을 25년 동안 간직해오며 그동안 고치고 다시 쓰다가 숙제를 끝내듯 세상에 내놓았다.

ⓒ 시사저널 박은숙
“시대는 변했어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아”

“주인공은 1980년대에 대학 생활을 한 세 사람 이상의 캐릭터를 종합해 만든 인물이다. 내가 소설로 다루고 싶은 건 운동권 후일담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어느 청춘이다. 폭압적인 체제에 앞장서 싸우지도 못하고 멀찍이 물러나 모르는 척하지도 않았지만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았던 주변부의 삶이다.” 작가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뜨거웠던 1980년대, 폭압적 정권에 맞서 앞장서지도, 뒤로 숨을 용기도 없었던 ‘경계인의 초상’을 그려냈다. 제목으로 쓰인 ‘청동정원’은 쇠붙이로 무장한 전경들이 교정의 푸른 나무들과 겹쳐지는 풍경을 묘사한 표현으로, 쇠와 살이 부딪치던 시대의 분위기를 은유한다.

“쇠와 살이 부딪치던 청동시대를 통과하며 어디에 있었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모두 개인이었다. 한 여대생의 이야기지만 그의 영혼에 각인된 흉터와 무늬를 그려내는 작업에 성공한다면 우리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청동정원>은 홈커밍데이를 맞아 모교인 S대를 방문하게 된 이애린이 젊음의 열기, 활기로 가득한 교정을 둘러보며 자신의 대학 시절을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관악산 유원지 입구에 자리 잡은 ‘강 건너’라는 주점이 추억의 물꼬를 튼다. 1981년 4월, 선배가 주는 술을 묵묵히 받아 마시며 ‘파쇼’ ‘광주’ ‘투쟁’과 같은 말이 가슴으로 흘러드는 동안, 애린은 명문 대학 다니는 딸을 자랑스러워하는 군인 출신 아버지, 열 아들 부럽지 않다며 자긍심을 느끼는 어머니로부터, 또한 착한 딸, 착한 학생이고자 했던 자신으로부터 결별을 선언한다.

“유신의 위세가 삼엄하던 여학교에서 수업 거부의 선봉에 섰던 내가, 뭘 해도 용인되던 ‘서울의 봄’에 캠퍼스의 순한 양으로 지낸 이유를…. 나를 이해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

사랑과 혁명의 불꽃이 지나간 자리에서 돌아보는 자의 애수가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작가는 소설에서 “스무 살의 자유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었다”고 말하며 시대의 비극성과 함께 청춘의 아픔과 사랑, 절망을 섬세하고 생생한 언어로 그려낸다. 앞장서서 뜨겁고 치열하게 분노하지 못했던, 그럼에도 변혁을 꿈꾸며 20대를 보낸 수많은 경계인에게 작가는 이제 그만 부채감을 내려놓으라고 말하는 듯하다.

작가는 취재에도 열심이었다. “이 소설을 쓰면서 ‘1980년 광주’를 경험했던 사람들과 1980년대에 상처를 가진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과 인터뷰할 때 녹음기를 가지고 가서 녹취했다. 

젊은 세대에게는 읽히지 않을 소설이 아닐까 물었다. 작가는 “요즘 10~20대는 그 시대에 한 개인의 삶이 그 시대의 일로 해서 어떻게 변했는지 잘 모르지 않나. 그런 세대 간의 단절감 같은 것을 해소시켜주려 한 측면도 있다”고 답했다.

작가는 이 소설의 얼개를 짜면서 <레미제라블>에서 자극을 받기도 했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소설 <레미제라블>을 쓴 것도 프랑스 혁명이 끝나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던 것이 그중 하나. 작가는 “나도 1980년대의 청춘을 이해하는 데 수십 년의 세월이 걸렸다. 지난해 소설 연재 직전에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고 약간 욕심이 생겼다. 한 개인만 다루는 것보다 폭넓게 많은 사람을 다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역사는 집단의 기억을, 문학은 개인의 기억을 다룬다. 역사보다는 문학이 더 깊게 시대를 드러낸다. 애린의 기억에 의해 <청동정원>에 새겨진 세계는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의 젊은 독자에게도 아주 익숙할 것이다. 시대는 변했어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싱그러운 청춘을 옭아매는 도구는 모습만 바꿨을 뿐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여전히 황폐하고 고통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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