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한국의 가벌] #1. 삼성 이병철家 - LG 창업주 구인회와 사돈 맺으며 재벌가 ‘혼맥 시대’ 열어
  • 소종섭 편집위원 ()
  • 승인 2014.11.06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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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인 사이에 4남 6녀 둬…삼성·CJ·신세계·한솔 등으로 분리

한국을 움직이는 가벌(家閥)들이 있다. 핏줄과 부(富), 권력을 매개로 한 거대한 그물망이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정·관·재계 등 각계에 걸쳐 있는 이 네트워크는 물밑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마치 보이는 세상 뒤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는 것 같다. 시사저널은 이번 호부터 ‘新한국의 가벌’을 연재한다. 재계를 중심으로 정계, 법조계를 움직이는 주요 인물들의 혼맥 지도를 촘촘히 톺아보는 기획이다. 혼맥과 그 배경은 무엇이며, 현재는 어떠한지 등을 두루 들여다볼 예정이다. 최근 재계에 불고 있는 형제·부자간 소송전 전말도 기록할 것이다.

삼성은 지금 3세 경영 시대를 맞고 있다. 고 이병철 전 회장이 대구에서 삼성의 모태인 삼성상회를 창업한 것은 1938년이다. 지금부터 76년 전이다. 이 전 회장의 뒤를 이어 제2 창업을 통해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이건희 회장이 삼성호의 키를 잡은 것은 1987년이다. 지금부터 27년 전이다. 삼성은 지금 100년 기업을 향해 가고 있다. 2013년 삼성그룹(금융사 포함 주요 20개 계열사)의 총매출은 390조원으로 정부 총수입 360조원을 넘어섰다. 한 기업의 매출이, 그 기업이 속한 국가의 수입과 예산을 넘어선 경우는 2006년 핀란드의 노키아가 유일했다. 두 번째로 삼성이 이름을 올린 것이다. 삼성은 이미 규모나 영향력에서 한 국가와 맞먹을 만한 힘을 갖췄다.

이병철 전 삼성 회장(가운데)이 생전에 보스턴 대학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 후 리셉션에 참석했다. 오른쪽에 3남 이건희 회장이 보인다. ⓒ 연합뉴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하는 ‘이재용 시대’는 삼성이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국제경영개발원(International Institute for Management Development·IMD)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기업 가운데 1세대에서 2세대로 넘어가는 데 성공하는 비율은 20%이고, 3세대까지 살아남는 기업은 7%뿐이다. IMD의 요아힘 시바스 교수는 지난 2001년 필자가 IMD를 방문했을 때 가족 기업들이 겪는 공통적인 문제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1세대는 창업자이기 때문에 모든 권한을 장악한다. 2세대는 승계자가 한 사람이라면 창업자와 비슷한 권위를 갖지만, 승계자가 여러 사람이라면 기업에 대한 통제권이 나뉘기 시작한다. 그렇더라도 2세대는 큰 테두리 안에서는 뭉친다. 하지만, 3세대는 다르다. 그들은 자유롭게 독립하기를 원하는 것이 지배적인 경향이다.”

이병철 부친과 이승만 대통령 친분 두터워

삼성의 창업자는 이병철 전 회장이다. 조부 이홍석은 시문에 능해 문산정(文山亭)이라는 서당을 세워 후학을 길렀다. 재물을 모으는 데도 소질이 있어 가산이 천석에 이르렀다. 이홍석은 외아들 이찬우를 낳았다. 이 전 회장의 아버지다. 이찬우 대에 이르러 집안은 풍년에는 2000석, 흉년이 들어도 1500석은 거둬들일 정도로 더 부유해졌다. 머슴만 30여 명에 달했다.

이찬우는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과 인연을 맺었다. 청년기에 서울로 상경해 독립협회 회원들과 행동을 함께했고, 기독교청년회에 출입하면서 이승만 박사를 알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였다. 이병철은 훗날 아버지와의 인연에 힘입어 대통령 이승만과 자주 만날 수 있게 된다. 이 대통령이 대구를 방문했을 때 이병철은 자신이 이찬우의 아들임을 밝혔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이 대통령은 “서울에 오게 되면 찾아오라”고 했다. 이듬해 이병철은 이화장으로 이 대통령을 찾아갔다. 약속된 만남이 아니었음에도 이 대통령은 이병철을 반갑게 맞아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이찬우-이승만의 인연이 이병철이 사업을 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힘이 되었던 것은 틀림없다.

진주 지수보통학교-서울 수송보통학교를 거쳐 중동중학교 3학년에 다니던 1926년 가을, 이병철은 아버지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너의 혼담이 이루어져, 12월5일(음력)에 혼례를 올리게 되었으니 귀가하라’는 내용이었다. 당시는 조혼(早婚)이 관행이었다. 19세이던 해의 겨울, 이병철은 경상북도 달성군 묘동에 사는 박기동의 넷째 딸 박두을과 결혼했다.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인 박두을은 이병철보다 세 살이 많았다. 재력도 이병철 집안보다 더 나았던 것 같다.

이병철의 맏아들 이맹희는 1993년 펴낸 자서전 <묻어둔 이야기>에서 어머니 박두을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친가 쪽도 이미 3000석지기에 가까울 정도의 부자였지만 외가 쪽의 지체가 높아서 ‘한쪽으로 기우는 혼사’였다는 말들이 있었다는 게 집안 어른들의 설명이었다. 어머니는 시집올 때 몸종을 비롯해 몇 명의 하인을 데리고 왔다고 한다.’

이병철은 박두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1986년 펴낸 자서전 <호암자전(湖巖自傳)> 내용이 참고가 될 것 같다. ‘처음 마주 본 인상은 건강한 여성이라는 것이었다. 유교를 숭상하는 가문에서 전통적인 부덕(婦德)을 배우고 성장해서 그런지, 바깥 활동은 되도록 삼가고 집안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해왔다. 예의범절에도 밝아 대소가(大小家)가 두루 화목하다. 지금까지 몸치장, 얼굴 치장 한번 제대로 해본 일이 없고 사치와는 거리가 멀다.’ 이병철의 자식은 10명인데 그 가운데 박두을과의 사이에 3남 4녀, 일본인 구라다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1녀는 혼외자로 입적했다. 이병철은 <호암자전>에서 자식이 4남 6녀라고 밝혔다.

이병철은 장녀 이인희(1928년생), 장남 이맹희(1931년생), 차남 이창희(1933년생), 차녀 이숙희(1935년생), 3녀 이순희(1940년생), 4녀 이덕희(1941년생), 3남 이건희(1942년생), 5녀 이명희(1943년생), 4남 이태휘(1953년생), 6녀 이혜자(1962년생)를 차례로 낳았다. 이 가운데 일본인 여성이 낳은 자식은 4남 이태휘와 6녀 이혜자다.

이들 가운데 4녀 이덕희는 혼외 자식으로 이병철의 호적에 입적되었다. 이맹희는 2014년 1월14일 서울 고등법원 민사14부(윤준 부장판사)에서 열린 삼성가 유산 상속 소송 결심 변론기일에 재판장에게 보낸 서신에서 ‘아버지는 우리 7남매에게 너무나 위대하면서도 어려운 분이었습니다’라고 썼다. ‘8남매’가 아니고 ‘7남매’라고 쓴 것이다. 법무법인의 소장에서도 상속 권한을 가진 자녀를 ‘7명’이라고 했다. 박두을이 유산의 27분의 6, 이창희·이건희·이순희 등 당시 미혼 남매는 27분의 4씩, 그리고 결혼한 이인희·이숙희·이명희 등은 27분의 1씩 상속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이덕희라는 이름은 없었다. 이덕희는 이병철이 대구에서 만난 박소저라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병철에게는 박두을·박소저·구라다라는 세 여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창희·이순희 등 연애결혼한 자식도 여럿

중매결혼도 있었지만 이병철의 자식들 가운데는 연애결혼을 한 경우도 여럿 있다. ‘재벌가’에서 연상되는 정략결혼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삼성가는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와 법무부장관을 지낸 홍진기 중앙일보 사장과 사돈을 맺은 것만으로도 재벌가, 정·관계 유력 가문과 바로 연결된다. 손자·손녀 대에 들어오면서 혼맥은 더욱 화려하고 깊어졌다.

장녀 이인희는 1948년 이화여대 가정과 3학년에 다니다가 학교를 중퇴하고 경북의 대지주였던 조범석의 막내아들 조운해와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 막후에는 박두을이 있었다. 박두을의 부탁을 받은 조카 박준규(전 국회의장)가 자신의 경북중학교 1년 후배인 조범석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이인희-조운해 부부는 조동혁·조동만·조동길·조옥형·조자형 5남매를 뒀다.

장남 이맹희는 1956년 농림부 양정국장, 경기도지사 등을 지낸 손영기의 장녀 손복남과 결혼했다. 이맹희는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이었는데 이병철의 연락을 받고 영문도 모른 채 귀국해 결혼식을 올렸다. 일찍부터 막역한 관계였던 손영기와 이병철은 이맹희가 네 살 때 이미 사돈을 맺기로 약속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맹희-손복남 부부는 이미경·이재현·이재환 등 2남 1녀를 낳았다. 2004년 7월에는 박 아무개씨의 아들 이재휘가 이맹희를 상대로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해 2006년 7월 부산지방법원으로부터 부자 관계를 인정받았다. 이어 박씨는 과거 양육비 상환 심판 청구 소송도 냈는데 이것도 승소했다.

이병철의 자식 가운데는 일본인 여성과 연애결혼을 한 이도 있다. 차남 이창희는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 시절에 만난 일본인 여성 나카네 히로미와 1963년 결혼했다. 집안의 반대가 심해 도쿄 데이코쿠 호텔에서 열린 결혼식에는 처가 쪽 식구들만 참석했다고 한다. 나카네 히로미는 1986년 한국 이름 이영자로 개명했는데 슬하에 이재관·이재찬·이재원·이혜진 등 3남 1녀를 뒀다. 이재찬은 지난 2010년 8월18일 투신자살했는데 빈소도 마련하지 않고 장례를 치렀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조카에 어울리지 않는 쓸쓸한 장례식이었다. 

이병철의 자녀 가운데 재벌가와 결혼한 이는 차녀 이숙희가 유일하다. 1956년 LG그룹 창업주 구인회의 셋째 아들인 구자학과 결혼했다. 이병철과 구인회는 보통학교 동창으로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당시 삼성과 LG가 사돈 관계를 맺는다는 것만으로도 세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구자학은 삼성에 입사해 호텔신라 사장 등을 지냈으나 이병철이 LG 영역이었던 전자에 진출하면서 LG로 돌아가 LG반도체 사장 등을 지냈다. 이숙희는 삼성과 LG가 이처럼 경쟁 관계로 들어간 탓에 훗날 이병철로부터 유산을 상속받지 못했다. 구본성·구미현·구명진·구지은 등 1남 3녀를 뒀다.

3녀 이순희도 이창희처럼 연애결혼을 했다. 1961년 이화여대를 졸업하던 해 김규와 결혼했다. 서울대를 나와 미국 시러큐스 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김규는 우연한 기회에 이순희의 공부를 돕다가 사랑에 빠졌다. 서강대 교수로 여러 권의 책을 펴낸 김규는 한국방송학회 초대 회장, 제일기획 고문 등을 지냈다. 이순희-김규 부부에게는 외아들 김상용이 있다. 김상용은 휴대전화 액세서리 회사인 애니모드와 이어폰 생산회사인 영보엔지니어링 대표를 맡고 있다. 두 업체는 삼성과 거래하고 있다.

이병철·이건희 회장이 귀빈을 모시는 장소로 사용하던 서울 한남동의 삼성그룹 영빈관 ‘승지원’. ⓒ 시사저널 임준선
이병철 사후 재산 분할 통해 그룹 분리

혼외 자식으로 이병철의 호적에 입적된 4녀 이덕희는 숙명여대 3학년 때 경남 의령의 대지주였던 이정재 집안의 아들 이종기와 결혼했다. 이종기는 중앙일보 사장, 삼성화재 회장 등을 지냈으나 2006년 10월, 일본의 한 호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부음은 그가 사장을 지낸 중앙일보에도 실리지 않았다. 유산을 상속받지 못했으나 그해 12월 이씨가 보유하고 있던 5300억원에 달하는 삼성생명 지분 4.7%가 삼성생명공익재단으로 넘어가 이병철의 차명 재산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덕희-이종기 부부는 2남 1녀를 뒀다. 둘째 아들은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아들 이권수, 딸 이유정이 있다.

3남 이건희는 법무부장관과 내무부장관을 지낸 홍진기의 장녀 홍라희와 1967년 결혼했다. 이재용·이부진·이서현, 지난 2005년 자살한 이윤형 등 1남 3녀를 뒀다. 5녀 이명희는 이화여대 미대를 졸업하고 이건희와 같은 해에 정재은과 결혼했는데 슬하에 정용진·정유경 남매가 있다.

4남 이태휘는 이병철과 일본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게이오 대학을 나와 삼성 비서실에서 이사, 제일제당 상무로 근무하다가 현재 일본 여성과 결혼해 일본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6녀 이혜자는 이태휘와 남매다. 일본인과 결혼해 일본에 살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것이 없다.

삼성그룹은 이병철 사후 재산 분할을 통해 분리돼 범삼성가로 확대됐다. 장녀 이인희는 한솔그룹, 장남인 이맹희의 장자 이재현은 CJ그룹, 차남인 이창희는 새한그룹, 3남 이건희는 삼성그룹, 5녀 이명희는 신세계그룹을 이끌게 된다. 후계를 정하는 과정에서 이병철의 눈 밖에 난 장남 이맹희는 재산 분할에서 소외되지만 부인 손복남이 이병철로부터 유산을 받아 아들 이재현의 CJ그룹으로 이어진다. 제일제당·제일제당건설·제일씨앤씨·제일냉동식품·제일선물 등이 1993년 삼성그룹에서 분리돼 1996년 제일제당그룹이 됐다. 제일제당그룹은 2002년 회사 이름을 CJ그룹으로 바꿨다. 새한그룹은 이창희가 1991년 백혈병으로 사망한 이후 경영에 어려움을 겪다가 삼성 계열사 가운데 유일하게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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