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11. "명나라 군대 주둔은 절대 불가하옵니다"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4.11.06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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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에 맞서 끝까지 반대한 류성룡…전작권 반환 재연기 논란 데자뷰

지난 7월 말 필자는 열흘간의 일정으로 북만주 답사를 다녀왔다. 북만주 치치하얼(齊齊哈爾) 북쪽의 묵이근(墨爾根)에 옛날 묵이근성이 있었다. 묵이근 고도역참(古道驛站) 박물관이 있는데, 북만주 지역의 옛 도로와 역참 등에 관한 자료를 모아놓은 곳이다. 역참이란 교통·운수·통신 기관을 뜻한다. 그런데 그 전시물 중 하나가 아극살(雅克薩) 전투여서 필자의 눈길을 끌었다. 아극살 전투란 청나라와 제정(帝政) 러시아가 맞붙은 전투인데, 러시아에 빼앗겼던 강역을 청나라 장수 살포소(薩布素)가 되찾았다고 써놓고 있었다. 아극살 전투는 1649~1689년에 벌어진 전투로서 조선 효종 재위(1649~1659년) 때와 겹친다. 효종 때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를 정벌했던 나선정벌(羅禪征伐)과 직접 연관이 있기에 필자의 시선이 간 것이다.

이 무렵 러시아인들이 흑룡강 주변에 나타나면서 긴장이 높아졌는데, 그들이 이곳까지 진출한 이유는 모피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이번 답사에서도 이런 정황을 엿볼 수 있었다. 북쪽으로는 거의 중국 국경 끝 부근에 있는 악륜춘(鄂倫春·어룬춘) 자치기(自治旗)까지 올라갔다 왔는데, 알타이어를 쓰는 동이족의 한 갈래인 악륜춘족은 만주에서 거의 최후까지 수렵과 유목 생활을 하던 민족이란 점에서 이 지역과 모피의 연관성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선조가 류성룡의 집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드라마 의 한 장면. ⓒ KBS 제공
조선군, 두 차례 나선정벌 나서 모두 승리

17세기 중반, 여러 러시아 원정대가 흑룡강까지 진출했다. 그중 하바로프(E. Khavarov)는 흑룡강 우안(右岸)에 알바진(Albazin) 성(城)까지 쌓고 군사기지로 삼았다.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에 맞서 청나라는 1652년 지금의 북만주 영안(寧安) 지역인 영고탑(寧古塔)에 군사를 주둔시켜 막게 했으나, 러시아군과 맞붙어 연속 패배했다. 그러자 1653년에는 사이호달(沙爾虎達)을 영고탑 지방 앙방장경(昻邦章京·후에 장군(將軍)으로 개칭)으로 삼으면서 이듬해 조선에도 원병(援兵)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조선도 청·러 분쟁에 끌려들어가게 된 것이다.

효종 5년(1654년) 2월 초 서울에 들어온 청나라 사신 한거원(韓巨源)은 효종에게 나선정벌에 나서달라고 요청했다. 효종은 “나선(羅禪)이란 어떤 나라인가”라고 물었다. 나선은 러시아의 음역(音譯)인데, 한거원은 “영고탑 곁에 별종이 있는데, 이것이 나선입니다”라고 답했다. 조선은 병자조약에 의해 청나라의 요청을 거부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두 차례에 걸쳐 군사를 파견했다. 이것이 1·2차 나선정벌인데, 1654년의 1차 나선정벌은 함경북우후(北虞侯) 변급(邊?)이, 1658년의 2차 나선정벌은 함북병마우후 신류(申瀏)가 이끌었다.

1차 나선정벌군은 조총군 100명 등 150명의 군사가 3월26일 두만강을 건너 흑룡강 유역에서 러시아군과 싸운 것이었다. 변급은 러시아의 전선(戰船)을 목도한 후 정면으로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는 판단에 ‘유붕(柳棚·통버드나무로 만든 방패)’을 만들어 땅에 세우고, 이를 방패 삼아 러시아 함선에 집중 사격을 가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조선군은 조총 명중률이 상당히 높았기에 러시아군을 격퇴하고 6월13일 영고탑으로 돌아와 21일 무사히 두만강을 넘어 귀국할 수 있었다. 84일간의 일정이었다. 1차 나선정벌 이후 러시아군들은 ‘머리 큰 사람(大頭人)이 두렵다’고 했을 정도인데, 이는 전립(戰笠·벙거지)을 쓴 조선 소총부대의 위력에 놀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선군이 빠진 청나라군은 다시 러시아에 대패했고, 청나라는 1658년 다시 조선군의 출병을 요구했다.

제2차 나선정벌은 신류가 조총수 200명을 비롯한 26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5월2일 두만강을 건너 9일 영고탑에 도착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조청(朝淸) 연합군은 6월10일 흑룡강과 송화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러시아 스테파노프 함대와 만나 격전을 벌였다. 조선군 사령관 신류는 전선(戰線)일기인 <북정일기(北征日記)>를 남겼는데, 조선의 모든 군사가 “일시에 쳐들어가 활과 총포를 무수히 쏘았는데, 적병들이 숨 돌릴 겨를 없이 총탄과 화살이 빗발치듯 떨어지니 배 위에서 총을 쏘던 적병들은 드디어 지탱할 수가 없어서 모두 배 속으로 들어가 숨기도 하고 혹은 배를 버리고 강가의 풀숲으로 도망치기도 했다”(<북정일기> 6월10일자)고 전하고 있다.

명나라, 조선에 상주 관청과 군사 주둔 계획

이처럼 전투는 조선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이때까지 조선군은 사상자도 없었다. 그러나 조청 양군이 러시아의 전선에 쇠갈고리를 던져 끌어당긴 후 불을 지르려는 찰나에 재물에 욕심이 생긴 청군 사령관 사이호달이 “불태우지 말라”는 긴급 명령을 내리면서 사태는 이상하게 흘러갔다. 조청 양군이 주춤하는 사이 풀숲에 잠복해 있던 러시아군이 사격을 가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신류는 “여세를 몰아 일시에 적선들을 불태웠다면 적병 중에 살아남은 자는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 또한 손실이 없었을 터”(<북정일기> 6월10일자)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작전 지휘권은 사이호달에게 있었기 때문에 따르지 않을 수도 없어서 조선군은 8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하는 피해를 입었다. 청군은 120여 명이 전사하고, 200여 명이 부상당했다.

사이호달은 노획한 러시아 전선 한 척을 내주면서 전사한 조선군을 화장(火葬)하라고 했으나, 신류는 조선 풍습에 화장하는 법은 없다면서 “만리이역(萬里異域)에서 죽어간 그들의 시체를 본국으로 실어갈 수 없을진대 부득이 본국의 법식대로 매장하겠다”고 주장했다. 신류는 <북정일기>에서 흑룡강가의 약간 높은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전사자들을 동향(同鄕)끼리 갈라 묻어 주었다. <북정일기>에는 ‘길주 사람 윤계인·김대충, 부령 사람 김사림, 회령 사람 정계룡, 종성 사람 배명장·유복, 온성 사람 이응생·이충인’이라고 적혀 있는데, 신류는 “아아! 멀리 이국땅에 와서 모랫벌 속에 묻힌 몸이 되었으니 참으로 측은한 마음 이를 데가 없구나”라고 애도했다. 사이호달은 러시아의 재침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이듬해(1659년) 봄까지 주둔하면서 지키라고 요구했으나, 신류가 그 불가함을 조목조목 설명하며 반박한 끝에 11월18일 영고탑을 떠나 12월12일 회령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선조 30년(1597년)에는 명나라가 평안도에 둔전(屯田)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오면서 조정에 큰 논란이 일었다. 명나라에서 조선 땅에 상주 관청과 군사를 주둔시키겠다는 계획이었다. 자국 땅에 외국군이 주둔하겠다는 것에 대해 선조는 “명나라 군의 둔전은 부득이한 것으로서 우리나라를 위한 것이 아닌 것이 없으니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선조실록> 30년 3월15일)라고 받아들이려고 했다. 선조는 “내 생각에 명나라와 우리나라는 한 집안이 되었으니 허락해도 좋을 듯하다”며 “적(賊·일본)이 이 사실을 듣는다면 명군(明軍)이 오래 머무를 계획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반드시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당시 명군은 횡포가 심하기로 유명했다. 이런 우려에 대해 선조는 “혹 폐를 끼칠 염려가 있지만, 오호라, 나라가 지탱하지 못할 지경인데 어찌 그에 대한 폐단을 말하겠는가?”(<선조실록> 30년 3월15일)라고 합리화했다.

선조는 임진왜란 초기 삼도순변사 신립(申砬)이 탄금대에서 패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일본군이 도성에 그림자도 보이기 전에 부랴부랴 서울을 버리고 도망간 용렬한 군주였다. 선조는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도망가는 ‘요동내부책(遼東內附策)’을 수립하고 조선을 버리려고 했다가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이 “안 됩니다. 대가(大駕·임금의 가마)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선조수정실록> 25년 5월1일)라고 강력하게 반발하는 바람에 무산되기도 했다. 선조는 “명나라가 어찌 이로 인해서 우리나라를 취할 리가 있겠는가”라고 낙관하면서 둔전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자 류성룡이 다시 나서 “그 일은 해로운 점이 있습니다”라고 반대했다. “명나라 관원이 나와서 모든 일을 일체 관찰사처럼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한다면 우리나라는 다시 손을 댈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나오는 자가 반드시 다 선한 사람일 수는 없을 것이니 마침내 견뎌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 경우 다시 철거를 청하려 해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선조실록> 30년 4월13일)

그러나 선조는 계속 “비록 폐단이 있다 하더라도 적이 오는 걱정에 비교한다면 차이가 있을 것이다”라면서 명군의 국내 주둔을 밀어붙일 기세였다. 영돈녕부사 이산해(李山海)도 “둔전을 많이 설치한다면 반드시 견디기 어렵겠지만, 한 관원을 내어 둔전을 한다면 혹 가능하겠습니다”라고 선조에게 가세했다. 이때 류성룡이 “과거 원(元)나라가 창원(昌原)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하였는데, 오래 머무르며 폐를 끼쳐서 마침내 견뎌낼 수가 없었습니다”(<선조실록> 30년 4월13일)라고 끝까지 반대해 저지시켰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후 조선을 구해줬다는 명목으로 전과는 달리 왕위 계승 문제까지 직접 관여하는 등 조선을 지배하려는 뜻을 노골화했다. 만약 이때 선조의 뜻대로 평안도에 명나라 군대를 주둔시켰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최악의 경우 명나라에서 조선을 합병하겠다고 나올 수도 있었다.

신류의
“무인은 거칠망정 나약해서는 안 돼”

지금 미국과의 전시작전통제권 반환 재연기를 둘러싼 논란을 보면, 조선 임금 선조가 생각난다. 2011년 기준으로 한국의 국방비는 308억 달러로, 북한의 9억2000만 달러보다 33.4배나 많다. 현대전은 경제전인데 경제력에서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전작권 반환을 사실상 무기 연기했으니 사생관이 뚜렷해야 할 ‘군인정신’이 있기나 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북벌군주 효종은 쓸 만한 군인이 없는 것을 한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밭갈이는 마땅히 남자종에게 묻고 길쌈은 여자종에게 물어야 한다’고 했다…(중략)…문(文)이라고 이름했으면 글을 읽고 학문을 강론하는 것이고, 무(武)라고 이름했으면 병법을 익히면 되는 것이다. 무인을 등용하는 도는 차라리 거칠고 사나운 것이 지나칠망정 나약하고 옹졸해서는 안 되는데 지금 비국(備局·비변사)의 낭청(郞廳·실무자)을 뽑을 때 지혜도 있고 힘도 있는 자를 뽑지 않고, 단지 글자나 알고 영리한 자를 뽑다 보니 모두 서생(書生)들뿐이다. 급한 상황에서 적을 상대할 때 서생을 쓸 수 있겠는가. 이것이 우리나라 풍습이 추구하는 큰 병폐다.”(<효종실록> 3년 5월15일) 외국으로 하여금 계속 우리를 지휘해달라고 부탁하는 영리한 군인들을 꾸짖는 오늘의 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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