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의 뚝심, 아버지 빼닮았다
  • 조유빈 기자 (you@sisapress.com)
  • 승인 2014.09.24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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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짜리 한전 부지 10조5000억 베팅 정주영의 ‘불도저’ 추진력 연상

9월18일 오전 10시40분. 삼성전자와 현대차그룹 등이 응찰한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공사 부지 입찰 결과가 공개됐다. 10조5500억원을 제시한 현대차그룹 컨소시엄(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이 낙찰자로 선정됐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8월29일 한전의 매각 공고가 나온 직후부터 한전 부지 인수 의욕을 강하게 드러냈다. 10조5500억원이란 금액은 가히 충격적이다. 감정가인 3조3300억원의 3배가량을 베팅한 것이다. 현대차그룹은 2006년에도 서울 성수동 뚝섬에 신사옥 건립을 추진했지만 서울시 규제에 발목이 잡혀 무산된 적이 있다. 결국 삼성에 비해 한전 부지가 절실했던 현대차가 승리를 거머쥐었다.

한전 부지를 현대차그룹이 인수하면서 정몽구 회장(76)의 4대 숙원 중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다. 정 회장의 4대 숙원은 △글로벌 톱5 진입 △현대건설 인수 △일관제철소 준공 △통합 사옥 건립이었다. 마지막 숙원을 이루기 위한 ‘한전 부지 베팅’이 성공하면서 정 회장의 뚝심 경영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1985년 충남 서산 간척지 현장을 찾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 ⓒ 연합뉴스2008년 현대차 울산공장 생산 현장을 둘러보고 있는 정몽구 회장. ⓒ 현대자동차 제공
기아차 인수 당시에도 과감한 투자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의 ‘머니게임’은 이번이 두 번째다. 두 그룹은 1998년 기아자동차 인수 당시에도 자존심을 걸고 맞붙었다. 유찰로 인해 3차까지 진행된 입찰에서 결국 현대차가 폭죽을 터뜨렸다. 현대차그룹은 기아자동차의 총부채 7조4000억원을 떠안으며 1조1781억원을 인수 비용으로 썼다. 현대차 측은 “정몽구 회장의 결단에 따른 결과”라고 밝혔다. 1, 2차 유찰 이후 정 회장이 적극적으로 기아차 인수 의지를 보였고, 그것이 ‘통큰 베팅’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법정관리까지 갔던 기아차는 현대차그룹에 인수된 후 1년 만에 흑자로 전환했다.

정몽구 회장의 뚝심은 1999년 현대차가 미국 시장을 공략했을 때도 빛을 발했다. ‘10년간 10만 마일 무상보증 서비스’를 내걸고 엔진과 핵심 부품 등을 무상으로 보증해주기로 했다. 일각에서는 ‘현대차가 무리수를 둔다’며 부정적인 시선을 보였지만 이는 현대차의 미국 시장 점유율을 상승시키는 계기가 됐다. 2006년에는 충남 당진의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건설에 들어갔다. ‘철강산업 침체기에 무리한 투자가 아니냐’ ‘포스코와 경쟁해 얻을 것이 있겠느냐’는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총 9조9000억원을 투입했다. 2010년 5조원을 들여 인수한 현대건설 역시 지금은 현대의 주력 계열사가 됐다. “자동차-제철-건설이라는 3대 핵심 성장 축을 완성하겠다”며 과감히 투자한 결과다.

정주영, 500원 지폐로 유조선 두 척 팔아

정 회장의 경영 철학은 품질경영, 현장경영, 뚝심경영 세 가지다. 정 회장은 일찌감치 현대자동차서비스(1974년)와 현대정공(1977년)을 설립하면서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경영 스타일만큼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을 빼닮았다. 안 될 것이라고 주변에서 만류하는 일들을 밀어붙이는 스타일이 그렇다. 이번 한전 부지 입찰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정도로 입이 떡 벌어지는 입찰가를 내놓은 것도 무모할 정도로 과감했던 정주영 명예회장의 추진력을 떠올리게 한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불도저 경영’과 관련한 일화는 숱하게 많다. 

1971년 조선소 건립을 추진한 정 명예회장은 외국 자본 유치를 위해 영국의 바클레이 은행을 방문했다. 은행장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거북선이 그려져 있는 당시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보여주며 “한국은 영국이 배를 만들 때 세계 최초로 철갑선인 거북선을 만든 나라”라며 신용을 얻었다. “누군가 당신이 만든 배를 산다는 내용의 계약서가 있다면 돈을 빌려주겠다”는 대답에 그리스 최대 해운업자인 리바노스와 독대했다. 리바노스는 “배를 만들 조선소가 있느냐”고 물었고 정 명예회장은 울산 미포만 백사장 사진을 보여주며 “여기가 조선소 부지”라고 대답했다. 정 명예회장을 믿은 리바노스는 30만톤 유조선 2척을 사기로 계약했다.

1973년 석유 파동 이후 조선과 건설업에 타격을 입은 정 명예회장은 문제의 근원지인 중동으로 날아갔다. 베트남 메콩 강 준설 공사, 태국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 등에서 위기를 겪었던 터라 회사 내부에서도 중동 진출을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모래와 자갈이 널려 있는 중동이 건설 공사 하기에 제일 좋은 곳”이라며 중동 건설 시장에 진출했고,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 수주에 성공해 9억30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정주영 식 유조선 공법’은 서산 간척지 사업 때 나온 것이다. 1979년 공사 당시 빠른 유속에 돌이 쓸려가 공사 진행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정 명예회장은 20만톤짜리 폐유조선을 끌어와 서산 앞바다에 가라앉혀 물살을 막을 것을 제안했다. 검증된 기술이 아니라는 이유로 전문 기술진은 주저했지만 그는 밀어붙였다. 물막이 공사는 이틀 만에 마무리됐고, 공사비는 290억원 절감됐다. 당시 간척 사업으로 만들어진 농지는 3000만평이 넘었다. 여의도 면적의 33배에 달하는 규모였다.

정 명예회장의 고집을 꺾을 이는 없었다. 1984년 당시 일본의 미쓰비시자동차 측에서 엔진의 자체 개발을 위해 만든 용인 마북리 엔진연구소를 폐쇄하면 로열티를 절반으로 깎아주겠다며 독자 개발을 중단할 것을 압박했다. 그러나 정 명예회장은 이를 거부하고 엔진 개발에 나섰다. 그 결과 알파엔진 개발에 성공했다. 그 전까지 로열티를 주고 엔진 기술을 사왔지만 2004년에 개발한 세타엔진을 로열티를 받고 역수출했다. 자동차에 대한 열정은 정몽구 회장이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현대정공을 통해 1991년부터 생산한 갤로퍼는 출시 5개월 만에 국내 4륜구동 분야 최대 히트 상품으로 부상해 ‘갤로퍼 신화’를 낳았다. 이후 정 회장은 현대차그룹을 글로벌 톱5에 올려놓았다. 한전 부지 매입을 통해 현대차그룹 100년의 역사를 쓰겠다는 정몽구 회장이 다음엔 어떤 베팅을 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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