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따윈 관심도 두지 않는다”
  • 이영종│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4.08.28 11:1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프란치스코 방한에 거친 반응…김정은 체제 북한 종교 실태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 일정을 시작한 다음 날인 8월15일 오전.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전날 단행된 로켓 발사에 대한 남한 내 비판 여론을 반박하는 보도를 냈다. 공교롭게도 교황의 서울 도착 시간에 맞춰 북한군이 로켓을 쏜 것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진 데 따른 것이다. 중앙통신은 “남조선 괴뢰들이 우리의 전술로켓탄 발사를 걸고 헐뜯어대는데 환장이 되다 못해 그 무슨 로마 교황이 남조선 행각과 연계시키는 해괴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고 비방했다. 통신은 “로마 교황이 하필이면 일 년 열두 달 소털같이 많은 날들 중에 굳이 골라 골라 우리의 정상적 계획에 따라 진행된 로켓 발사 날에 남조선 행각길에 올랐는가”라는 주장도 내놓았다. 그러면서 “그(교황)가 무슨 목적으로 남조선을 행각하며 괴뢰들과 마주 앉아 어떤 문제를 모의하려고 하는지 알지 못하고, 관심도 두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이한 것은 북한이 이런 입장을 관련 당국의 논평 등이 아닌 한 개인을 내세워 밝혔다는 점이다. 핵과 로켓 연구를 담당하는 북한 제2자연과학원 로켓탄연구실 김인용 실장이란 인물이다. 북한은 4박 5일간의 교황 방한 일정에 대해 이 보도 외에 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공식 입장을 내는 데 부담을 느끼고 개인 명의로 비난하는 모양새를 취한 것이다.

지난 2월27일 한국인 침례교 선교사인 김정욱씨가 평양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지난해 10월 북한에서 지하 교회를 세우려 한 혐의로 체포됐다. 반국가 범죄에 대해 북한 당국에 사과하며 선처해주길 바란다”고 밝히고 있다. ⓒ Xinhua
종교 탄압으로 북한 주민 사이에 미신 성행

북한으로서는 교황 방한에 쏠린 세계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국내 정착 탈북자를 만나는 등의 일정이 짜였다는 점에서 촉각을 곤두세웠을 게 분명하다. 무엇보다 북한의 종교 탄압 문제나 인권 실태에 대해 교황이 직격탄을 날릴 경우 타격이 적지 않을 것이란 점에서다.

하지만 교황은 방한 기간 동안 북한 문제에 직접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그저 같은 언어를 쓰는 남북한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함으로써 통일을 이룰 것이란 화두를 던지는 선에서 그쳤다. 이를 두고 국내 일각에서는 교황의 방한 행보에 실망스럽다는 반응을 드러내기도 했다. 정부 소식통은 “교황청 측과의 방한 일정·메시지 협의를 앞두고 우리 측 전략을 짜는 과정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북한 사안 두 가지 모두를 얻어내기 힘들다는 판단이 내려졌다”고 귀띔했다. 광복 69주년에 즈음한 교황 방문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에 무게를 실으려 북한 인권 문제 등은 사실상 포기한 것이란 설명이다. 국제사회에서 이미지가 더 실추되는 성가신 일이 벌어질까 가슴 졸였을 북한으로선 안도할 만한 일이다.

사실 김일성 정권 수립 이전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정도로 기독교가 번창했다. 김일성 주석 집안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평양 만경대 구역의 이전 지명인 평남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골마을에 있던 하리교회 장로였다고 한다. 그의 둘째 딸이자 김일성의 생모인 강반석은 이 교회 집사였다.

6·25 때 파괴된 하리교회는 1989년 김일성이 광복거리 건설현장에 나왔다가 “다시 교회를 세우라”고 지시함에 따라 1992년 칠골교회로 거듭났다. 박정희 정권 때 외무부장관을 지낸 월북자 최덕신을 만난 자리에서 김일성이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교회 다니던 일이 떠오른다”고 회상한 뒤 결정했다는 후문이다. 이 교회가 반석교회로도 불린 것 또한 김일성의 생모와 관련이 있다고 탈북 인사들은 전하고 있다.

광복 직후 북한 주민 916만명 중 22.2%인 200여 만명이 종교를 갖고 있었다는 게 북한 공식 자료인 조선중앙연감 1950년판의 집계다. 하지만 북한 정권 수립 이후 김일성은 “종교는 아편”(1972년 발행 김일성저작선집)이라며 지속적인 탄압정책을 폈다. 김일성은 1962년 사회안전성(우리의 경찰청에 해당) 연설에서 “종교인들을 함께 데리고 공산주의로 갈 수 없다. 기독교·천주교 집사 이상 간부들을 모두 재판에서 처단해버렸고, 그 밖의 종교인들 중에도 악질들은 모두 재판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북한은 1970년대 남북 대화가 시작되자 선전 차원의 종교 조직을 만들었다. 1972년 개정헌법에서 ‘신앙의 자유’를 명시하면서도 “반종교 선전의 자유를 가진다”고 밝혀 대외 선전과 대내 탄압에 모두 써먹을 수 있는 기반을 갖추기도 했다.

남북 교류가 활성화된 2000년대 들어서는 종교 교류를 내세운 대북 지원 확보 등에 종교가 활용됐다. 또 미국 등 서방 국가에 ‘종교의 자유’를 선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회와 신도를 동원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미국 국무부나 국제 인권단체들은 북한을 세계 최악의 종교 탄압과 인권 유린 국가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북한 당국은 특히 성경을 서방 제국주의의 사상문화적 침투의 핵심 수단으로 간주해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다. 2005년 7월 발간된 강연 자료 ‘우리 내부에 종교를 퍼뜨리려는 적들의 음흉한 모략 책동을 단호히 짓부시자’에서 북한은 기독교 등 종교를 북한 체제 전복 실현의 수단으로 규정했다. 북한인권백서(2014년판)는 탈북자 증언을 인용해 “어느 도(지역)의 지하 종교인들이 약 2000명 된다”고 전하고 있다.

북한이 교황 방한일인 8월14일 감행한 단거리 발사체 발사는 김정은 위원장의 참관하에 이뤄졌다. ⓒ 조선중앙통신 2013년 7월25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북한의 종교 박해 실태 고발’ 기자회견장에 전시된 그림. ⓒ 연합뉴스
종교 탄압은 북한 주민들 사이에 미신이 성행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어느 집에 가면 점을 잘 봐준다’는 말이 돌고, 평양에 등장한 식당에 한자로 복(福)자가 새겨진 문양의 조명등이 등장하기도 했다는 게 우리 정보 당국이 파악한 내용이다. 단속을 해야 할 보위부 고위 간부들이 승진 등과 관련해 점을 보고, 적발된 사람들을 뇌물을 받고 풀어주는 경우도 있다는 얘기다. 2012년 개정된 형법은 ‘돈 또는 물건을 받고 미신행위를 한 자는 1년 이하의 노동단련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김정은 정권에서도 종교 빌미 인질 정치 지속

집권 3년 차에 접어든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종교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는 아직 공개된 바 없다. 하지만 10대 시절 스위스 조기 유학은 물론 인터넷 서핑 등을 통해 지금도 해외 동향에 밝은 편일 것이란 점에서 기독교 등 종교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갖고 있으리란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정은 정권 등장 이후 그가 참석한 송년 행사 등에 크리스마스 분위기의 장식물이나 인형 등이 등장하고 있는 점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렇지만 북한은 대북 지원 활동을 해오던 김정욱 선교사를 지난해 10월 간첩 혐의로 체포해 현재까지 장기 억류 중이다. 김정은 정권 들어서도 기독교 등 종교를 빌미로 한 인질 정치를 지속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북한이 교황 방한 등을 계기로 주민들 사이에 종교 침습 현상을 적발하기 위한 활동을 강화했다는 게 탈북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교황 방한에 대해 ‘행각’ ‘모의’ 등의 표현을 써가며 거친 반응을 보인 것도 북한으로선 당연한 수순일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의 이런 퇴행적 모습이 우리 국민의 대북 비판 여론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란 지적도 설득력을 얻는다. 세월호 참사 등으로 지친 대한민국을 위로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비난의 칼끝을 겨눈 건 자충수란 얘기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