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교수의 자조 “난 OO대학 영업부장”
  • 김윤태│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
  • 승인 2014.08.20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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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기업’ 직원으로 전락한 교수…연구 성과 압박에 ‘교육’은 뒷전

“올해 우리 몇 등이야?” 해마다 주요 대학 평가 결과가 나올 때쯤이면 대학사회가 술렁인다.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대학 순위는 모든 사람의 관심을 사로잡는다. 1990년대 후반 대학 평가가 시작된 이래 대학사회가 크게 달라졌다. 국제학술지 출간이 강조되는 성과주의, 영어 강의와 연구 과제 수주 압력으로 인해 대학 고유의 가치와 기능이 위협받고 있다.

대학 평가에 순응하며 논문 양산에 몰두하는 교수가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대학은 수업을 시간강사와 강의 전담 교수 같은 비정규직 교원에게 떠넘긴다. 대학 평가가 부각될수록 사회에 참여하는 비판적 지식인의 모습은 조용히 사라진다. 대규모 불평등과 빈곤의 문제가 커져도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교수는 비난의 대상이 되고, 시국선언 서명 교수의 명단은 그저 신문 한구석을 차지할 뿐이다. 대학은 취업센터로 간주되고, 대학생은 대학 서열을 쫓아 등록금을 지불하는 소비자가 되기를 강요받는다. 이는 대학이 스스로 기업식 경영 기법을 도입한 결과이지만, 기업의 지배를 받는 사회는 대학에 서서히 사회적 죽음을 강요하고 있다.

대학 평가는 교수들의 연구 성과를 끊임없이 압박한다. 연구에만 치중해 학생 지도나 강의에 소홀해지는 일이 나타나고 있다. ⓒ 연합뉴스
교육자 자질보다 ‘해외 논문 실적’ 우선

한국에서 영국 ‘타임스-QS세계대학평가’와 중국 상하이 자오퉁 대학의 세계 대학 순위가 화제가 된 지 오래다. 중앙일보 대학 평가 등 국내의 대학 평가 역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교육 평가는 교수당 학생 수, 장학금 지급률, 도서 구입비, 납입금 비중, 학생 충원률, 기부금 등을 중시한다. 교수 평가는 출간논문 수, 연구비 수주, 지적재산권 등록을 점수로 매긴다. 대학생 사회 진출 평가는 사법고시·행정고시·공인회계사 합격자 수까지 계산한다. 문제는 평가 기준이 학문의 논리보다 기업의 논리를 따른다는 점이다.

오늘날 대학 총장은 얼마나 외부 기금을 많이 모을 수 있는지에 따라 평가된다. 총장의 학문적 수준, 도덕성, 교육 철학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교수 임용에서도 교육자의 자질보다 국제학술지 게재 논문 실적이 우선이다. 세계적인 연구 업적을 가진 석학을 초빙하면서 더 많은 연구를 위해 강의를 줄이거나 아예 면제해주기도 한다.

교수들은 끊임없이 연구 업적 압력에 시달린다. 학생 지도나 면담은 뒷전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특히 연구 업적 경쟁이 치열한 ‘연구중심대학’에서 교수와 학생의 만남은 점점 어려워진다. 전공 지도, 학생 지도, 멘토링 프로그램 등이 도입되지만 형식을 유지하기에 급급하다. 개인이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다른 사람의 존재 방식과 문화 양식을 이해하고, 개인 문제를 공적 문제와 연계해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은 사라지거나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이제 교수는 거대한 ‘대학 기업’의 직원이 되고 있다. 대학은 기업식 경영 논리를 도입해 ‘목표관리제’를 운영한다. 학과별로 논문 출간, 연구비 수주, 학생 취업률을 주요 성과 목표로 설정한다. 교수는 교육자라기보다 논문 제조자, 프로젝트 관리자에 가까워지고 있다. 교수들 간의 관계도 학문적 공동체의 동료가 아니라 무미건조한 회의에서나 얼굴을 마주치는 타인에 가깝게 변화하고 있다.

학문 소통, 융·복합이 새로운 관심을 끌지만 대학사회에서 타인의 연구에 관심을 가질 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자신의 연구 분야에서 수없이 많은 학술지와 논문이 쏟아져 나와도 모두 읽기 힘든 판국이다. 결국 대학 교수의 연구는 파편화되고, 개인화되고, 일반 대중은 아무도 읽지 않는 학술지의 세계에 갇혀 있다. 학자가 전문적 지식 탐구와 함께 학생의 교양 교육을 이끌고, 대중과 소통하고, 사회적 발언을 하는 행동을 미덕으로 간주하는 시대는 사라졌다. 

최근 교육부는 대학을 절대평가를 통해 5등급으로 분류한 뒤, 차등적으로 정원을 감축해나가겠다는 내용의 ‘대학 구조 개혁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정부는 교수 충원 비율을 교육 부문의 주요 지표로 평가한다. 그러자 많은 대학에서 교수 충원 비율을 올리기 위해 비정규직 교수를 더 채용한다. 심지어 정규직 교수보다 강의 전담 교수, 초빙교수, 산학 협력 교수 등 애매모호한 명칭의 비정규직 교수가 더 많은 황당한 현상이 발생한다. 정규직 교수의 60% 연봉을 받으면서도 강의 시간은 훨씬 많은 비정규직 교수가 증가하면서 대학 교원사회는 두 개의 계급으로 분열하고 있다.

기계적인 평가가 대학의 자유 질식시켜

2010년 3월 고려대에 나붙은 한 대자보가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제목의 대자보는 당시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 학생이 썼다. 끊임없는 경쟁만 조장하며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의 하청업체로 전락한 대학과 사회의 현실을 비판하며 대학을 그만두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대학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대학의 기업화는 가속화됐다.

올해 5월 중앙대 철학과 김창인 학생은 대자보를 통해 자퇴를 선언하며 “대학은 기업이 아니고 나 또한 상품이 아니다. 난 결코 그들이 원하는 인간형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저항을 해보려 한다”고 밝혔다. 그의 자퇴 선언문은 하루 만에 철거됐다. 중앙대를 인수한 두산그룹 박용성 회장은 “대학도 산업”이라고 말했다. 정권을 비판한 교수는 해임되고, 총장을 비판한 교지는 수거되고, 모든 학생이 회계학을 수강해야 하고, 성공한 명사의 특강을 의무적으로 들어야 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교양과목은 축소되고, 이수 학점은 줄었고, 이른바 ‘비인기 학과’는 ‘구조조정’을 당했다. 필자가 아는 어느 대학 교수는 자신을 “??대학 영업부장”이라고 씁쓸하게 말했다. 건물이 늘어나고 강의실이 늘어났지만, 진정 대학이 무엇을 하는 공간인지 묻는 질문은 거부당한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대학이란 사고하고, 질문을 던지고, 권위에 저항하고, 권위를 책임 있는 것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자치권을 행사하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무자비한 경제지상주의와 기계적인 대학 평가는 대학의 자유를 질식시키고 있다. 기업에서는 인문학 특강 열풍이 일고 있는데, 정작 대학에서는 인문학적 사유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공익을 대표했던 대학의 역사적 유산은 개인의 취업과 성공으로 대체됐다. 학문의 자유와 사회에 대한 봉사는 경제적 안정과 성취 동기를 강조하는 물질주의 속에서 거의 사라져버렸다.

대학은 사회 문제를 도덕적으로 비판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권력과 제도를 만들도록 학생을 교육할 책임이 있다. 아무리 공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가 빛이 바랬다 해도, 쓰레기통에 던져버려야 할 것은 아니다. 오늘날 대학은 사회에서 공적 이익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보루 가운데 하나다. 진리 탐구와 학습을 통해 공적 가치와 민주주의의 전망을 키우는 교육이 무너진다면 우리 사회의 희망은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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