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피아’ 몰아낸 자리 ‘학피아’가 먹었다
  • 엄민우 기자 (mw@sisapress.com)
  • 승인 2014.08.20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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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모교 서강대 출신 인사 조용히 약진

해외 펀드나 국내 금융지주에 인수되기를 희망하던 한 대기업 계열사는 제대로 매각이 이뤄질 수 있을지 전전긍긍했다. 이 회사를 인수하려는 곳들은 금융 당국으로부터 주주 자격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이 과정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었다. 회사 내부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돌았다. “사장이 서강대 출신인데 뭘 걱정해. 다른 건 몰라도 금융 당국 심사 문제는 잘 해결될 거야.”

‘대한민국은 학벌 공화국’이라는 비판의 중심엔 늘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가 있었다. 그 밖의 학교들은 ‘기타 대학’으로 치부됐다. 그런데 박근혜정부와 함께 새롭게 주목받는 대학이 있다. 대통령의 모교인 서강대다. 서강대는 사실 그동안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때 ‘SKY’에 이은 명문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지만 요즘은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랬던 서강대 출신들이 이번 정권 들어 하나 둘 요직을 꿰차고 있다. 일각에선 “관피아는 아니지만 결국 또 다른 낙하산 아니냐”고 비판을 하기도 한다.

2010년 서강대에서 열린 ‘서강대 개교 50주년 기념식’에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명예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 뉴시스
금융기관장 자리 서강대 출신 독식

‘서강인’들의 약진은 금융 및 경제계에서 두드러진다. 예전부터 알아주던 분야가 ‘서강학파’로 불리는 경제 관련 학과였다. 최근 들어 다시 서강학파가 되살아난 듯한 느낌이다. 지난 7월 공무원연금공단은 신임 자금운용단장 자리에 최영권 전 플러스자산운용 전무를 앉혔다. 서강대 경제학과 83학번인 그는 서강대 금융 인맥의 산실로 여겨지는 ‘서강금융인회’(서금회) 회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강대 출신의 약진과 더불어 주목받는 곳이 바로 서금회와 서강바른금융인포럼(서강포럼)이다. 2007년 서강대 출신 금융인들이 서금회를 만들었다. 친목이 주된 결성 이유지만 당시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패배한 데 대한 동문들의 아쉬움도 결성 이유 중 하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윤태 산업은행 부행장, 이광구 우리은행 부행장 등이 멤버다.

서금회와 더불어 또 다른 한 축을 이루는 서강포럼은 특히 권력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 모임은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인사들이 주축이 된 ‘서강바른포럼’에서 출발한 모임이다. 서강포럼이 주관하는 행사를 서강바른포럼이 후원하기도 한다. 서강바른포럼의 초대 공동회장을 맡았던 김철규씨(박 대통령의 서강대 전자공학과 1년 후배)와 몇몇 회원들은 2012년 대선 직전 조직적으로 서울 여의도의 한 건물에서 선거운동 글을 올리다 지난해 6월 불법 선거운동 혐의로 기소된 바 있다. 서강포럼은 박 대통령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자 2012년 9월 ‘서강 금융인의 날’ 행사를 열며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주요 멤버는 이상돈 전 외환은행 부행장, 민유성 티스톤 회장 등이다. 이 포럼은 여전히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서금회와 서강포럼 두 곳을 통틀어 중심적 위치에 있는 인물은 이덕훈 수출입은행장이다. 그는 지난 3월 21년 만에 모피아(옛 재무부 출신 금융 관료) 출신이 아닌 인사로 수출입은행장 자리에 올랐다. 그동안 이 자리는 모피아가 독식하다시피 해왔다. 20여 년 동안 역대 행장 17명 중 모피아가 아니었던 행장은 5명뿐이었다.

금융 공공기관장 자리는 특히 연봉이 많아 정권 핵심과 가까운 인물들이 차지했다. 그중에서도 대통령이 임명하는 수출입은행장은 ‘알짜 중 알짜’로 꼽히는 곳이다. 작년 기준 연봉이 무려 5억3000만원(기본급 1억8000만원)에 달한다. 이 때문에 ‘비(非)모피아’ 출신인 이덕훈 행장이 그 자리에 앉게 된 배경에 관심이 집중됐다.

서강대 수학과 출신인 그는 서금회와 서강포럼을 모두 거쳤다. 그의 동문 활동은 매우 적극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선을 2년여 앞둔 2010년 경제학과 동문회를 만들어 회장을 지냈고, 이듬해 서강포럼이 결성될 때는 고문 자리를 맡았다. 이후 서금회 행사에도 빠지지 않았다. 대표적 ‘친박’ 정치인인 서병수 당시 새누리당 사무총장도 함께 동문 활동을 했다. 대선 때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과 함께 박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으며,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친박 인사’라는 지적에 대해 “대통령을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말해 구설에 올랐다. 2001년에는 ‘자랑스러운 서강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행장 임명 당시 노조는 강하게 반발했다. 이 행장은 취임 첫날부터 노조원들의 출근 저지로 곤욕을 치렀다. 당시 노조원들은 “서강학파 낙하산 행장 선임에 분노한다”며 그가 서강대 출신이라는 점이 임명에 주요하게 작용했음을 지적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우리금융지주 회장 자리에 도전했을 때 오히려 서강대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쓴맛을 보기도 했다. 그가 수출입은행장으로 임명된 지 한 달 후 발행된 서강대 동문회보(서강옛집 제391호)에는 수출입은행 광고가 실렸다.

연봉 4억4000만원(기본급 1억8000만원)인 산은금융지주 회장 자리도 서강대 출신 몫이었다. 지난해 홍기택 회장은 온갖 낙하산 논란 속에서 산은금융지주 회장 자리에 올랐다. 박 대통령의 대선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과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참여했던 대표적인 친박 인사로 서강대 경제학과 출신이다.

이덕훈 수출입은행장, 최순홍 전 청와대 미래전략수석 ⓒ 연합뉴스·인수위사진기자단 제공
금감원, ‘서강대 띄우기’ 동영상 제작 논란

막강 조직으로 떠오르고 있는 서금회와 서강포럼을 띄워주려다 비판을 받은 해프닝도 있었다. 그 주체가 다른 곳도 아닌 금융감독원이었다. 금감원은 지난해 “서강대학교 인맥이 우리나라 금융산업을 좌지우지하며 이끌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동영상을 인터넷상에 배포해 물의를 빚었다. 최수현 금감원장 주최로 서강대에서 열린 ‘캠퍼스 금융 토크’ 홍보를 위해 제작된 이 동영상은 서금회와 서강포럼을 소개하며 ‘우리나라 금융을 좌지우지하는 서강 금맥(금융인맥) 캐기’라는 문구도 보여준 것으로 전해졌다. 후배들에게 이 모임에 동참하라고 말하는 선배들의 목소리도 담겼다. 동영상을 직접 봤다는 새정치민주연합 정무위원회 소속 한 관계자는 “한마디로 가관이었다”고 감상평을 전했다. 당시 “(대통령 출신 학교를 홍보해서) 점수를 따려 한 것 아니냐”는 등 물의를 빚었던 동영상은 곧 삭제됐다.

수출입은행과 더불어 또 다른 알짜 자리는 코스콤 사장이다. 코스콤 사장의 연봉은 4억원(기본급 1억9900만원)에 달한다. 이명박(MB) 정부 시절 대표적 ‘MB맨’이었던 우주하 사장이 여러 가지 내부 문제를 낳은 터라 그 이후 누가 임명되느냐에 코스콤 내외부에서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코스콤 사장은 주로 기획재정부 등 관료 출신들이 맡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한창 정부에서 ‘공공기관 정상화’를 부르짖고 있었고 ‘관(官)피아’에 대한 노조의 반발도 컸던 터라 최종 후보 중에 관료 출신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코스콤 노조는 사장 임명 이후 실망감을 드러냈다. 이덕훈 수출입은행장과 같은 학과 출신인 정연대 엔쓰리소프트 대표이사가 사장으로 임명됐기 때문이다. 관료는 아니지만 대통령 동문이 자리를 채운 것이다. 당시 노조는 “박근혜정부의 보은 인사로 변종 낙하산으로 분류되는 인사가 과연 노사 화합과 코스콤의 발전을 이끌어갈 전문가인가”라고 반발했다. 정 사장은 지난 대선 과정에서 박근혜 당시 대통령 후보에 대한 지지 선언을 했으며 현재 서강대 총동문회 대전 지역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서강대 전자공학과 70학번이다. 일부 기업에서는 박 대통령과 같은 학과를 나온 인물을 고문 자리에 앉히기도 했다. LS산전은 최순홍 전 청와대 미래전략수석을 상근고문으로 영입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박 대통령의 같은 과 1년 선배다.

총동문회장에 처음 전자공학과 출신 선출

현재까지 그를 제외하고 대통령과 같은 과 출신들의 움직임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지난해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한 동문이 서강대 총동문회장을 맡았다. 1964년부터 지금까지 총 15명의 총동문회장이 있었는데, 그중 10명이 상경계열 출신이었다. 전자공학과 출신이 회장이 된 경우는 지난해 선출된 29대 회장 김덕용 케이엠더블유(KMW) 사장이 유일하다. 부회장단에도 전자공학과 출신이 4명이나 포함돼 있다. 학과별로 비교해봤을 때도 많은 편이다.

지난해에는 2001년 이후 처음으로 전자공학과 출신이 ‘제18회 자랑스러운 서강인’으로 선정됐다. 2001년 수상자는 장흥순 서강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로 대선 때 박근혜 후보의 벤처특보를 맡았던 인물이다. 유기풍 총장은 ‘2013 서강을 빛낸 전자인의 밤’ 행사에서 “서강을 대표하는 전자공학과에 ‘대통령 배출 학과’란 자부심이 더해졌다”고 축사했다.

역대 정권마다 늘 잘나가는 학맥은 존재했다. 모두 대통령의 출신 학교였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 때는 육사가 주름잡았다. 김영삼 정권 때는 경남고가, 김대중 정권 때는 목포상고가, 노무현 정권 때는 부산상고 출신이 두각을 보였다. 이명박 정권 시절에는 동지상고와 고려대 출신들이 요직을 독차지했다. 대통령의 학맥 인사들은 주로 권력 자체에 진입하기보다는 알토란 같은 자리를 꿰차는 경향을 보인다. 대통령의 동문이라는 점을 적절히 이용해 자기들끼리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세를 키워나가는 것이다. 때문에 대통령 친인척 못지않게 관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박 대통령은 그동안 ‘서강 동문의 밤’ 행사에 참석하고 광고 모델로도 나서는 등 적극적인 동문 활동을 했으나 지난해 말 행사에는 동영상 축사로 참석을 대신했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박근혜정부가 관피아 청산을 내세우고 있는데 이번 정부 들어 그 빈자리에 서강대 학맥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관피아에 학연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슈퍼 관피아’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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