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시대를 증언하다] 이국 전쟁터와 탄광에서 청춘을 걸다
  •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
  • 승인 2014.05.21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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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파병, 파독 광부·간호사 피와 땀…70년대 경제 성장 ‘씨감자’

1972년 12월8일 당시 경복궁에 있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월남전쟁기록화>전이 개막했다. 그해 초여름인 6월14일부터 7월2일까지 당시 한국을 대표하던 10명의 화가가 종군화가단을 꾸려 베트남(越南)으로 떠났다. 이마동 화백이 단장을 맡고 김기창, 김원, 박광진, 박서보, 박영선, 오승우, 임직순, 장두건, 천경자 등이 전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 활약상을 담은 150호 이상의 대작 2점씩을 제작해 전시를 연 것이다.

5·16이 일어난 1961년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 먹고사는 문제가 당장 급했다. 수해와 가뭄이 겹치면서 농민은 농토를 버리고 그나마 경공업 위주의 일자리가 있는 서울로 몰려들면서 농촌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는 엄청난 실업률과 외화 부족 현상으로 이어졌고, 난국을 타개하고자 정부는 대일청구권 자금과 베트남 파병 그리고 이승만·장면 정부 시절부터 추진해온 간호사·광부의 독일 송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김기창 ⓒ 정준모 제공
생명과 맞바꾼 달러, 경제 개발의 첫 삽

1964년 9월11일 130명의 제1이동외과병원과 10명의 태권도 교관단이 해군 LST 편으로 부산항을 출발해 9월22일 베트남 사이공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된 베트남 파병은 한국에 경제적 숨통을 틔워준 사건이었다. 미국 정부는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대가로 군사 원조 삭감 중지와 1억5000만 달러의 장기 차관을 제공했다. 1964년에는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가 한국군 증파를 요청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이를 수용해 베트남 정부의 제2차 추가 지원 요청에 따라 1개 공병대대, 1개 경비대대, 1개 수송중대, 1개 해병·공병 중대로 구성된 비둘기부대를 처음으로 파병한다. 이후 1973년 철수 때까지 총 5만5000명 규모의 전투요원과 노무자·기술자 등 민간인 1만6000명을 베트남에 파견했다. 이 중 약 5000명의 전사자와 1만10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베트남 파병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는 대단했다. 차관 외에 군납,  파월(派越) 장병 및 파월 기술자 송금액이 1966년 한 해 동안 총 6949만 달러로, 1965년 수출 총액 1억7500만 달러의 3분의 1에 달할 정도였다. 한국군 현대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귀국이나 휴가 때 파병 군인이 가져오는 휴대용 녹음기와 미군용 시레이션(전투식량) 박스 같은 새로운 물품은 변화의 시발이었다. 또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를 비롯해 대중문화에도 많은 변화와 흔적을 만들었다.  

1963년 독일 파견 광부 500명 모집에 4만6000여 명이 몰렸다. 대학 졸업자와 중퇴자가 지원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엄격한 공채 시험과 자격 심사가 뒤따랐다. 당시 3년 계약의 파독(派獨) 광부 급료가 월 600마르크(160달러)로 한국의 장관 월급보다 많았다. 외형상으로는 ‘한국 광부의 탄광 지식을 향상시켜 한국 산업에 기여’할 목적으로 추진됐다고는 하나 실은 독일의 광부 인력난, 미국이 독일에 요청한 한국 재건 지원 약속 이행, 실업난과 외화 획득을 위한 인력 송출을 원하는 한국 정부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이루어진 일이었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이어진 독일 광부 송출 사업에 따라 독일 땅을 밟은 광부는 총 7932명에 달했다. 

간호사의 독일 진출은 1950년대 후반부터 각종 기독교 선교단체 주선으로 이뤄졌으나 1966년부터 정부 주도로 본격적으로 실시됐다. 1976년까지 약 10년 동안 총 1만226명의 간호 인력이 독일에 파송됐다.

하지만 전후 복구를 위해 독일에 들어온 이주노동자의 불법 정착 문제로 고민하던 독일 정부는 한국의 광부와 간호사 파송 기한을 3년으로 못 박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3년이 지나면 제3국으로 가거나 결혼, 대학 진학 등을 이유로 독일에 남는 경우가 생기면서 ‘이민’의 역사, 새로운 ‘디아스포라(재외 한인)’의 역사가 발생하는 계기가 됐다.

어찌 희생이 없었을까. 우리말로 ‘무사히 위로 올라오세요’라는 뜻의 재독 교포 모임인 ‘글뤽 아우프’가 발간한 <파독 광부 30년사>에 의하면 1963년부터 1979년까지 광부 65명, 간호사 44명, 기능공 8명이 사망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조국의 번영만을 위해 일하던 강인한 정신의 그들도 고독과 향수병은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독일에서의 이들의 삶을 사진작가 박정희(국립 순천대 교수)가 1989년부터 1994년까지 기록한 작품은 우리를 또 다른 시간으로 데려간다. 그의 기록사진은 고난의 역사이자 이를 이겨낸 의지의 발걸음이다.

아들을 월남에 보내는 어머니(왼쪽 사진), 1966년 독일 공항에 내리는 한국 간호사들. ⓒ 정준모 제공
파독 광부·간호사 월급 70~90% 조국에 송금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송금은 1970년대 한국 경제 성장의 ‘씨감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광부와 간호사의 독일과의 계약 조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3년간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고 적금과 함께 한 달 봉급의 일정액은 반드시 송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탄광에서 일하고 연금과 생활비를 제외한 월급의 70~90%를 모두 조국에 송금했다. 이들이 한국으로 송금한 돈은 연간 5000만 달러로 당시 한국 GDP(국내총생산)의 2%에 달할 정도였다. 또 서독 정부는 파견 광부와 간호사의 3년 치 노동력과 노임을 담보로 1억5000만 마르크의 상업차관을 한국 정부에 제공해 한국 경제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1964년 당시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루르 탄광지대 함보른 탄광 강당에서 이들을 만난 당시 신문 사진도 우리 가슴을 멍하게 하는 역사를 담은 이미지다. 250여 명의 파독 광부와 간호사가 모인 가운데 모두가 울먹이며 불렀다는 애국가. 그리고 대통령의 “국가가 부족하고 내가 부족해서 여러분이 이 먼 타지까지 나와 고생이 많습니다”라고 했던 연설을 기억하는 파독 광부의 회고는 여전히 가슴을 찡하게 한다.

하지만 이들의 피와 목숨으로 이루어낸 오늘의 대한민국은 그들이 조국을 떠날 때와 달라진 것이 없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여전히 후진적인 사고와 어이없는 행동으로 어린 학생들을 바다에 수장시켰다. 바다에 곤두박질친 세월호의 사고 현장 이미지를 보며 후일 역사가가 무어라 쓸지 이미 알고 있어 부끄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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