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시대를 증언하다] 초등학교 교정, 관제 동상 밭으로 변하다
  •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
  • 승인 2014.05.14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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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정통성 확립 수단으로 활용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좌대에서 끌려 내려온 것이나 일전에 우크라이나에서 레닌의 동상이 성난 군중에 의해 땅에 떨어진 사건은 동상이 단순한 미술품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방증한다. 동상의 역사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정 사건이나 인물을 기념하거나 기릴 목적으로 세워지는 동상은 대개 청동 또는 돌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데, 어디서나 잘 보이도록 높은 좌대에 올려놓는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불상 외에 특정 인물의 동상은 찾아볼 수 없으나 서양 조소 기법이 전해진 이후 일제 강점기에 언더우드 상(像) 등이 동상으로 제작됐지만 전쟁 물자로 공출당해 탄피가 되어 사라졌다.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 시절부터 다시 충무공, 민충정공, 맥아더, 콜터 장군 상 등이 세워졌다. 

김세중 작
5·16 쿠데타 세력은 경제 발전을 위한 국민통합의 역량을 ‘민족’에서 구했다. 자발적인 근대 국민국가로의 이행 경험이 없는 신생 독립국가에서 혁명의 당위성을 보여줄 경제 발전을 위한 국민적 단결과 중앙 집권적 통일을 이루는 데 ‘민족’은 유용한 정치적 개념이었던 것이다. 1963년 10월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는 ‘국민 도의와 민족정기를 일깨우고자’ 각종 동상과 6·25전쟁 희생자 위령탑 등 기념물, 현충사와 항일운동 유적지의 성역화 사업을 추진했다. 1955년께부터 시작된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 사업도 민족정신 함양 사업의 계기가 됐다.

1964년 5월16일 국회 문교공보위원회는 당시 150만원의 예산으로 서울의 각 대학교 미술대학생을 동원해 제작한 안창호·유관순 등 37인의 애국 선현 동상을 남대문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세종로 중앙분리대 녹지대에 세웠다. 하지만 습작 수준의 조악함과 석고 재질 훼손으로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에 금박을 입히는 계획도 검토됐으나 여론에 따라 1966년께 철거됐다.  

이후 1966년 8월11일 김종필 국무총리를 초대 총재로 ‘애국선열 조상 건립위원회’가 발족했다. 제1회 5·16민족상 산업 부문에서 장려상을 수상한 이한상 풍전산업 사장이 상금 50만원을 서울신문에 기탁해 시작된 이 사업은 항구적인 선현의 동상을 건립해 ‘민족정기’를 세우고자 했다. 하지만 동상 건립 경험이 전무했던 당시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그래서 재외 공관을 통해 외국의 동상 사진을 수집하고 15인의 선현을 선정하고자 각계 인사 127명에게 설문조사를 해서 1968년부터 1972년까지 15기의 동상을 건립했다.

당시 충무공 동상 제작·설치에는 요즘 돈으로 수십억 원가량 되는 2000여 만원이 들었다. 이후 동상 건립 운동은 들불처럼 번져가는데, 특히 1968년 11월2일 일어난 삼척지구 공비 침투 사건 당시 죽임을 당한 반공 소년 이승복의 동상이 전국 초등학교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해 초 발발한 1·21 청와대 기습 사건으로 인해 강조되던 반공·승공 정책과 맞물린 것이었다. 이와 함께 석고나 시멘트로 만들어 초록색을 칠한 조악한 ‘보급형’ 충무공상과 세종대왕상, 신사임당상 그리고 독서하는 소녀 등이 추가로 세워졌다. 또 국민 계몽 차원에서 국민윤리와 정신적 기반 강화를 위해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되고 국민교육헌장탑이 추가로 세워지면서 당시 초등학교 교정은 지금의 남산처럼 동상 밭으로 변했다.

애국선열 조상 건립 운동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일체화로 국민 역량 총동원과 이를 통한 경제 발전을 꾀했던 박정희 정권에서는 매우 유용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일각에선 정권과 공화당, 언론, 친일 경력의 지식인과 예술인 그리고 정경유착으로 부를 이룬 재계의 합작품이란 비판과 함께 ‘선열’의 선정 기준과 일관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이 사업은 박정희 정권의 안정화와 정통성 확립 수단으로 활용됐다고 평가된다.

이순신 장군상, 1960년대 조각 작품 중 걸작

광화문의 충무공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을 보면 이 사업에 대한 국민 일반과 역사의 평가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세종로인 만큼 세종대왕상을 세우자는 의견과 충무공상을 세우자는 의견이 맞붙었다. 하지만 1·21 사태 등으로 자주국방과 승공 통일이 강조되던 시대적 분위기와 이은상의 제안에 따라 최종적으로 이순신 장군상으로 결정됐다고 한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건립 비용을 헌납하고 동상 글씨도 직접 썼다. 따라서 광화문의 충무공 동상을 비판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충무공상은 박정희의 현현이다.

이순신 장군상은 있는 그대로 보면 수작에 속하는 예술품이다. 그 비용을 누가 냈던 간에 말이다. 일단 기단이 10m, 동상 높이가 6.5m로 총 17m에 달하는 이 상은 규모나 작품의 내용 면에서 1960년대 제작된 조각 작품 중 걸작에 속한다. 무장이지만 유성룡의 표현대로 ‘말과 웃음이 적고 얼굴은 아담하여 근신하는 선비’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고 비판하지만 동상을 올려다볼 국민과 눈을 맞추기 위해 작가가 시선을 낮추었을 뿐이다. 사실 충무공상은 측면에서 보면 머리에서 어깨와 허리로 이어지는 선이 역S자로 마치 독수리가 먹이를 채듯 동적인 느낌을 강하게 준다. 예술적으로 압권이자 사실주의 조각에서 보기 드문 역동성이다. 김세중의 조각가로서 녹록지 않은 솜씨가 여실히 드러난다. 예술 작품의 상징성은 사실성을 넘어선다. 그럼에도 손에 든 칼과 칼을 쥔 손, 그리고 얼굴 모양을 두고 입방아를 찧는 것은 동상이 예술 작품이라는 사실을 잊은 탓에 생기는 일이다. 

1969년 남산 백범광장에 김구 동상이 세워진 것도 일본 육사 출신에 좌파 전력에 시달렸던 박정희의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의 민족주의적 애국심 고양 사업의 일환이었던 애국선열동상 건립 사업은 국민의 무관심 속에 또 하나의 구호처럼 진행됐다. 전혀 공공을 고려하지 않은 채 요즘 공공미술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관제 미술 또는 유사 관제 미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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