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규칙 무시한 탈법 경영, 타락한 자본주의 불러온 주범”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4.05.07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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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전 총리 “대기업과 중소기업 선순환 생태계 만들어야”

2014 굿 컴퍼니 컨퍼런스(GCC)의 기조강연자로 나선 정운찬 전 국무총리(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는 동반성장 전도사다. 정부 산하의 동반성장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 활동했고, 최근에는 동반성장연구소를 설립해 경제 생태계의 복원 없이 지속적인 성장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정 이사장은 ‘좋은 기업이란 어떤 기업인가?’라는 기조 강연에서 “동반성장과 굿 컴퍼니 컨퍼런스의 취지가 잘 맞기에 강연자로 나섰다”며 기업의 책임을 강조했다. 경제의 핵심은 기업이고 기업의 활동 여하에 따라 경제가 좌우된다. 기업의 동반성장 의지와 노력이 중요하기에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GCC의 기조강연을 맡았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경제가 식민 지배와 6·25전쟁을 겪고도 이른 시간에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가 됐지만 ‘선 성장 후 분배’ 정책이 야기한 여러 가지 불균형에 시달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불균형은 성장 잠재력을 떨어뜨리고 불균형 사회는 감당할 수 없는 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다”고 경고하면서 “정부는 불균형 상태를 돌리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기업도 사회 발전을 견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 시사저널 최준필
“정부는 불균형 상태 돌리려는 노력 해야”

국내 대기업은 산업화 시대에 정부의 정책적 지원에 따라 거대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대기업 사시(社是)에 유난히 ‘사업보국’ ‘기술보국’ ‘기업보국’ 같은 말이 많은 것도 산업화 과정에서 정부의 지원 정책에 대한 책임의식이 스며들어 있는 흔적이다. 하지만 최근 노동 유연화나 주주 자본주의 등이 확산되면서 기업의 사회적 역할이 경시되는 측면이 있다. 

정 이사장은 한국 경제가 심각한 불균형 구조와 이에 따른 부의 양극화 체제에 대한 해답을 갖지 못한 상황에서 기업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좋은 기업’에 대해 지속 가능한 탁월성을 지닌 영속 기업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한국형 좋은 기업의 첫째 조건으로 이윤 극대화를 꼽았다. 아무리 훌륭한 비전을 내세운 기업일지라도 기업 활동에서 지속 가능한 영양분인 이윤을 내지 못한다면 도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 국내 대기업이 이윤 극대화보다는 대출을 통한 기업 확장에 열중하다 줄도산하면서 한국 경제를 휘청거리게 만들기도 했다고 그는 지적했다. 그는 기업이 이윤을 많이 올리려면 “창의적인 인재를 모아야 한다”고 밝혔다. 학벌이나 출신보다는 개방성과 다양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윤 극대화에도 단서를 달았다. 100년 이상 된 세계 유수의 영속 기업의 특징은 “돈을 버는 것은 여러 가지 목표 중 하나이고 돈 버는 것 이상의 핵심 가치와 목적의식(사명)에 의해 경영돼왔다”는 것이다. “이윤을 넘어선 사명과 비전이야말로 좋은 기업의 장기적 생존 및 성과에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좋은 기업의 두 번째 조건은 법과 회계 기준에 충실한 준법 경영, 입법 취지와 사회 통념에 맞는 윤리경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윤 극대화도 어디까지나 준법과 윤리경영의 틀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시장 참여자들이 자본주의 시장의 게임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게임의 규칙은 법률보다 광범위한 개념으로서 자본주의 시장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단번에 공감할 수 있는 유·무형의 규칙을 말한다. 위법은 아니지만 국민 정서를 거스르고 사회 공정 시스템을 무력화시킨 조세 회피 지역 내 페이퍼컴퍼니 설립, 편법 상속이나 증여, 대기업의 골목상권 진출 등이 이에 해당된다.

좋은 기업의 세 번째 조건은 앞의 두 가지 조건을 갖춘 기업으로서 동반성장을 직접 실천하는 기업이다. 경영학의 대가인 필립 코틀러는 “착한 일(good works)은 이제 기업의 생존과 번영의 필수 조건이 됐고 공익과 기업 이익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 미래 기업의 생존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정 이사장도 “동반성장은 ‘남의 것을 뺏어서 나눠주는 것’이 아닌 ‘다 함께 파이를 키워 나누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기업 중심의 편중된 경제 구조가 공익을 훼손할 뿐 아니라 양극화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안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1990년대부터 경제민주화를 주장해왔다. “기업과 서비스를 구매하는 사회 공동체가 흔들리면 기업의 생존도 위협받을 수밖에 없고 시장이 무너지면 매출과 이익이 무슨 소용 있나. 지속 가능한 경영의 목표는 건강하고 성공한 사회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야 기업도 생존과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다.”

“대기업도 준법경영 넘어 윤리경영 해야”

정 이사장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선순환 생태계를 위한 동반성장 3대 방안을 제시했다. 첫째, 초과 이익 공유제(협력 이익 배분제) 실시다. 대기업이 거두고 있는 초과 이익의 일정 부분을 협력 중소기업의 성장 기반을 강화하는 데 활용하자는 것이다.

둘째, 중소기업 적합 업종 선정이다. 중소기업의 사업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 대기업의 신규 참여 확대를 금지하는 업종을 선정함으로써 중소기업의 자생력과 경쟁력을 키워주자는 것이다.

셋째, 정부 발주의 중소기업 중심화다. 정부 발주의 80% 이상을 중소기업에 직접 줘 대기업의 중간 이윤을 없애자는 것이다. 소프트웨어나 건설 사업에서 대기업이 관리 능력과 자금력을 앞세워 정부 발주 물량을 독차지하고 이를 중소기업에 재하청해 ‘통과세’를 거두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이런 현실을 개선해 실질적으로 중소기업의 역량을 키워내자는 것이다.

정 이사장은 자신이 주장하는 동반성장론의 핵심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성장하는 선순환 생태계를 만들자”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문제는 이를 실천할 주체들의 의지다. 정 이사장은 “경영자의 식견과 안목 그리고 비전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수퍼리치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라는 소설을 예로 들었다. 워런 버핏이나 빌 게이츠 같은 수퍼리치가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를 풀 수는 없겠지만 엄청난 부와 인맥과 지혜를 가진 그들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발상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억만장자들이 미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 고민하고 기여하듯이 삼성 등 대기업이 우리 사회에서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반성장을 주어진 부채로 받아들이지 말고 ‘미래를 위한 투자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미국 국가경쟁력위원회가 발간한 <국가 혁신 보고서>를 보면 21세기 국가 혁신을 검토하기 위해 주목해야 할 7개의 키워드 중 하나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 변화’를 지목하고 있다. 정 이사장은 “우리 사회가 이 부분이 더 절박한 것은 우리 기업의 99%가 중소기업이며 고용의 88%를 중소기업에서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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