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을 일엔 웃고 모임에도 나가 본래 삶 되찾아야”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승인 2014.04.30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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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전문의, 심리학자가 제언하는 ‘간접 외상’ 치유법

4월16일 국내 여객선 침몰 사고로 국민이 받은 정신적 충격은 엄청나다. 집단 정신질환으로 단정할 단계는 아니지만, 지금보다 심각해질 가능성이 있어 악화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채정호 대한불안의학회 이사장(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은 “당장 정신적으로 힘든 증상이 많은 국민 사이에서 나타났다고 해서 집단 정신적 장애라고 볼 수 없고, 약으로 치료할 필요도 없다”며 “지금은 치료보다 그런 증상이나 감정을 공감할 사람이나 분위기가 필요한 때”라고 진단했다.

단순히 잊으라는 위로는 도움 안 돼

40대 주부 송규나씨는 “종일 TV에서 여객선 침몰 사고 소식을 접하면서 요즘은 눈물이 자주 나고 마음이 편치 않아 체한 느낌이 든다”며 “이런 증상이 불편하고 괴롭지만 어떻게 할지 방법을 모르겠다”고 호소했다. 송씨처럼 대다수 국민은 비통함에 빠져 있다. 이를 ‘간접 외상’(바이케리어스 트라우마)이라고 한다. 사고·사건 당사자가 아닌데도 간접 경험으로 정신적 혼란 또는 장애를 앓는 것을 말한다. 참혹한 장면을 자주 접하는 경찰·소방관·간호사·심리치료사들에게 주로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런 현상이 국민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이번 참사는 전 국민의 정신적 재난인 셈이다.

안산 올림픽기념체육관에 마련된 임시 합동분향소를 찾은 시민이 조문한 뒤 슬픔에 잠겨 있다. ⓒ 시사저널 구윤성
피부에 난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치유되듯이 마음에 생긴 생채기도 언젠가는 아문다. 갑작스러운 비보로 국민은 힘들지만 점차 안정을 되찾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흐름이 건강하고 정상적인 삶이다. 그러나 상처가 깊어지면 잘 낫지 않고 흔적도 오래 남는다. 따라서 공포·불안·슬픔·우울 등 평소와 다른 증상이 한 달 이상 이어지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증상에 그치지 않고 만성 정신질환으로 발전한다. 그런 감정은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가족·친척·이웃으로 도미노처럼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

삼풍백화점 참사, 성수대교 붕괴 등 과거에도 대형 재난은 있었다. 당시 국민은 비통했지만 지금처럼 집단적인 간접 외상에 시달리진 않았다. 이번 재난을 겪으며 국민이 정신적 충격에 휩싸인 배경에는 언론과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도 한몫을 하고 있다. 이번 사태에 대한 보도 경쟁으로 언론은 자극적인 내용을 내보냈다. SNS는 실시간으로 그 내용을 전파했고, 유언비어까지 난무하는 장으로 변했다. 이런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국민은 실시간 참상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평소에 없던 증상이 이번 사고 후 지속된다면 언론 매체를 잠시 멀리할 필요가 있다. 1995년 미국 오클라호마 대지진 당시 성인은 8시간, 아이들은 3시간 정도 TV를 봤고, 뉴스에 노출된 시간이 많은 사람일수록 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했다는 연구 보고가 있다. 채정호 이사장은 “종이 매체보다 TV는 더 자극적이어서 국민은 TV 시청 시간을 줄일 필요가 있다”며 “웃을 일엔 웃고 모임에도 참석하면서 본래의 삶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자신이 예전에 정신적 외상을 받았거나 우울증이 있었거나 스트레스를 잘 견디는 편이 아니라면 이번 사고를 접한 후 증상이 심해질 수 있다. 이소영 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 홍보이사(순천향대부천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증상이 2~4주 이상 계속되면 빨리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번 사고를 접하고 슬프거나 화가 나는 감정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러나 사고를 당한 피해자들의 사정에 너무 감정 이입되면 문제가 생긴다. 삶에 회의를 느끼면서도 자신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경우라면 주변 사람이 도와줘야 한다. 그렇다고 잊으라거나 울지 말라는 등의 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감정을 어느 정도 표출할 필요가 있는데 화·분노·욕 등은 상태를 악화시킨다. 사고 자체를 잊기 위해 술이나 게임 등으로 유도하는 방법도 좋지 않다. 서로 감정을 공감하는 정도가 증상을 가라앉히는 데 효과적이다.

이병철 한강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미국 9·11 테러 사건이나 보스턴 폭발 사고 당시에 그들은 사망자에게 헌화하고 편지를 쓰는 등 애도로 감정을 표출하면서 사회적 안정을 되찾았다”며 “우리도 자원봉사, SNS에 애도 글 올리기, 노란 리본 달기 등 건강한 방식으로 감정을 표출하고 공유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외상 후 장애’가 아니라 ‘외상 후 성장’이라는 말이 있다. 참사를 계기로 사회나 개인이 현재보다 더 긍정적으로 변할 수 있고 그렇게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다. 정부는 안전 대책을 재고하고 국민은 서로 도움을 주는 공동체 의식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인생을 되돌아보고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부모의 정신적 스트레스, 자녀에 악영향

언론과 SNS가 외상 후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문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자극적인 내용보다 인명을 구조하는 모습이나 대책을 모색하는 과정을 전달함으로써 절망에 쌓인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 이병철 교수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우울증 환자가 약을 먹지 않아도 증세가 많이 좋아진 사례가 있다”며 “비현실적인 일이 한국 대표팀의 노력으로 현실이 돼 환자를 긍정적으로 변하게 만든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사고 현장인 진도와 단원고등학교가 있는 안산에 의료진이 상주하면서 주민의 정신적 충격을 보살피고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런 치료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상대가 아무리 의사라곤 하지만 낯선 이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 그 지역의 모든 주민은 같은 증상에 휩싸여 있어 그 자체가 문제라는 인식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지진·쓰나미와 같은 자연재해를 자주 겪는 일본은 그 지역에 차(茶) 모임을 만든다. 낯선 의사가 마음을 열라고 해도 감정을 꼭꼭 숨기던 일본인들은 그 차 모임에서는 서로 증상과 감정을 꺼내놓고 위로한다. 그 과정에 전문가가 참여해 자연스럽게 치유로 유도한다. 이병철 교수는 “치료도 좋지만 의사와 환자라는 개념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며 “일본처럼 우회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위스 취리히 연당공대 신경과학센터의 실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미와 강제로 떨어진 새끼 생쥐는 탁 트이고 밝은 곳을 두려워하는 생존 본능을 잃어버렸고, 그 쥐의 피·뇌·정자에서 정상보다 많은 양의 유전물질(mRNA)이 검출됐다. 연구팀은 “정자 내 mRNA의 불균형이 트라우마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주요 원인”이라며 “트라우마가 유전을 통해 전달되는 것은 물론 후대의 대사 작용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찾아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는 유전된다는 것이다. 사람에게서도 같은 결과가 나올지는 추후 연구로 밝혀질 테지만, 적어도 아이는 부모의 영향을 받는다. 이번 참사를 접한 부모가 두려움·슬픔·불안·공포의 감정을 아이들 앞에서 여과 없이 드러내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그 감정을 그대로 학습한다. 서울 강남구에 사는 김경희씨(여·48)는 “ 사고를 TV에서 본 초등학생 아이가 배·비행기·자동차를 타지 않으려고 해서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전남 진도군 진도실내체육관에서 군의관들이 실종자 가족과 슬픔을 나누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성인은 스스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어도 아이들은 그런 능력이 떨어진다. 여객선 사고를 접한 아이들은 배를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으면서도 배와 물에 대해 겁을 집어먹는다. 이런 아이에게 겁먹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증상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또 그 상태로 방치하면 성인이 돼서도 좋지 않은 정서를 형성한다. 채정호 이사장은 “배가 안전하다는 경험을 하기 전에는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며 “처음부터 큰 배에 아이를 태우기보다는 놀이동산에서 탈 수 있는 작은 배를 타는 것부터 시작해서 배가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아이가 스스로 알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나서 국민 정신적 외상 조사해야”

1992년 이스라엘 수송기가 네덜란드 공항에서 이륙 직후 고층 아파트로 추락해 43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초기에는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 와중에 수많은 주민이 알 수 없는 증상을 호소하며 병원에 실려갔다. 사실 그 수송기에는 우라늄과 독가스 재료가 실려 있었다. 네덜란드 정부가 이를 알고도 숨겼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온 나라는 분노로 들끓었다.

참사가 터지면 일반적으로 사회에 1년 동안 세 단계의 변화가 생긴다. 초기에는 어떤 식으로든 위기를 극복하려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생긴다. 그럼에도 성과가 좋지 않으면 부정적인 의식이 싹튼다. 이 시기에 구호 물품을 빼돌렸다는 등의 소식이 전해지면 그 부정적 의식은 악화된다. 1년쯤 지나면 그 분위기는 반전해서 평온을 되찾는다.

이번 여객선 침몰 사고를 경험한 국민은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들었다. 생존자는 나오지 않는 데다 침몰 원인과 실종자 생사 여부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불확실성은 사회적 분노로 표출된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신호등 빨간불에는 서고 파란불에 가는 것은 사회적 신뢰인데, 이 믿음이 무너지면서 생긴 고통은 점차 분노나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발전한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한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 가운데 60%는 11년이 지난 지금까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증상이 나타났을 때 치료하지 않아 만성 장애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증상이 나타났을 때 어떤 사람을 치료하고 어떤 사람을 관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조차 없다. 채정호 이사장은 “삼풍백화점 붕괴, 서해훼리호 침몰, 대구 지하철 화재, 천안함 폭침 등 대형 참사가 잇따랐는데도 국민을 대상으로 정신적 외상을 조사한 적이 한 번도 없다”며 “그 추적 조사는 일개 병원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정부가 직접 나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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