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시대를 증언하다] “북한 우표만 봐도 남침이 맞다”
  •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
  • 승인 2014.04.16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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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 북한 ‘6월28일 서울 해방’ 우표 7월10일 발행 “우표 인쇄 1개월 이상 소요, 남침 전 준비한 듯”

‘혼비백산’ ‘줄행랑’. 1950년 6월25일 새벽을 떠올리면 전쟁을 겪은 세대든 겪지 않은 세대든 간에 누구나 떠올리게 되는 단어가 아닐까. 일요일 새벽 38선 전역에서 인민군이 남쪽으로 돌진했다. 한반도를 집어삼킨 6·25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북은 ‘파죽지세’, 남은 ‘지리멸렬’이란 말 외에 어떤 말로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까.

북한은 6월28일 서울을 점령했다. 전선을 넘기 시작한 지 3일 만이었다. 대통령 이하 정부 각료와 정치인은 시민에게 안심하라고 이르면서 자신들은 수원으로 몸을 피하고 한강 다리마저 폭파시켜 시민을 고립무원으로 만들었다.

변월룡 , 1953년, 캔버스에 유채, 51x71cm, 유족 소장.
갑작스러운 전쟁과 서울 함락으로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시민들은 어쩔 줄 몰라 했고, 미술이 갖고 있는 프로파간다 첨병으로서의 기능을 일찍이 간파한 점령군 북한은 ‘조선미술동맹’을 통해 미처 서울을 떠나지 못한 화가를 모아 김일성과 스탈린 초상화를 그리거나 승전 고취 포스터를 그리는 일에 동원했다. 9·28 서울 수복 후 북한을 지지했던 미술가는 월북했고, 남게 된 미술가는 ‘잔류파’가 돼 피난에서 돌아온 ‘도강파’로부터 공산당에 대한 부역행위를 조사받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중앙청 인공기 우표는 북의 남침 증거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많은 화가는 종군 화가단에 들어갔다. 전시에 목숨을 부지하고 군복으로나마 입을 것이 해결되고, 군표로 먹을거리를 장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군 종군 화가단에 들었던 함남 출신의 박득순(1910~1990년)은 동트기 전 서울 탈환을 위해 어둠을 뚫고 한강을 건너는 국군과 유엔군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그는 전장의 긴박함과 어두운 화면이 긴장감을 더하는 <서울 입성>과 막 출격을 앞두고 있는 <공군기지-아군 종군 정예>를 남겼다. 평양 출신으로 광복 후 서울에 정착했던 김원(1912~1994년)은 1950년 큰아들을 데리고 부산의 미 공군 부대 통신대 고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북에 남았던 칠순 노모와 아내는 남으로 피난 오다 죽고 10살·7살짜리 두 아들만 살아남아 피난민 무리에 끼어 남으로 왔다. 그 후 전쟁이 끝나고 고아원에서 아들을 찾았다. 그는 1950년 가족의 피난을 그린 <피난민>을 완성했다. 화면 중앙 흰 한복을 입은 허리 굽은 할머니에게 빨리 가자고 손자가 재촉하는 모습이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이들의 순간의 처지를 절실하게 포착하고 있다.

북한은 6·25전쟁을 북침에 대한 반격이라고 정당화했다. 하지만 그들이 서울을 점령했던 3개월간의 ‘서울 수복’(1948년 제정된 북한 헌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는 서울’이라고 명시) 기념 우표를 보면 그 말이 새빨간 거짓말임이 드러난다.

북은 서울을 점령하고 ‘6월28일 서울 해방’ 기념우표를 7월10일에 발행했다. 중앙청에 인공기가 휘날리는 도안이다. 우편학자 나이토 요스케(內藤陽介)에 의하면 통상 우표 발행에는 최소 1개월 이상 소요된다고 한다. 그런데 보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그것도 전시에 ‘해방’ 우표를 발행하는 것은 사전 준비 없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우표는 그들이 철저하게 남침 준비를 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남침 사실을 증명하는 또 다른 이미지가 있다. 1950년 북한이 발행한 ‘해방 5주년’ 기념우표다. 조선을 해방시킨 소련에 감사하는 의미로 세운 해방탑을 양국 국기로 표상하는 도상의 이 우표는 광복 5주년을 맞는 1950년 8월15일에 발행돼야 맞다. 하지만 북한은 이보다 2개월 빠른 6월20일 우표를 발행했다. 왜 2개월이나 앞당겨 발행했을까. 나이토 요스케의 추측에 의하면 “실제 광복 기념일인 8월15일 광복 기념우표를 발행하는 게 불가능하거나 또는 어려울 것이란 사실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광복 기념우표를 미리 발행하고 5일 후에 6·25가 발발했다는 건 북한 스스로 우표를 통해 남침임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박득순 (UN군 도강), 1958년, 캔버스에 유채, 29x73cm, 개인 소장.
변월룡의 판문점 포로 교환 그림 최초 공개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 당시 북측의 모습을 사실적·서사적으로 묘사한 그림도 당시를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다. 미술사학을 공부하는 문영대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변월룡(1916~1990년)의 <1953년 9월의 판문점 휴전회담장>과 <판문점 근교 연병장> <판문점에서> <판문점에서의 북한 포로 송환> <1953년> 등이 그것이다. 변월룡은 당시 북조선미술가동맹위원장이던 정관철(1916~1983년)의 도움과 소련 국적을 가진 덕분에 출입이 까다로운 판문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레핀 미술학교에서 리얼리즘을 제대로 배운 그는 당시의 상황을 사진이 아닌, 화가의 눈으로써 역사의 파수꾼 노릇을 해냈다.

그의 부모는 일제 강점기 억압을 피해 연해주로 이주했다. 그는 러시아 한인 2세로 러시아 이름은   봐를렌(Пен Варлен). 어려서부터 그림 솜씨가 남달랐던 그는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삽화, 극장 간판, 영화 포스터 등을 그리는 아르바이트를 해 1937년 동부 스베르들롭스크 미술학교에 진학했고 24세가 되던 1940년 소련의 최고 명문 미술학교인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해 1951년 미술학 박사 학위를 땄다. 레핀 미술학교로 개칭한 미술아카데미의 교수로 임용돼 35년 동안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레핀 미술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53년 조·소 문화 교류의 일환으로 북한 교육성 고문관으로 파견돼 15개월 동안 북한에 체류하며 6·25전쟁 말기와 휴전 초기 북한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는 또 평양미술대학 학장과 회화·데생·무대미술과 과장으로 일하면서 전후 북한의 미술 교육 체제를 정비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기초한 오늘날의 북한 주체미술 기반을 닦았다.

포로 송환을 그린 <판문점에서의 북한 포로 송환>은 밝고 활달한 필치가 인상주의와 닮아 있지만 상황 묘사는 매우 사실적이다. 인물은 복장과 표정까지 읽을 수 있도록 빠르지만 정확한 터치로 특징을 잡아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늦여름, 밝은 연병장과 그 위에 드리운 그림자 대비는 당시의 극적인 상황을 긴장감 가득하게 표출한다. 여기에 기록화가 놓치기 쉬운 회화적 분위기까지 충만해 그의 화력이 결코 녹록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트럭을 탄 인민군 포로는 판문점역에 도착한 뒤 “미제가 준 옷을 입고 조국으로 갈 수 없다”며 옷을 모두 벗어서 찢은 다음 길에 버렸다. 트럭에서 옷을 찢거나, 포로 교환 당시 미군에게 욕을 하는 사진 등이 있지만 ‘설마’ 하던 이들에게 변월룡은 이 작품을 통해 그 ‘설’이 사실임을 역사로 남기고 있다.

그가 1951년에 제작한 후 소련에 돌아가 개작한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계승한 주체미술에 그의 영향이 지대했음을 보여준다. 역사화의 전형인 삼각 구도를 사용하며 화면에서 기승전결의 구조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주먹을 불끈 쥔 인민의 비장한 표정이 ‘시대의 요구와 인민 대중의 지향을 가장 정확히 반영하며 인민 대중에게 복무하는’ 주체미술의 원형을 보여준다. 이후 우상화와 당성이 강조되는 ‘주체미술’로 변질됐지만 여전히 그의 정통 기법에 기초하고 있다. 김일성은 그에게 영구 귀국을 제안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해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찍히면서 북에서 잊힌 작가가 됐다. 2006년 광복 60돌을 기념해 국립현대미술관은 변월룡 전시를 추진해 작품까지 러시아에서 반입했으나 북의 반대로 무산됐다고 한다. 남과 북, 모두에게서 버림받았지만 그림을 통해 성실하고 묵묵하게 절규하듯 역사를 증언함으로써 그는 영원히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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