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 준수와 아집·독단을 착각해선 안 된다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4.02.18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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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정권의 취임 1주년 국정 성적표 “박 대통령 지지율은 못난 야당 덕택”

YS : “현철이 자주 만나나?”

이원종 : “최근에는 본 적도 없는데요. 근데 왜 그런 말씀을….”

YS : “그래. 알았다. (현철이) 조심하거래이.”

1994년 초, 김영삼(YS) 대통령이 집권 2년 차를 맞던 시기에 이원종 청와대 정무수석과 나눈 대화 내용이다.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를 둘러싸고 ‘소통령’ 등 오만 잡음이 끊이지 않자, YS가 평소 믿던 이 수석을 불러 저간의 사정을 확인한 것이다. 현철씨는 대통령도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정에 깊숙이 개입했고, YS는 자신을 빼닮은 아들을 어찌하지 못했다. 결국 자신의 대통령 임기 중 감옥에 보내야 하는 운명을 맞았다.

1년 전(2013년 2월25일) 국회의사당 광장에서 거행된 제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거수경례를 하는 박근혜 대통령. ⓒ 사진공동취재단
YS는 정치적 욕심이 없고 바른 말을 서슴지 않는 이 수석을 각별하게 신임했다. 또 한 명, 가신(家臣) 출신이 아님에도 집권 초 중책을 맡긴 이로 박관용 청와대 비서실장이 있다. 국정 전반을 읽을 줄 알고, 기획 능력이 있는 재목이 필요했기에 박 실장을 곁에 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박 실장도 집권 2년 차인 1994년 말 결국 청와대를 떠난다. 대통령에게 현철씨 관련 비리를 내밀하게 알렸다가 현철씨가 항의를 해온 얼마 뒤다. 검찰과 경찰, 안기부(지금의 국정원) 등 3대 권력기관까지 휘어잡고 설치는 최고 권력자의 아들과 맞선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절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대중(DJ) 전 대통령도 아들 문제에 관한 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칫 세 아들 모두가 자신의 재임 중 감옥에 가는 모습을 바라봐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그나마 장남 김홍일 의원만 흉한 꼴을 가까스로 면했다. 검·경·정보 3대 기관의 수장을 호남 일색으로 도배했던 부작용이었다. 권력 주변에 몰리는 파리 떼가 극성을 부렸지만 실상을 제대로 보고하는 기관이 없는 데서 비롯한 비극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외아들 지만씨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지만씨가 육사 생도 시절 해병대에 입대한 친구 오 아무개씨를 면회 갔다. 오씨는 5·16 군사 쿠데타에 참여해 최고위원 및 4대 국회의원 등을 지낸 오정근 전 국세청장의 아들이다. 오 전 청장은 박 전 대통령이 경호실장 기용을 검토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부대를 찾아왔으므로 당시 부대 중대장이던 김 아무개 대위가 술자리를 마련했다. 술잔이 몇 순배 돌 무렵 혈기 넘친 지만씨가 실수를 했다. 이를 적당히 넘길 김 대위가 아니었다. 해병대에서도 다혈질로 꼽히던 김 대위가 ‘후배’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이때 지만씨가 뺨을 어루만지며 ‘나를 때린 사람은 처음입니다. 무례를 일깨워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정중히 사과했다. 얼마 후 지만씨는 지방 모처로 김 대위를 초청해 극진히 대접했다.”

대통령의 아들을 때리고 되레 향응까지 받았다는 김 대위는 지금 미국에 있다.

박 대통령 부정 평가 요인 ‘소통 미흡’과 ‘독단’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012년 18대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로 성공적 홍보 전략을 꼽기도 한다. ‘경제민주화’ 이슈를 선점했고, 더불어 ‘준비된 여성 대통령’도 결정적 보탬이 됐다. 1997년 15대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의 ‘준비된 대통령’을 표절한 구호는 선거 흐름을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준비’했다는 것일까. 또 차라리 ‘준비가 안 됐으면’ 좋았을 부분은 어떤 것일까.

박근혜 대통령이 오는 2월25일로 취임 1주년을 맞는다. 각종 여론조사 기관의 지지율 조사에 따르면, ‘국정 운영을 잘하고 있다’는 응답은 50%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대선 득표율보다 다소 높은 수준의 국정 지지율을 유지해왔다. 역대 대통령들의 집권 2년 출범 시기 국정 지지율과 비교해봐도 그런대로 만족할 만한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42쪽 그래프 참조).

박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35%에 이른다. 한국갤럽 조사의 종전 최고치는 34%로, 이는 지난해 10월 1주와 4주에 나온 수치다. 박 대통령이 국정 운영을 못하고 있다는 이유는 ‘소통 미흡’(18%) ‘공약 실천 미흡’(13%) ‘원활하지 못한 국정 운영’(11%) ‘독단적’(8%) ‘국정원 문제’(8%) 등이 꼽혔다. 유사한 의미를 띤 ‘소통 미흡’과 ‘독단적’을 합하면 26%가 된다.

이와 관련해 적잖은 관측통들은 박 대통령의 태도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예상한다. 대통령의 독단·독선은 부친의 제왕적 통치 행태에서 물려받은 거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체화된 스타일이 최고 권좌에 오른 지금 어떻게 바뀌겠느냐는 반문이다. 이런 진단이 현실화한다면 박 대통령과 국민 모두에게 불행이요, 비극이다. 여권 내부에서까지 고개를 가로저었던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과 윤진숙 해양수산부장관 임명 강행이 초래한 악영향은 이미 아는 바다.

최고 권력의 아집 탓에 추락한 전례 새겨야

1987년 개헌으로 5년 단임 대통령제를 도입한 이래 대통령들의 재임 일수는 1826일에 달한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다. 곧 취임 1주년을 맞는 박 대통령의 남은 집무일은 정확히 1460일이다. 하지만 이마저 산술적 수치일 뿐이다. 차기 대통령 문제가 표면화되는 임기 3~4년 차부터 레임덕이 노골화하기에 실제 일할 수 있는 날은 1000일이 채 안 될 수도 있다.

역대 정권이 취임 1년을 그토록 신경 쓴 이유도 그래서다. 취임 후 1년 내에 정권의 기틀을 공고히 해야만 단임 대통령의 한계를 그나마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기틀은 국정 목표 제시를 넘어 핵심 과제 상당 부분에서 진척이 이뤄져야 함을 말한다. 권력의 서슬이 퍼런 집권 1년 차 이내에 기반을 다지기 위해 역대 대통령은 ‘채찍과 당근’을 동원했다. 두 가지를 적절하게 배합해 몰아붙였다. 채찍은 주로 엘리트 그룹인 정·관·재계를 향했고, 당근은 복지라는 이름으로 다수 국민을 향했다.

‘부패 척결’ ‘공직 기강’ 구호 아래 구 권력 주변과 공직자들이 대거 된서리를 맞는 것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환호했다. 나중에는 권력 본산에 들어앉은 본인과 친인척들이 더 엄청난 부정 축재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실망감을 안겼지만 일단 당대에는 그랬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빌리면 ‘쿨’한 이미지를 심기 위한 조작도 간단없이 시도됐다.

‘보통 사람’을 내건 노태우 전 대통령은 보통 사람처럼 손가방을 들고 첫 등청을 했다. 섭정을 꾀한 전임 대통령의 측근들을 손보고 대대적 공직 사정을 전개하는 한편 언론 자유화 등의 당근을 던졌다. 1988년 13대 총선 패배로 여소야대 정국을 맞으면서 휘청거린 노 전 대통령이었지만 그래도 50% 가까운 국정 지지율을 확보했다. 이때 쌓은 역량을 살려 대중국·대소련 국교 정상화 등 북방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냈고 이 부분만큼은 지금도 높은 평점을 받고 있다.

임기 말에 아들의 권력형 부정, IMF 외환위기로 인해 ‘칼국수’로 쌓은 이미지까지 엉망이 되긴 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의 출발은 매우 좋았다. 법무·보사부 장관이 임명된 지 일주일 만에, 서울시장이 10일 만에 하차하는 잘못된 ‘깜짝 인사’ 등 일련의 패착들마저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등으로 덮어버릴 만큼 그의 개혁 드라이브는 강력했다. 한때 지지율이 90%를 훌쩍 넘어서면서 ‘YS는 못 말려’란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지금의 박 대통령으로서는 오히려 이런 YS 사례가 “지지율이라는 게 별것 아니지 않으냐”는 쪽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또 YS 임기 중 총리 6회, 경제부총리 7회 교체를 포함한 총 25회에 걸친 내각 개편을 들어 현 정부의 인사 패착은 약과라고 자위할지도 모른다. 극심한 갈등으로 국회의 대통령 탄핵 결의까지 초래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촛불 시위에 놀라 집권 1년 차를 허비한 이명박(MB) 전 대통령의 당시 바닥을 기었던 지지율과 비교해서 다소 우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 정치 평론가는 “지금 50%를 상회하는 박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못난 야당의 덕택”이라고 보고 있다.

2월4일 열린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 장관들의 긴장된 표정이 많은 것을 시사한다. ⓒ 연합뉴스
대북·대일 정책에도 우려의 목소리

최고 결정권자의 독단적 인사, 만기친람형 일 처리가 가져온 폐해는 굳이 열거할 필요가 없다. 아니라고 부인할지 모르나, 아직도 대통령 발언 때면 머리를 박고 받아 적기에 바쁜 장관들의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국민들은 다 안다. 원유 유출 처리 과정에서 갖가지 추태를 연출한 윤진숙 전 해수부장관을 해임하면서 정홍원 총리의 건의에 따랐다는 청와대 발표가 ‘쇼’라는 사실쯤은 모르는 국민이 없다. 대통령이 대선 당시 책임총리를 공언했을 때 그저 듣기 좋은 말 정도라고 이

미 접어두었기 때문에 별로 개의치도 않는 유권자들이다.

고령연금 20만원 지급 공약은 개개인의 이해와 직결되므로 시비가 분분하긴 했으나 그 밖의 ‘공약(公約)’을 ‘공약(空約)’으로 뒤바꾸는 것에 현 정부는 별로 괘념치 않는 모양새다. 마치 “선거 때는 무슨 소린들 못 하겠느냐”는 투다. 정치권의 거짓에 이골이 난 국민들이다. 자칫 이런 오만과 독선이 심각한 국면에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경고음이 들리고 있다. 국가 살림을 감안해서 일부 봐주고 넘기는 국민들이지만 그 한계가 오고 있다는 얘기다. 기초단체 후보 정당 공천 배제 공약 불이행은 단적인 예다.

박근혜정부가 지난 1년간의 실적으로 내놓을 만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힐문에 청와대에서 선뜻 공박할 거리가 과연 무엇일지 궁금하다. 책임감 있게 국가 운영 전반을 설계하고 감리하는 참모는 있었는가.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그 임무를 수행한다면, 책임총리와 책임내각은 어찌 되는 것인가. 국회의원들이 대면조차 꺼리는 정무수석은 차치하고라도, 홍보수석이 국정 실세로 거론되는 게 정상인가. 특정 지역 출신 일색의 사정기관장 배치가 합리적인가. 질문과 비난이 끊이지 않는다.

내치는 물론, 그나마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는 외교안보 정책과 철학도 의문투성이다. 원체 사고를 많이 치는 북한의 김정은 조선로동당 제1비서와 일본의 아베 총리 때문이라지만, 대북·대일 외교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는 우려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원칙 준수와 아집·독단을 혼동해선 안 된다는 게 많은 사람의 주문이다. 집권 1주년을 맞는 대통령이 새길 것은 소통과 독선·독단에서의 해방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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