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피 의 정치’를 ‘꽃의 정치’로 만들었다”
  • 사회│정락인 기자·정리│조은혜 인턴기자 ()
  • 승인 2013.12.31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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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인 & 송호근 서울대 교수 대담

2014년을 닷새 남겨둔 12월26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에서 약속을 잡았다. 이날 하늘은 무척이나 심술을 부렸다. 잔뜩 구름이 끼었다가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그러고는 이내 비로 바뀌었다. 고은 시인은 약속 시간 전에 와서 책을 보고 있었다. “선생님, 일찍 오셨네요?”라고 인사를 건넸더니 “촌놈이 먼저 와야지” 하면서 환하게 웃는다. 팔순인 노시인의 미소는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처럼 해맑았다.

곧이어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도착했다. 두 사람은 7년 만의 해후라며 반갑게 손을 잡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술’ 이야기가 화두로 올랐다. 고은 선생은 애주가다. 글을 쓰면서, 홀로 있으면서, 친구를 만나면, 또 우중충한 날에는 소주잔을 기울인다고 했다. 술을 마실 때면 “온 세상이 내 것 같다”고 한다.

송 교수도 매일 소주 반병을 마신다고 했다. 취향은 고은 선생과 비슷했다. 노시인과 중년의 사회학자는 소주잔을 기울이며 얘기를 풀어냈다. 당대의 시인으로서, 사회학자로서 우리가 사는 시대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2013년 12월26일 오후 서울 정동 달개비 식당에서 고은 시인(오른쪽)과 송호근 교수가 시사저널 신년맞이 대담을 하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 박근혜정부 출범 1년

고은 박근혜정부로선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한 해였다. 그것을 앞으로 남은 임기의 성찰적 경험으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이 정부가 내세우는 창조라는 개념에 부합해 이것도 저것도 안 되는 것은 안 되겠다고 생각해야 한다. 새해에는 뭘 지적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빌어야 한다. 우리 정부가 잘되도록 비는 축복과 축원이다. 공자가 가장 싫어하는 게 고질이다. 또 하나는 원칙이다. 행여나 원칙이 원리주의, 근본주의와 맞닿아 있다면 그 원칙은 어떻게든 소화해야 할 대상이다. 다만 원칙이 철칙이 돼서는 안 된다. 무쇠와 같은 원칙이 아니다. 흙과 같은 원칙이 되길 바란다. 가장 이상적인 정치의 방향은 극단을 피하는 것이다. 극좌와 극우를 피하는 게 정치 지혜다. 이런 지혜가 새해에는 활발하게 드러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정치의 방향

고은 정치라는 것에서 세종을 가져보자. 내가 굳이 종교를 만든다면 ‘세종교’를 만들 거다. 나는 세종을 내 신으로 생각한다. 세종이 펼쳤던 정치는 아버지의 ‘피의 정치’를 ‘꽃의 정치’로 만들었다. 심지어 자기 장인까지 죽이는 꼴을 보고 견뎌낸 꽃밭을 만들어준 그런 인물이다. 이때가 봉건 시대니 근대니 이런 거 따질 겨를 없이 500년 안에서 가장 정치다운 정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정치가 세종대왕의 정치를 흉내라도 내고, 짝퉁이라고 해도 그걸 복제할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세종은 권력을 최소한으로 행사했다. 대신 의무는 극대화했다. 반대파도 아버지 태종 같았으면 죽였을 텐데 세종은 감옥에 가둬도 하루만 가둔다. 명령으로써 입을 닫게 하지 않고 토론을 한다. 지금 당장 누구에게 현인이나 세종이 되어라 하는 건 무리지만, 뭔가 착지해서 나무와 열매를 맺을 거라고 보는 것이다.

송호근 우리는 민주화 25년 동안 그런 층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했다. 이 실패를 정말 통감해야 한다. 자기 개인에 대한 검열의식과 책임의식을 갖도록 압박해야 한다. 바로 그게 마음 사이에서 우러나서 해야 하는데, 바로 그게 현실적인 ‘세종교’가 아닐까 생각한다.

고은 권리 개념은 의무 개념과 같이 봐서는 안 된다. 의무 개념은 앞서 있어야 한다. 의무가 권리 행사보다 뒤에 있을 땐 비극이다. 어떤 정치나 문화에서 고도의 품격이란 것은 그들의 의무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명이 권력 행사를 통해 과시되지 않아야 한다. 권력으로서의 정치가 아니라 의무로서의 정치를 말한다. 권력은 개똥, 소똥도 다 할 수 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무에서 유를 만드는 의무, 그때 정치 미학이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사회 혼란, 갈등

고은 나는 무갈등 사회는 싫어한다. 지금은 무슨 관계든 갈등과 함께 있다. 우리는 갈등이란 토대는 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정치·사회 갈등은 그런 기본적 갈등을 넘어서, 갈등으로 모든 걸 달성하려고 한다. 나는 이것이 걱정스럽다. 갈등은 무조건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도 반대한다. 개들도 처음 만날 때는 이빨을 막 으르렁거리다가 친해진다. 갈등을 겪고 나서야 그렇게 된다. 우리가 병에 걸리면 앓아서 이겨낸다. 갈등은 겪어야 한다. 갈등은 지구 에너지 현상이라 생각한다. 다만 갈등에 의해서만 모든 걸 채울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송호근 성장은 욕망을 극대화한다. 지금까지 그렇게 달려왔다. 한 번도 스스로 자기 욕망을 제어해보지 않은 성공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욕망을 제어하는 능력을 상실했거나 기억을 없애버렸거나…. 서양에서 교양이라고 한다면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욕심을 제어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살기 위해선 내 것도 자제하고 저쪽 좀 줘야겠다고 하고 살아간다. 욕심의 극대화, 욕망의 극대화로 달려온 성공의 패러다임이 끝장났다. 끝장난 게 쌓이고 있는데, 아직도 갈등을 욕망의 극대화로 풀려고 하니까 문제다.

■ 이념의 과잉 생산

고은 지금은 이념의 시대가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정말 낡은 방식이다. 지금 같은 디지털 시대는 이데올로기만으로는 살 수 없다. 이 디지털 시대에 무슨 이데올로기를 갖고 살겠나. 사실은 1950년대 실체주의가 나왔을 때, ‘본질 앞에 선행한다’는 것은 그전의 플라톤을 때려치운 것이다. 늘 본질만을 내세운 것이다. 본질을 정치화하면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시대는 지나고 우리의 삶 자체를 돌아보자는 거다. 우리는 수많은 이데올로기의 기억을 갖고 있다. 좌나 우나 이런 것은 이데올로기의 쓰레기다. 이걸 다 내리고, 다 풀어놓고, 풀도 뜯어먹고, 치우고 그랬으면 좋겠다.

송호근 한국에서 식민 시대가 끝난 후 갑작스럽게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대결의 구도로 갔다. 그 이후에 피로 얼룩진 시대를 지났는데, 그다음에는 문학적으로 산문 시대가 꽃을 피웠다. 산문 시대는 나 나름대로 해석하면 ‘이데올로기의 피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고민했을 거라 생각한다. 산문 시대가 오래갔으면, 그 안에서 이 피는 어떻게 하든지 용해가 돼 해결됐을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결빙되면서 극단적인 논리의 시대가 전개되는 거다. 이런 거 없이 갔으면 시(詩) 정신의 시대, 완전히 개화된 후 논리도 뭐도 해결할 수 없을 때는 술의 시대로 가지 않겠나. 서로 술 마시는 시대, 어우러져 노래하는 시대, 시 정신의 시대가 왔으면 이념이란 것은 저쪽 가서 풀이나 뜯어먹어라 했을 거다. 노래하고 춤추는데 누가 들이대면 ‘너 저쪽으로 가’ 했을 것 아니냐. 산문 시대가 충분히 꽃피지 못하고, 못다 한 산문 시대의 한을 막 풀어내고 있는 것 같다.

■ 남북한 냉전 시대

고은 우리에겐 원시적인 적이 있다. 상호 변화를 시켜야 하는데 더 적으로 만들고 있다. 성장 절대주의와 안보 절대주의가 우리를 황량하게 만든다. 꽃이 필 봄이 없고, 열매 맺을 가을이 없다. 총을 메고 있는 보병만 있을 뿐이다.

송호근 적의 개념을 바꾸려고 노력한다. 주적 개념도 바꾼다. 다 끌어안는다고 개념을 변화시켜나가는 중인데, 과거에 엄청 상처받은 분들이 너희들은 적개심을 모른다며 적개심을 계속 재생산한다. 적개심을 갖지 않으면 야단친다. 그런데 60년간의 상처를 계속 재연하면 도대체 후배 세대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냐. 그 적개심을 가지고 자손들한테 다시 전쟁해야 한다고 상기시키면 그건 말이 안 되는 거다.

고은 적대적인 건 지워질 수 없는 것이다. 한국전쟁 때 죽음 자체가 아직도 현재화되고 있다. 내 문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애도다. 한반도에서 많은 죽음이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 자체가 무덤이다. 이 무덤의 곳에선 신을 매도해야 한다. 우리는 정말 쟤네(북한 지칭)와 비교할 수 없이 화려하게 살고 있다. 북한 도로는 도로를 위해서 있다. 인민의 도로가 아니다. 인민은 이동의 자유가 없다. 신고제다. 출타증이 나와야 하고, 들어오는 허가가 나와야 하는 구속된 존재다. 우리는 돈 몇 푼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이렇게 우월한데, 우월하면 우리가 달래서 동생이다 조카다 해야지, 맞짱을 뜨고 있다. 그러니 안 큰다. 심리적으로 어른이 돼야 하는데, 이러니까 걔네가 우리 적이라 생각하고 있다. 어느 한쪽이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도 하고 사탕도 하나씩 주고 살아야 한다. 저기에 운석이라도 떨어져 박살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앓는 이를 갖고 있는 것처럼 치통을 지속시킬 필요가 없다.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을 이유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만드는 것, 저것을 빙자해서 내 우월성을 키우는 것, 내가 위대하다고 하는 것. 이건 자기 내부의 졸렬함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송호근 만델라가 대통령 할 때 ‘인종차별을 잊지는 못한다. 그러나 용서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정치를 펼쳤다. 그런 마음이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겠다.

고은 지구도 빛나는 별이란 것을 그런 사람들을 통해 안다. 나는 분단에 관해서는 슬프다. 울음밖에 안 나온다. 이 울음이 100년 뒤에 누구의 웃음으로 바뀌면 얼마나 좋을까.

송호근 1930년생 어른이 분단을 생각하면 울음이 난다는 것은 기막힌 이야기다. 지금 이 시대는 분노가 생성된다 한다. 그런데 울음이 난다고 하니, 그 안에 답이 있는 거라고 본다.

고은 시인 ⓒ 시사저널 이종현
■심화되는 양극화

고은 양극화, 지금까지 수많은 경고가 있었다. 우리가 발언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문화를 ‘제2경제’라고 발언했다. 그때 우리는 문화를 경제에 종속되는 경험으로 받아들였다. 오늘날은 문화가 제2 경제도 아니고, 서열로 보면 제5 경제쯤 된다. 그리고 경제 자체가 문화다. 자본에 의해 귀속돼 있다. 자본에 의해 규정된다. 시(詩)가 한 편에 몇천 원, 몇만 원이란 건 자본 개념이 아니다. 자본에서 멀리 있는데, 자본은 앞으로 간다. 자본의 폭력성은 어떤 규제로도 쉽게 안 된다. 현재 정치가 경제에 예속당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 전엔 정치가가 재벌 회사 회장보다도 위에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대통령이니 뭐니 해도 뒤에서 리모컨으로 조정한다. 경제가 자본이라는 시대다. 함부로 양극화를 말할 때가 아니다. 가진 자가 더 많이 갖는 것이 자본이다. 이건 기본 생리다. 욕망이 아니다. 생존이다. 자본의 생존은 그렇게 간다. 그래서 자본이 없는 곳은 가장 먼 곳에 있다. 자본은 우주적이다. 여기서 윤리, 도덕 지껄이는 거 소용없다. 몇 사람의 지혜로운 언어로 양극화를 어떻게 하느냐는 건 미봉이다. 자본을 어떻게 퇴화시키느냐, 자본의 인류학적 삶의 방식을 퇴화시키느냐, 예전에 공룡이 없어지는 것처럼 자본이 없어지느냐 이런 거였다. 지금은 혁명으로도 안 된다.

송호근 질곡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다.

고은 질곡은 조건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악화되고 심화된 질곡만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지혜다. 질곡을 영원히 없앤다거나, ‘영원한 낙토’를 말하는 건 다 거짓말이다. 낙토는 없다. 극락은 백일몽이다. 극락과 천당은 우리가 만들어놓은 것일 뿐이다. 나는 이 세상의 질곡을 깨부수는 언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송호근 본질적으로 동의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는데, 이것을 어느 정도 약화시키느냐, 아니면 그대로 방치하느냐의 문제다.

고은 우리는 진짜 가진 자다. 사치스럽다. 아프리카에 가면 우리는 진짜 가진 자다. 인류를 보면 우리는 호강에 겨운 소리를 하고 있다. 그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아프가니스탄 가고 이라크 가면 날마다 폭탄으로 죽어나간다. 지구의 사정이 그러니까 원시안과 근시안을 함께 앓아야 한다. 눈병을 앓을 바에는 둘 다 앓자는 거다. 우리 현실만이 현실이 아니고, 가치도 우리만의 가치가 아니다. 정말 가치는 다양한 색깔을 갖고 있다.

송호근 그런 면에서 보면 한국의 문제도 심각하다. 세계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접은 지 오래됐다는 점이다. 공통적인 문제를 생각하거나 사회의 움직임에 별 관심이 없다. 피상적인 얘기지만 1960년대 이후로는 먹고사는 것을 나아지게 하려는 노력에만 정신이 다 팔렸다. 지식인도 그렇고, 정치하는 사람, 경제하는 사람도 다 그렇다. 모든 시각이 내가 좀 살기 위해서 ‘너 양보해라’라고 한다. ‘내가 얼마나 고생하는데’라고 한다. 나는 인생의 뼈를 바쳤는데 무슨 소리냐고 한다. 철도 파업만 해도 ‘내가 국가사업 수행하려고 하다 이렇게 된 건데 왜 그러냐’ 이거다. 오해가 많다. 이렇게 한국 사람들이 내부 문제에 매몰된 지 60년이 지났다.

고은 역사도 자연이다. 춘하추동이 있다. 역사의 기승전결, 언젠가는 통일된 아침이 있을 것이다. 싸우다 나중에 하나로 통일됐다. 신라가 통일됐다고 하지만 다 분단 시대 아닌가. 역사학에서는 남북조 시대, 신라 후기와 발해, 이게 바로 분단이다. 분단의 계절이 지나면 통일의 계절이 온다고 본다.

송호근 교수 ⓒ 시사저널 이종현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현상

고은 (학생들 대자보에) ‘타파하자’ ‘저항하자’ ‘때려 부수자’는 소리가 없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게 그때의 저항하자는 소리와 지금의 언어와 질적으로 같다. 이것을 무서워해야 한다. 심상치 않다. 개개인 하나하나가 삶의 고충을 표현하는 것이다. 비정치적이라고 우습게 알지 말고 이게 무서운 하나의 경종이라고 숙고하면 좋겠다.

송호근 이 시대 청년들의 분노와 절망과 희망을 표출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몽둥이 들고 나왔을 것이다. 그러지 못하고, 그래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는 청년들이 좌절을 표현하는 부드러운 방식이다. 역사는 그 자체로 자연이고 생물이라고 했다. 춘하추동이 있다고, 그리 전개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역사는 지배 집단과 주류의 기록이다. 근데 ‘안녕들 하십니까’는 문학의 영역 같다. 문학이 생명력을 갖는 것은 말하지 못한 사람들을 무수히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게 하라, 한반도의 스토리로 가득 차 있는 이곳에서 무슨 말이든 못하겠나. 하지만 언론에서 기사도 잘 안 써주고, 드라마에서도 재벌 2세만 나온다. (청년들은) 거기서도 외면돼 있다. 한반도의 99%를 형성하고 있는 서민들의 스토리가 대변되는 게 없다. 거들떠보지 않는 서러움이다. 이 정권도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국민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내가 국민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구경해주세요’다. 내가 얼마나 잘하는지 ‘봐주세요’다. 하지만 상대방은 국민이다.

고은 예전에는 ‘더는 못살겠다, 갈아보자’ 이런 강렬한 정치 언어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다. ‘안녕들 하쇼’. 중인들이나 서민들이 하는 언어를 대학생이 쓴 거다. 상하가 다 통하는 언어라서 퍼지기 시작한 거다. ‘안녕들 하셔’를 좀 더 빈정거리면서 표현한 것이다. 서민의 희로애락이 있다. 궐기하라는 학생의 언어로 끝나는 건데, 지금 이거는 대학가가 아닌 국민적인 언어다.

■ 잉여 인간과 잉여 사회

고은 이게 새로운 언어로 등장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잉여 인간’은 희망이란 말이 파괴되는 사회에서 산다. 우리에게 ‘희망’과 ‘꿈’은 황홀한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꿈으로 끝나고 희망이라는 거품으로 끝난다. 희망이라는 게 꽃도 안 피고 열매도 안 맺는다. 이렇게 거품이 되면서 희망이 파괴된다. 전쟁이 난 후에도, 휴전이 시작됐을 때도 희망이란 꿈에 부푼 젊은이들이 자라나서 사회에 있었다. ‘희망과 꿈’이 ‘의지’란 말보다 앞에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희망과 꿈이란 말이 세상의 의미가 아니고 그냥 남아 있는 구호가 아닌가 싶다. 나는 희망이란 말을 함부로 권하고, 희망을 가지라고 권하는 바보스런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다만 희망이 꽉 차고 넘칠 땐 희망이 필요 없다. 내일이 있다. 오늘만 있고 내일, 모레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라면 희망이란 말이 필요 없다. 그냥 살아가면 되니까. 근데 사실 희망이란 것은 여지가 없고 절망일 때 더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세상에 떠도는 희망이란 언어보다 나 자신의 심장에서 발생시키는 희망의 말을 하나씩 가졌으면 좋겠다.

송호근 과거에 비해 기회의 창구가 닫혀 있다. 경쟁의 밀도가 10~20배 높아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벽을 뚫을 수 없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잉여’ 소리를 듣는다. 나는 이런 형태의 문명의 순간은 그 전에도 많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의 움직임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경쟁은 훨씬 더 커진다. 그러면 잉여의 바닥까지 안 내려간 건 뭘까. 잉여의 바닥은 뭘까. 자신이 취직할 가능성이 있으면 노동운동에 안 뛰어든다. ‘나 여기서 일자리 잃으면 끝이다’ 하는 사람이, 예를 들어 식자공이 필요 없어지면 그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나가는 것이다. 지금 잉여라고 말하는 젊은 세대는 아직 나갈 구멍이 있다. 통로가 있다. 다만 힘들 뿐이다. 힘들다는 푸념이 잉여로 표출된 것뿐이다. 기성세대에게 ‘고쳐달라, 우리는 힘이 없다’고 하는 하소연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기성세대는 지금 질주하는 기관차인데, 우리도 멈출 수 없다고 한다. 사실은 어른들도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못 뛰어내린다, 너희들이 해결하라고 한다. 우리가 못 뛰어내릴수록 저쪽이 닫힌다. 결국 역사라는 게 젊은 세대의 극단적 반항으로 새살이 돋는다고 생각하는데, 잉여의 진원지에서 어떻게 보면 혁명의 씨앗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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