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급 전범’ 행보 닮아가는 아베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3.12.03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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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당시 절대 권력자 도조 전 총리와 비슷한 움직임

일본의 태평양전쟁을 말할 때면 ‘대동아 공영권’ ‘황국 사관’ ‘황군’ ‘야스쿠니 신사’ 등이 떠오른다. 섬뜩한 역사적 단어와 함께 강렬하게 우리에게 기억되는 한 사람이 있다. 일본 헌정 사상 가장 악명 높은 절대 권력의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다. 그는 일본 육사를 졸업한 군인이자 1941년 일본의 40대 총리에 오른 인물이다. 일본의 침략기에 야전사령관으로 명성을 떨쳤고 현역 군인 신분으로 총리·내무장관·육군장관 등을 역임했다. 그간의 관례를 깨고 육군장관과 참모총장을 겸임했다.

1941년 7월부터 12월까지 일왕을 둘러싼 무리들은 미국과의 전쟁을 논의했다. 도조는 이 자리에 매번 참석했다. 네 번의 회의 중 세 번째부터는 총리라는 직책을 얻었다. 네 번째 회의에서 그는 미국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태평양전쟁의 주범인 것이다. ‘대동아 공영권’ 건설을 내걸며 1943년 ‘대동아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동시에 부정선거와 헌병 정치로 국내 통제를 극단적으로 강화했다. 그 결과 일본 내 모든 권력은 도조의 손에 쥐어졌다. 도조의 시대는 그래서 ‘도조 독재’ 시대로 표현된다.

엄청난 위세를 떨친 도조의 생은 1948년 12월23일 스가모 구치소에서 교수형으로 마무리됐다. 그에게는 ‘A급 전범’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왼쪽부터) ⓒ UPI 연합, ⓒ AP 연합
아베 외조부 기시, 도조 전 총리의 최측근

“침략에 대한 정의는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정해져 있지 않으며 국가와 국가 간 관계에서는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침략의 의미를 왜곡한 아베 신조 총리 역시 두 번째 집권을 통해 이전에 미처 이루지 못했던 과거사 부정, 개헌 등을 야심차게 추진 중이다.

6선의 아베는 일본의 대표적인 세습 정치인 중 한 사람이다. 도조가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막강 정치 세력이었다면, 아베 가(家)는 일본 전후 정치에서 위세를 떨친 가문이다. 할아버지 아베 히로시는 중의원이었고, 전후 총리를 지낸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에서 그림자 총리로 활약했던 A급 전범이었다. 그는 도조 총리의 최측근이기도 했다. 특히 기시는 도조 내각에서 군수차관과 국무장관을 지냈다. 일본이 중국에 세운 만주국의 설계자로서 도조의 침략 정치를 실천한 사람이다.

도조가 육군장관을 겸임한 것은 전쟁 체제가 끝나고 평화 체제가 왔을 경우를 가정한 것이다. 전쟁의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참모들을 통제해 쿠데타를 막기 위해 육군장관까지 맡았다. 현역 군인으로 총리 자리에 오른 것도 그래서다. 내무장관을 겸임한 것도 비슷한 의도에서다. 내무장관은 경찰 권력을 쥐고 있었다. 권력의 집중과 통제로 그는 ‘도조 시대’가 계속되길 원했다.

아베가 지금 취하고 있는 정치적 행위를 뜯어보면 외할아버지의 최측근이었던 도조와 궤를 같이한다. 11월27일 일본 참의원 본회의에서는 하나의 법안이 날치기로 통과됐다. 일본판 NSC라고 불리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창설 법안이 그것이다. 일본판 NSC는 빠르면 내년 상반기 출범을 목표로 한다. 수장은 아베 총리가 맡는다.

아베가 추구하는 보통 국가는 ‘정치·외교·군사·경제 주권을 확립하고 국력에 걸맞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다. 그것을 향한 첫발이 NSC 설치다. 통과된 법안에 따르면 국무총리·관방장관·외무상·방위상 등 4자 회담을 중심으로 운영되지만 필요에 따라 다른 각료를 추가할 수 있다. 특히 지금까지 흩어져서 수집되던 각 부처의 정보를 일원화하도록 만들었다. 부처 간의 조율 그리고 정책 입안을 담당하는 곳은 NSC 사무국이다. 총리의 비서실 역할을 하는 내각 관방에 설치될 국가안보국은 외교·안보·테러·치안 등과 관련한 정보를 취합해 보고한다. 모든 정보는 총리 관저로 집중된다.

1944년 2월21일 도조의 결단과 닮았다. 이날 도조는 총리직에 더해 참모총장 겸임을 단행했다. 이날의 결정이 중요한 것은 도조가 ‘천황 대권주의(일왕은 정치대권과 군사대권을 가진다)’를 내세워 권력 집중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는데, 그중 하나가 궁중에 설치한 국무회의다. 일왕의 권위를 빌미로 한 강력한 의사 결정 시스템을 확립했다.

특정비밀보호법과 NSC로 총리 권한 강화

사회적 발언으로 유명한 일본의 유명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도조는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를 주위에 두고 비판적인 언론을 탄압했다. 또한 헌병을 통해 국민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감시하는 어두운 사회를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대표적인 것이 죽창 사건이다. 1944년 2월23일 마이니치신문은 ‘해군의 항공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때는 한정된 항공기를 두고 육군과 해군의 물자 다툼이 심각했던 시기다. 해군은 환영 일색이었지만 육군은 달랐다. 특히 육군장관을 겸직하고 있던 도조는 분노해 신문의 발매 금지와 편집국장에 대한 제재를 요구했고 결국 편집국장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기사를 쓴 해당 기자는 37세의 나이에 전쟁에 소집됐다. ‘징벌성 징집’이었다.

2013년 11월21일 NSC 논의가 한창 무르익고 있던 무렵 도쿄 히비야 야외음악당에는 1만여 명이 모여 집회를 열었다. 일본에서는 드문 규모의 집회였는데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목표로 삼은 것은 단 하나였다. 특정비밀보호법안의 백지화였다. 아베는 특정비밀보호법을 NSC와 패키지로 도입하려고 한다. 내각정보조사실에서 만들고 있는 이 법안은 행정기관이 지정한 특정 비밀을 누설하거나 알고자 한 사람에게 중형을 부과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행정기관의 장이 ‘국가 안보에 지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면 국회에 대한 비밀 정보 제공을 거부할 수 있다. 심지어 국회의원이라도 특정 비밀을 누설하면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아베 정권은 NSC를 통해 미국 등으로부터 비밀 정보를 얻어 정책을 결정하는 데 참고하겠다는 방침을 세워두고 있다. 따라서 해외에서 비밀 정보를 얻으려면 일본 내에서 그 비밀이 새지 않도록 할 법률이 필요하다는 논거를 대고 있다.

특정비밀보호법안이 NSC와 합쳐질 경우 생길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상황은, NSC가 결정을 내릴 때 그 판단 자료가 일절 공개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데 있다. 회의록 작성도 의무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책 결정 과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일종의 블랙박스가 생기는 셈이다. 이 법안에 가장 날카로운 쪽은 기자들이다. 법안에 따르면 국가의 정보를 유출한 공무원에게는 최고 10년형이 떨어질 수 있다. 그동안 일본 언론의 주요 정보원으로 기능했던 공무원이 이제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미국인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루시 버밍엄 일본 해외특파원협회 회장은 “우리는 일본의 다양한 문제에 관해 중립을 유지해왔다. 반대 성명을 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며 국적에 관계없이 일본에서 취재하는 기자에게는 존망의 위기가 다가왔다고 경고했다.

이 법안은 한일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법안 23조에는 특정 비밀문서를 제공받을 경우 제공한 측이 형사처분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한 조항이 있다. 요시다 유타카 히토츠바시 대학원 교수(한국 근현대사)는 “일본 정부에 불편할 수 있는 전후 처리에 관한 사료 등이 영원히 공개되지 못한 채 어둠에 묻힐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역사 검증이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무엇이 비밀인가’라는 명제에 아무런 해답을 내놓지 못하는 특정비밀보호법이 안보의 개념을 확대 해석해버릴 경우에는 완전히 다른 목적에 사용될 수도 있다. 사실 이런 위험이 일본 내부에서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야당의 정보를 수집하거나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찰을 하는 행위도 있음직한 일이다. 도조 전 총리는 헌병 정치의 상징이다. 군인을 이용해 공포정치와 언론 탄압을 했다. 지금의 아베 총리 시대에는 경찰을 눈여겨봐야 한다.

(왼쪽부터) ⓒ AP 연합, ⓒ EPA 연합
자민당의 자신감 “우리가 야당 될 리 있나”

특정비밀보호법을 만드는 곳은 내각정보조사실이다. 수장인 내각정보관은 경찰 출신이 주로 맡는다. 170여 명의 직원 중 80여 명이 파견 근무자인데 그중 40~50명이 경찰청 출신이다. 이런 인적 구성은 특정 비밀을 지정하는 데 경찰청의 의향이 크게 반영될 수 있다는 관측을 가능하게 해준다. 정보 세계의 주도권을 쥔 경찰의 독주를 예상하는 분석도 있다. 키시이시게 타다 마이니치 신문 편집위원은 “특정비밀보호법은 치안유지법이 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1985년 특정비밀보호법안과 비슷한 법안을 없애버린 경험이 있다. 당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 시절 ‘스파이 방지법’을 폐기했는데, 당시 법안을 없애는 데 가장 적극적이었던 사람 중 하나가 이번 법안 통과를 밀어붙인 다니가키 사다카즈 법무장관이다. 다니가키는 11월11일 국가안전보장특별위원회에서 “그때(나카소네 시절)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말했다.

지난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승리를 거두면서 이른바 국회에서의 뒤틀림(중의원과 참의원의 다수당이 다른 현상)이 해소됐다. 그로부터 불과 4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개헌을 위한 사전 포석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는 “우리가 야당이 될 리 없다”는 자민당의 자신감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사민당의 후쿠시마 미즈호 의원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이 법안이 제정된 뒤 자민당이 야당이 된다면 어떻게 하는가? 그런데 그들은 이런 점을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민당 정권은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다시 도조 전 총리 시대로 돌아가서, 국무회의를 설치하고 결정권을 강화한 도조는 ‘독재자’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고 국가적으로 부침이 심해지자 정치적 반대파들은 오히려 ‘종전 운동’을 계획했고 일왕도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아베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은 ‘아베노믹스’(아베의 경제 정책) 효과를 등에 업고 총리 관저로 권한을 최대한 집중시키고 있지만, 그 약발이 다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베를 향해 ‘독재자’라는 공격이 날아들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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