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의 애첩과 통화도 엿들어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3.11.13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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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NSA 도청 파문으로 본 한국 역대 정권 도·감청 실태

한국·독일·프랑스 등 우방국을 포함한 35개국을 대상으로 벌인 미국 NSA(국가안보국)의 도·감청이 폭로된 직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사과했다. 그러나 이도 잠시다. 오바마 대통령은 “각국 정보기관들이 세상일을 더 잘 파악하고, 자국 수도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기 위해 노력한다” “이들은 공개 정보원(open source) 외에 추가적인 통찰력을 요구한다”고 했다. 현학적 표현으로 둘러댔지만, 한마디로 ‘도·감청은 모든 나라가 다 하는 일이고 미국도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기분이야 좋을 게 없겠지만, 핏대 세우지 말고 참으라’는 뉘앙스도 풍긴다.

야당 당사에 대한 도청이 발단이 된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탄핵되고 1974년 사퇴한 이래 미국에서 도·감청은 그 자체가 금기어였다. 부도덕·반인권과 동일시됐다.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정사를 녹음한 연방경찰(FBI)의 행위가 한참 뒤에 드러났을 때도 여론은 들끓었다.

미국 메릴랜드 포트미드에 위치한 도청의 본산인 국가안보국(NSA). 직원 4만여 명, 2013년 예산 108억 달러(11조5000억원). ‘스파이’의 대명사로 불리는 중앙정보국(CIA) 직원이 2만1000명임에 비춰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CIA·국가정찰국(NRO) 등 미국 16개 정보기관 중에서도 보안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NSA는 9·11 사태 이후 대테러 활동이 강조되면서 급격히 조직을 키웠다. 원내 사진은 키스 알렉산더 NSA 국장. 현역 대장인 알렉산더 국장은 NSA 정보 수집 활동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 AP 연합
도청 통해 북한 지도부 건강 상태까지 파악

그랬던 미국이 이처럼 뻔뻔해진 데는 2001년의 9·11 테러가 계기가 됐다. 이전까지만 해도 국가 이익이라는 측면에서 타국에 대한 도·감청과 공중 촬영 등은 ‘양해’ 사항으로 넘어갔으나, 일반 시민에 대한 도·감청은 엄격히 통제됐다. 그런데 9·11 이후 대(對)테러전 수행을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는 인식 아래 ‘일상화’됐다. 대통령보다 인지도가 높다는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테러 감시 대상자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국내 비행기 탑승을 거부당했을 만큼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도·감청은 도를 더해갔다.

이번 도청 파동에 대한 미국의 적반하장식 대응은 구체적 자료가 까발려진 이상 정면 돌파가 최선이라는 판단과 함께, 도·감청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는 확신에서 비롯됐다. 한국 등 우방국들의 반발에 대해선 ‘입장은 이해되지만 다 알면서 왜 그러느냐’는 투의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일부의 인적 정보’를 제외한 대북 정보 대부분을 주한미군의 첩보위성과 고공정찰기 등에 의존하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한미연합사령부가 위치한 서울의 탱고 벙커나, 오산에 위치한 한미공군구성군사령부 그리고 인근 전탐부대가 한국 방위의 초석임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 밖에 한미 양국군 공동 기구는 ‘777부대(감청부대)’ 등 여럿이 있다. 특히 오산의 전탐부대 등은 완벽하게 미군 중심으로 운용되며 한국의 대통령이나 군 최고 수뇌부 등 극소수에게나 출입이 허용될 만큼 보안이 철저하다.

“임자, 어디 있누. 빨리 오라우. 오래 있었더니 아랫도리가 뻑뻑 하구먼.” 김일성 북한 주석이 동유럽 여행 중인 애첩과 통화한 내용을 녹음한 것의 일부다. 1990년대 초반 노태우 대통령 집권 시절 서울 이문동 안기부 감청센터에서 확인한 이 육성 통화는 한미 양국이 김 주석의 동정과 건강 상태까지 꿰고 있음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북한이 무력 도발을 감행하지 못하는 게 미국의 보복 타격력 이전, 지도부의 숨소리까지 놓치지 않는 첩보력에 압도되기 때문임을 실감케 한다.

북한은 도·감청 낌새를 채면 모든 통신을 중지시키고 자전거와 차량을 이용해 작전 지시문 등을 하달하는 우스꽝스런 장면까지 수시로 연출하기도 했다. 사망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휴가 중일 때 안가 위에서 미군 스텔스 전폭기 편대가 위협 비행을 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굳이 재론할 필요가 없다.

박정희, 청와대에 도·감청 차단벽 설치

미국의 도·감청이 적성 국가에만 한정된 것이 아님은 주지의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이래저래 군사 핵심 정보를 미국에 의존해야 하는 한국 정부의 입장은 난처할 수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한국의 대통령 등 주요 요인 등을 대상으로 한 도·감청 의혹이 일단 불거진 이상 주권 국가로서 우리 정부가 못 들은 체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혈맹이라 내놓고 다투지는 못해도 안방을 넘보게까지 할 수는 없는 한국 정부가 그래서 취해왔던 대응은 청와대·국방부 등 핵심 시설에 대한 도·감청 방해 장비 설치였다. 겉으로는 북한 등 불순 세력에 맞서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미국’도 고려 대상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한국 정부가 도·감청에 본격 대응한 것은 1970년대 후반 들어서다. 지금처럼 수백 km 상공에서 자동차 번호판을 식별하는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첩보위성이나 레이저빔만으로도 웬만한 도·감청과 촬영이 이뤄지는 데 대해 한국 정부는 상당한 부담을 느꼈으나, 이렇다 할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1976년 박동선의 미국 정계 로비 사건으로 한미 간 갈등이 고조되면서 도·감청 대처는 초미의 과제가 됐다. 청와대의 일거수일투족이 미국 측에 고스란히 알려졌기 때문이다. 특히 인권을 외치던 지미 카터 대통령과 유신헌법으로 강압 정치를 펴던 박정희 대통령은 정면충돌했고, 주한미군 철수가 구체화되고 한국의 독자적 핵개발이 운위되는 가운데 미국의 정보 역량이 집중됐다. 당시 청와대가 기술상 난제와 천문학적 예산 등 무리를 해가면서 도·감청을 막기 위한 전자 차단벽 설치를 서두른 것은 그래서였다.

이에 따른 숨겨진 사연도 많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은 중앙정보부는 당시로는 감당키 어려운 예산 수백억 원을 편성해 체신부 소관 항목에 포함시켰다. 당시 여당과 팽팽하게 격돌하던 야당(신민당)의 방침은 ‘예산안 전면 저지’였다. 여권은 야당 의원 각개격파에 돌입했고, 국회 교통체신위 간사인 김은하 신민당 의원을 설득했다. 당명과 여권의 압력 사이에 낀 김 의원은 칭병(稱病)하면서 국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나머지 소속 의원 2명 중 한 명인 박 아무개 의원도 낌새를 채고 빠짐으로써 결국 야당에는 황명수 의원 한 명만 남게 됐다. ‘우직한’ 초선 황 의원은 “저지하라”는 당명에 충실했다. 체신부장관이 국회 교통체신위원장실에서 “국가를 위한 예산이다. 나중에 설명할 터이니 제발 따지지 말고 일단 통과시켜달라”며 무릎을 꿇고 애원했으나 끝내 거부했다. 황 의원은 훗날 민자당 사무총장, 국회국방위원장, 국회부의장이 되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괘씸죄로 고생깨나 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변호사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이런저런 곡절 끝에 생긴 게 오늘의 청와대 도·감청 차단벽이다. 수차례에 걸친 이노베이션으로 성능이 대폭 개선됐다지만 기본은 레이저 광선을 발사해 벽에 부딪친 반사 파장을 재생하는 도·감청 시도를 차단하는 것이다. 김영삼(YS) 대통령 시절인 1990년대 중반 청와대 생중계 당시, 폭음으로 소동을 빚은 것도 사실은 이 전자 차단벽 때문이었다. 당시 방송 풀 차례였던 A사가 대통령 특별담화를 마이크로웨이브로 쐈는데, 오전까지 예정에 없던 일정이 끼어든 탓에 경호실과 협조가 안 돼 차단벽은 여전히 가동 상태였고 이 때문에 큰 폭발음이 발생한 것이다.

사실 한국 정부가 미국의 도·감청에 대해 정색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미 정보 의존도 못지않게 역대 어느 정부건 도·감청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태우 정부 당시 안기부가 과거 비사를 꺼내들고 여권을 협박하는 ㄱ의원의 차량에 도청 장치를 부착해 ㄴ여인과의 정사 전반을 녹음한 후 주저앉힌 일화가 있다. 도·감청이 보편화돼 웬만한 정·재계 인사들은 2~3개, 어떤 이는 수행 비서관에게 5개의 전화를 들고 다니도록 해 번갈아 사용하고 그나마도 수시로 교체했는데 ㄱ의원의 경우는 차량까지는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대책 없이 당한 경우다.

지금은 철거된 청와대 본관. 1990년대 초까지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자리했다. 1970년대 말, 박정희 대통령은 전자 장비를 동원한 외부 도청에 대처하기 위해 청와대 주위에 전파 차단벽을 설치했다. 예산 등 여러 부담에도 차단벽 설치를 서두른 것은 적성 국가의 위협 못지않게 미국의 무차별 도청에 대한 방어 필요성이 컸기 때문이다. ⓒ 연합뉴스
YS가 이인제에 ‘대권’ 언질한 통화도 도청

YS는 야당 총재 시절 수시로 도·감청 문제를 제기하면서 야당 탄압을 외쳤다. 그러나 막상 본인이 대통령으로 재임할 때 도·감청은 활성화됐다. 정·재·언론계 인사들이 출입하는 음식점 등에는 안기부 ‘미림팀’의 도청 장치가 빠지질 않았다. 진즉에 알려졌다면 정부가 뒤엎어질 만한 숱한 불·탈법이 일상화됐다. 당시 청와대를 담당했던 기자가 직접 체험한 실화도 있다.

“이인제 경기도지사를 잘 살펴보라”는 귀띔이 안기부 지인에게서 전해졌다. 경기도지사 전화를 감청하던 중 YS가 이 지사에게 ‘준비’를 당부하는 순간을 체크했으니 주목하라는 것이다. YS가 출입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후계자로 ‘깜짝 놀랄 만한 젊은 인물’을 거론해 많은 이가 어리둥절했을 즈음이었다. 그 인물이 바로 이 지사였던 것이다. 결국 ‘김심(金心)’을 업고도 이회창 후보에 밀려서 신한국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지 못한 이 지사는 당을 박차고 나가 독자 출마의 길을 택했다.

도·감청에 관한 한 YS보다 더욱 날카롭게 반응했던 인물은 김대중(DJ) 전 대통령이다. 야당 지도자 시절 중정이나 안기부의 도·감청과 미행을 질타했던 DJ는 대화할 때면 항상 라디오를 켰다. 기자와의 10여 차례 만남에서도 이는 결코 예외가 없었다. 도·감청을 막기 위한 그 나름의 대응책이었다. 그가 각계 인사들과 접촉하던 동교동 서재가 지하에 위치한 것도 도·감청과 무관치 않다. 하지만 DJ 역시 집권한 이후 국정원에서 도·감청이 여전히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DJ 집권 당시 국정원장이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지난해부터 우리 국방부와 합참본부가 도·감청 방지 및 탐지 장비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를 피해가는 장비 또한 쉴 새 없이 개발되는 요즈음이다. 이는 도·감청이 만연해 있고, 반대로 얼마든지 보안벽을 뚫을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정부세종청사 국무회의장과 국무총리실이 도청에 취약한 것은 이미 증명된 바다. 미국은 120여 개의 첩보위성을 동원한 통신 감청망 에셜론(Echelon)을 통해 지구를 꿰뚫어보고 있다. 전화·팩스·이메일 등 하루 30억건을 걸러낸다. 이 에셜론마저 묵은 버전이다. 2007년 가동된 프리즘(Prism)은 구글·페이스북 등 인터넷과 통신회사의 중앙 서버에 접속해 거의 모든 통신 내용을 체크하고 있다. 이런 세상에 사는 오늘날, 도·감청 대응이 국익과 직결된다는 심각한 인식부터 가다듬는 것이 순서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도·감청에 치중하느라 자칫 방심하기 쉬운 ‘인적 스파이’에 대한 엄중한 대처가 중요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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