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자고 나갔는데 죽자고 달려든다
  • 하재근│문화평론가 ()
  • 승인 2013.10.02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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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출연자들, ‘부상 투혼’에 떠밀려 줄줄이 병원 신세

개그맨 이봉원은 안면이 일부 골절돼 수술을 받았다. 배우 클라라는 허리 부상을 입었고, 샘 해밍턴은 목 부상을 입어 최근까지도 목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이훈은 안면, 임호는 온몸에 피멍이 들었고 그 외에 여러 연예인이 크고 작은 사고로 고통을 호소했다. 바로 다이빙 도전 예능 <스플래시>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 사태의 여파로 <스플래시>는 가학성과 위험성에 대해 큰 비난을 받고 결국 조기 종영하고 말았다.

이런 가학성은 <스플래시>만의 문제가 아니다. <스플래시>가 방영되기 전엔 김범수가 <맨발의 친구들> 녹화 중 무릎 부상으로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고 수술을 받았다. <파이널 어드벤처>에선 여성 출연자가 손 부상을 당했다. <정글의 법칙>에선 정준이 고산병으로 중도 하차했다. 웃자고 하는 예능인데, 죽자고 달려드는 분위기다.

요즘 예능에선 ‘부상 투혼’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회자된다. 부상 투혼은 과거 목숨 걸고 금메달에 달려들던 시절의 유산으로, 요즘엔 스포츠계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부상 투혼보다 선수 보호를 더 중시하는 분위기가 된 것이다. 그런데 웃자고 하는 예능에서 부상 투혼이 성행하고 있다. 어떻게 된 일인가.

녹화 중 안면 골절 부상으로 수술을 받은 개그맨 이봉원. ⓒ MBC 캡쳐
리얼리티 전성시대는 바로 ‘생고생’의 시대

이 모든 일은 리얼 버라이어티와 함께 시작됐다. <무한도전>이 리얼 버라이어티 바람을 불러일으키기 전까지 예능은 주로 스튜디오에 일정 시간 앉아서 정해진 순서대로 멘트만 하면 되는 식이었다. 그런데 <무한도전>은 스튜디오 밖으로 나가 체력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소리를 지르고 뒹굴었다. 이것은 기존 예능과는 차원이 다른 생생함을 전해줬다. 이때부터 김용만·남희석·이경규 등 스튜디오에 남아 있던 기존 스타 MC와 유재석의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유재석이 도발한 리얼 버라이어티 체력전에 적극적으로 응전한 건 강호동이다. 강호동은 <1박2일>을 통해 야외 취침이라는 신병기를 쏘아 올렸고, 그게 익숙해질 때쯤엔 ‘겨울철 얼음 깨고 계곡물 입수’라는 새로운 고통의 미학을 선보였다. 그러자 웬만한 고생은 시청자의 성에 차지 않는 시대가 됐다.

사람은 자꾸 자극을 받으면 그 자극에 익숙해져서, 결국 자극을 자극으로 느끼지 못하게 된다. 둔감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극으로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시작하면,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줘야 하는 수렁에 빠진다. <1박2일>이 바로 그런 자극 둔감화의 법칙을 보여준다.

<1박2일>에서 처음 야외 취침을 선보였을 때 사람들은 놀랐다. 야외 취침을 걸고 하는 복불복 게임에 시청자가 몰입했던 건, 야외 취침이 굉장한 벌칙이라고 인식해 게임에서 스릴을 느낀 탓이다. 그런데 그게 반복되자 시청자는 야외 취침에 둔감해졌고, 복불복 게임의 긴장감도 떨어졌다. 이젠 야외 취침이 리얼 버라이어티의 기본 옵션처럼 변해서 심지어 <아빠! 어디가?>에선 어린이들마저 야외 취침으로 내몰린다.

<1박2일>에서 처음 겨울철 입수를 선보였을 때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바로 가학성 논란이 터져 나왔다. 1년쯤 지나자 입수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고, 그에 따라 얼음을 깨고 입수하는 수준으로 자극이 강해졌다. 남자의 입수에 둔감해지자 <1박2일>에선 결국 여자들의 입수까지 등장했다. 최지우가 찬물에 놀라 비명을 지르자 사람들은 박장대소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예능 출연자들이 감내해야 할 고통의 수위는 점점 높아졌고, 한때 생고생 예능의 새 장을 열었던 <1박2일>이 요즘엔 그저 팔자 좋은 지역 유람 정도로 여겨지게 됐다. 워낙 고생의 수위가 높다 보니 요즘엔 예능 출연자들이 프로그램 속에서 날것의 정서를 드러낸다. 잘 울고, 화도 잘 낸다.

<진짜 사나이> <정글의 법칙> <심장이 뛴다> 등에서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시청자는 울 땐 감동받고, 화낼 땐 짜증내며 반응한다. 매체는 이런 걸 휴머니즘이니, 리얼리티니 하는 가치들로 포장해 출연자들을 더욱 쥐어짠다. 그렇다 보니 그런 정도로 격정적인 감정을 끌어내지 못하는 평범한 고생(?) 프로그램은 시청자들로부터 외면을 받는다. <맨발의 친구들>은 과거 <1박2일> 수준에 버금가는 고생 여행을 선보였지만 웰빙 유람이냐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다. 같은 시간대에 <진짜 사나이>에서 40세 전후의 남자들이 유격 훈련을 받아가며 눈물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녹화 중 무릎 부상으로 수술을 받은 가수 김범수. ⓒ SBS 캡쳐
눈물과 감동의 가학 휴머니즘

감동의 휴머니즘을 더욱 강화한 건 ‘도전’의 유행이다. <무한도전>은 글자 그대로 도전하는 포맷이었는데, 점점 힘든 것에 도전하다 레슬링에까지 진출했다. 이건 정말 힘들고 위험한 일이어서, 그런 만큼 몰입도가 높았고 도전을 완수한 후 감정의 진폭도 컸다. 출연자와 시청자가 다 함께 울면서 감동했다. 이때 이후 부상의 위험을 무릅쓰는 도전이 당연시됐다.

요즘 예능에선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앞에서 언급한 <스플래시>의 사고들이 바로 한계를 뛰어넘는 감동의 도전을 하는 가운데 일어났다. <진짜 사나이>에서 김수로는 한계를 뛰어넘다 어깨 부상이 악화됐고, 미르는 허리 부상이 심해졌다.

그렇게 고통을 끌어안고 한계를 뛰어넘지 않으면 시청자에게 채찍질을 당한다. <무한도전>에서 레슬링에 도전할 당시 부상당할 뻔한 박명수가 위험한 기술을 회피하자 네티즌의 비난이 쏟아졌다. 반면에 부상당한 몸으로 진통제를 맞고 레슬링에 임한 정준하에겐 찬사가 쏟아졌다. <스플래시>에선 허리를 다친 클라라가 고난도의 기술을 선보이지 못하자, 왜 온몸에 피멍이 든 임호처럼 하지 않느냐며 비난했다. 사람들이 고생과 고통이 주는 자극성, 감동에 중독된 것이다.

이봉원은 그런 시청자의 기대에 부응하다 결국 안면 골절로 수술대에 누웠다. 지금과 같은 분위기에선 앞으로 더 많은 예능 출연자가 병원 신세를 지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스플래시> 제작진을 비난했지만, 지금의 사태를 만든 건 바로 사람들 자신이다. 대중이 고통과 감동이 주는 강한 자극성을 요구하다 보니 제작진은 그런 쪽으로만 기획을 하게 되고, 연예인도 그런 방향으로 가다가 일어난 사고다.

수술을 받을 정도가 아니라면 예능 출연자가 아무리 고통을 호소해도 사람들은 그저 웃기만 한다. 출연자가 고통 끝에 눈물을 흘리면 시청자는 감동받았다며 좋아한다. 타인의 고통과 눈물이 엔터테인먼트로 소비되는 시대.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건 사이코패스의 특징이다. 그럴 정도로 우리 사회가 황폐해져가는 것이다. 악플이 창궐하는 것도 이런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오늘도 우리는 뜨거운 휴머니즘의 감동을 위해 연예인들을 고통의 장으로 몰아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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