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피’보다 진했다
  • 김지영 기자 (young@sisapress.com)
  • 승인 2013.10.02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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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그룹 현재현 회장 부부 도움 요청 담철곤 회장 부부 “죄송합니다”

공기업을 제외한 재계 순위 38위 동양그룹이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그룹 자체가 해체될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회사채와 기업어음(CP) 등 떠안고 있는 채권만 2조2000억원. 올해 안에 해결해야 할 채권만 1조2680억원(CP 7870억원, 회사채 2250억원, 전자단기사채 2560억원)에 달한다.

그래서 ‘한 식구’인 오리온그룹에 손을 내밀었다. 오리온그룹 담철곤 회장은 동양그룹 현재현 회장의 손아래 동서다. 담 회장의 부인 이화경 오리온 부회장이 현 회장의 부인인 이혜경 동양 부회장의 여동생이다. 동양그룹은 이화경 오리온 부회장 등이 보유한 오리온 지분 14.49%(8000억원)를 담보로 동양이 발행하는 자산유동화증권(ABS) 신용을 보강해달라고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담철곤·이화경 부부는 거절했다. 오리온그룹은 9월23일 보도자료를 통해 “오리온그룹과 대주주들(담철곤·이화경 등)은 동양그룹에 대한 지원 의사가 없으며 추후에도 지원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당장 10월에 채권 4200억원을 막아야 하는 동양 입장에선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형국이다. 동양그룹 내부 사정에 밝은 재계 인사는 “동양그룹의 유동성 위기는 일시적인 게 아니다. 오래전부터 예견돼왔다. 최근 몇 년 동안 건설·시멘트 등 제대로 진행된 사업이 거의 없었다”며 “이런 상황에서 담 회장 일가가 오리온 지분을 담보로 내놨다가는 회사 경영권을 위협받을 수 있다. 오리온으로선 동양의 요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말했다.

왼쪽부터 이혜경 동양그룹 부회장,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이관희 서남재단 이사장, 이화경 오리온그룹 부회장,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 ⓒ 시사저널 포토
현재현 일가 동양네크웍스 지분 매입, 왜?

오리온그룹의 한 거래업체 사장은 “담 회장은 (2011년 6월)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된 전력이 있다. 이후 (오리온) 거래업체들 사이에 ‘담 회장이 방어적인 경영을 한다’ ‘새가슴이 됐다’는 말이 돌았다”며 “오리온그룹 차원에서 동양그룹을 지원했다가 자칫 담 회장이 배임 혐의를 받을 수도 있다. 구속된 경험이 있는 담 회장으로선 이 점도 간과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 이유가 어찌 됐든 담철곤·이화경 부부는 ‘핏줄’이 아닌 ‘돈’을 선택한 셈이다. 그렇다면 친자매가 등질 수밖에 없었던 데는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동양가(家)의 내력을 들여다보자. 국내 재벌가에서 처음으로 사위가 경영권을 승계한 곳이 바로 동양그룹이다. 북한에서 식품도매상으로 큰돈을 번 창업주 고 이양구 회장이 홀로 월남해 교사 출신인 이관희 여사(현 서남재단 이사장)와의 사이에 딸만 둘을 낳았다. 다른 재벌가와 달리 혼맥도 단순하다. 장녀 이혜경 동양그룹 부회장은 현재현 회장과, 차녀 이화경 오리온그룹 부회장은 담철곤 회장과 결혼했다.

장녀 혜경씨는 이화여대 미대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6년 현재현 회장과 결혼했는데, 평소 집안끼리 잘 알고 지냈던 고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이 중매를 섰다.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현 회장은 당시 부산지검 검사였다. 현 회장의 조부는 고 현상윤 고려대 총장, 부친은 고 현인섭 이화여대 의대 교수다. 현재현-이혜경 부부는 슬하에 1남 3녀가 있다. 모두 미국 스탠퍼드 대학을 나왔다. 장녀 정담씨는 MBA(경영학 석사)를 거쳐 동양매직 상무로, 장남 승담씨는 지난 6월부터 동양네크웍스 대표이사로, 차녀 경담씨는 동양온라인 본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막내딸 행담씨는 유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권에서는 자금난에 봉착한 동양그룹 오너가의 사재 출연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사재 출연을 한다 해도 2조2000억원에 달하는 채무를 해결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현 회장과 부인 이 부회장 그리고 1남 3녀, 여기에 이관희 이사장 등의 ㈜동양 지분을 모두 합쳐도 11.05%(주식 가치 280억원) 정도에 불과하다. 지배구조를 고려했을 때 주식을 내놓기도 쉽지 않다.

“두 사위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관계”

그럼에도 현 회장의 장남 승담씨, 장녀 정담씨, 차녀 경담씨 등이 지난해부터 동양네트웍스 지분을 사들이고 있어 주목된다. 이관희 이사장이 동양네트웍스에 오리온 주식 1500억원 상당을 증여한 것도 의문이다. “왜 자금 압박을 받는 ㈜동양이나 동양레저가 아닌 동양네트웍스에 증여했느냐”는 것이다. 만약 동양그룹이 해체된다 해도 동양네트웍스만은 살아남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현 회장 일가가 동양네크웍스를 통해 제 몫 챙기기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곱지 않은 시선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언니의 ‘SOS’를 외면한 이화경 오리온그룹 부회장은 이화여대 사회학과 출신이다. 담 회장과 이 부회장은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로 처음 만나 열애 끝에 결혼한 후 1남 1녀를 두고 있다. 담 회장의 선친은 타이완 국적으로 대구에서 한의원을 운영했다. 이 부회장은 종종 “(남편 담 회장은) 가장 친한 친구이자 더없이 훌륭한 사업 파트너”라고 말하곤 했다.

이양구 창업주는 두 사위와 딸(이화경)에게 혹독한 경영 수업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내 딸과 사위라고 해서 특혜는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고 한다. 1989년 이양구 창업주 타계 이후 맏사위 현 회장이 동양그룹 경영권을 승계했다. 둘째 사위 담 회장은 동양제과를 맡았다. 가족 간 협의에 따른 것이다. 2001년엔 동양제과가 동양그룹에서 분가했다. 32개 동양그룹 계열사 가운데 제과와 엔터테인먼트 계열 16개사가 그때 독립했다. 그럼에도 동양그룹과 오리온그룹은 그룹 CI(기업 이미지)를 함께 사용했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동근생(同根生)’이란 의식이 강했다.

재계에서는 이혜경·화경 자매에 대해 “닮은 듯하지만 닮지 않은 자매”라고 평한다. 이혜경 부회장은 앞에 나서길 좋아하지 않는 조용한 성격으로 알려졌다. 반면 이화경 부회장은 동양제과 인턴사원으로 입사해 경영 능력을 키워왔다. 한마디로 여장부 스타일이다. 재계에서는 “이화경 부회장이 창업주를 빼닮았다”고 말한다. 사위들도 다르긴 마찬가지다. 현 회장이 정(靜)적인 스타일이라면, 담 회장은 동(動)적인 경영인으로 분류된다.

동양-오리온 두 집안을 잘 아는 재계의 한 인사는 “(동양그룹) 현 회장은 검사 출신이고, 담 회장은 화교 출신이다. 담 회장이 이 부회장과 결혼할 때 (동양그룹 창업주) 이양구 회장의 반대가 심했다”며 “현 회장과 담 회장의 스타일도 다르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두 집안 관계가 썩 나쁜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좋은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담 회장 부부는 ‘형님과 언니’의 지원 요청을 거절한 9월23일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가슴에 평생 안고 갈 빚이 될 것이고 어떤 비난도 감수할 각오가 돼 있다”고 밝혔다. ‘욕’을 먹더라도 경영권을 지키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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