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의 상상력을 가위로 ‘싹둑’
  • 오동진│영화평론가·전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 ()
  • 승인 2013.09.11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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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상영가’ 심사는 실질적 검열…표현의 자유 막는 족쇄로

좋은 영화가 나오려면 두 가지가 자유로워야 한다. 인간의 몸으로 따지면 손과 머리다. 한국 영화의 ‘손’은 좋아졌다. CG, 특수 효과 기술 등은 가히 세계적 수준이다. 이제 어떤 표현이라도 거칠 게 없다. 여름을 겨울로도 만들 수 있고 겨울을 여름으로 만들 수도 있다. 배우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도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대규모의 전투 신이 필요하다면 수십 명의 엑스트라만으로도 수천~수만의 병력을 그려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영화의 ‘머리’는 어떨까. 아직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하다. 감독이 상상하는 것을 막는 한 궁극적으로 좋은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세상의 변화는 총구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상상력에서 비롯된다. 일본의 작가 겸 감독인 무라카미 류가 영화 <69>에서 한 말이다. 그런데 한국 영화는 이 상상력 부분에서 덜컥 막히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 바로 ‘제한상영가’란 심의등급 때문이다.

7월18일 장철수 감독이 영화 의 상영 금지를 반대하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제한상영관’

1996년 헌법재판소가 모든 영화에 대한 검열 행위를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영화계는 드디어 족쇄가 풀렸다고 반가워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한국 영화의 신(新)르네상스가 시작된 시기는 바로 이때부터였다. <쉬리>가 나온 것도 이 이후였고 <공동경비구역 JSA> <실미도>와 같이 분단 상황에서 그간 쉽게 다루지 못했던 금기의 소재를 영화로 만들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것도 헌재의 판결 이후였다.

그러나 완결된 구도는 아니었다. 모든 검열은 철폐됐지만 ‘연령별 등급 심의’의 덫이 남아 있었다. 세계의 모든 영화는 상영 전에 연령별 등급을 받아 대중에게 공개된다. 우리의 경우 다섯 개의 등급이 있다. 전체 관람가와 12세 이상 관람가, 15세·18세 이상 관람가가 있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있는 것이 바로 이 제한상영가다.

제한상영가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다. 18세 이상의 연령대가 보더라도 과하다고 느껴지는 작품들의 경우 ‘제한 상영’을 시키겠다는 취지의 등급이다. 지나치게 외설적이거나 체제 전복적인 영화 혹은 폭력적인 작품인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백번 양보해서 그런 판단을 과연 누가, 어떤 기준으로 하느냐의 여부를 떠나 그 필요성을 인정한다고 치자. 문제는 제한상영가 작품의 경우 국가가 지정하는 제한상영관에서만 상영해야 한다는 강제 조항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에는 제한상영관이 없다. 아니 있을 수가 없다. 형식 논리상 모순이기 때문이다. 1년에 두세 편, 많아야 열 편 정도가 이 등급을 받게 되는데 그 편수를 가지고 극장 운영의 채산성을 맞출 수는 노릇이다. 그 누가 막대한 돈을 들여 수익성이 전혀 없는 제한상영관을 운영하겠다고 나서겠는가.

그렇다면 제한상영가 등급의 작품을 양산하기라도 해야 할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다. 그러니까 결국 이런 뜻이 된다. 제한상영관은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가상의 극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한상영가 등급으로 심의 결과가 나오면 해당 영화는 상영하지 말라는 의미가 된다. 실질적인 검열 행위에 다름 아니다.

김기덕 감독이 분통을 터뜨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신작 <뫼비우스>는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았다. 주인공 조재현이 자신의 성기를 자르는 장면 등등 지나치게 잔혹한 장면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 감독은 결국 문제로 지적된 장면을 자진 삭제하고 18세 등급을 받았다. 그리고 외국으로 나갔다. 유럽에서 마에스트로 칭호와 대우를 받는 그는 얼마 전 베니스영화제에서 <뫼비우스> 무삭제판으로 기립박수를 받았다. 김 감독은 이제 유럽에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는 작가의 이미지까지 얻게 된 셈이다.

‘제한상영가’는 종종 정치적인 억압 기제로도 활용된다. 김선 감독이 만든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는 선정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명백히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정부를 풍자하고 비판했다는 것이 이 등급을 받게 된 원인이 됐다. 김선 감독은 서울행정법원에 자신의 영화에 대한 제한상영가 조치는 부당하다는 행정소송을 냈고 결국 승소했다. 그러나 영화는 6개월 동안 상영되지 못했다. 영화는 적절한 시기에 상영 기회를 놓치면 시장에서 생존하기 어려운 특수한 문화 상품이다. 결국 정부가 이 영화의 생명선을 끊어놓은 셈이다.

“검열은 위헌” 헌재 판결 정신 살려야

제한상영가 등급은 폐지돼야 한다는 것이 영화계의 중론이다. 1996년 헌재의 판결 정신을 올바로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17년간 영화계가 줄기차게 요구하고, 때론 간청하고, 때론 저항했지만 이 문제는 요지부동으로 풀리지 않았다.

모든 영화는 상영돼야 한다. 그것이 포르노그래피라면 형법과 청소년보호법으로 차단하면 된다.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기존 법률로 논쟁할 일이다. 영상물등급위원회는 기준만 제시하는 역할이어야 한다. 직접 상영을 금지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닫힌 부분이 많다. 정치적으로 곳곳에서 ‘앙시앵레짐’(모순적이며 불합리한 사회적 제도)의 조짐이 준동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표현의 자유 보장 측면에서 앞으로 나아갔다가 뒤로 후퇴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제한상영가 문제가 계속되는 논쟁의 감옥 속에 갇힐 가능성이 큰 이유다.

그럴 때 영화작가에게는 두 가지 무기밖에 없다. 바로 성(性)과 폭력이다. 영화작가들을 정치적으로 혹은 자본의 힘으로 자꾸 누르면 그들은 이렇게 반응한다. ‘너희들이 그렇게 세? 진짜로 센 걸 보여줘? 그럼 이거 한번 봐봐.’ 사회가 자꾸 닫힐수록, 사람들의 생각을 억압하려 들수록 감독들은 오히려 더욱 성기 노출을 감행하고 심지어 그것을 자르는 행동까지 취하려고 할 것이다. 어떻게 영화가 그런 것들을 보여주려 하냐고? 그건 결국 관객들 스스로가 판단하게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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