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영웅이고 누가 패자인지 드러내고 싶었다”
  • 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3.09.11 14:5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삼국지’ 소재 아동만화 펴낸 이현세

“죽어본 적 있어?”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까치’ 오혜성이 뱉는 첫말이다. 단 세 어절로 짧게 독백하며, 오혜성은 독자를 향해 눈을 부릅뜬다. 그가 묻는다. 죽음에 빗댈 만큼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자신을 내던져본 적이 있는지를. 날카로운 눈매, 굵고 각진 턱 선을 지닌 얼굴에 그림자가 짙다. 위압적이다. 세상과 불화하는 남자 특유의 긴장감을 내뿜는다.

‘까치’는 만화가 이현세의 ‘페르소나’다. 이현세의 작품 세계 속 주인공은 언제나 오혜성이거나 그와 유사한 캐릭터다. 이현세는 외골수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자신의 분신으로 삼는다. 모험하고 도전한다. 고통스럽지만 감내한다.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앞만 보고 나아간다. 어쩌면 이현세의 만화는, 작가 스스로가 갈망하는 야수적인 남성상을 ‘오혜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수행해온 역할극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현세가 ‘삼국지’를 그렸다. 3년의 작업 끝에 총 10권 분량의 <만화 삼국지>를 펴냈다. 삼국지야말로 ‘남자의 냄새’가 물씬한 텍스트다. 수많은 영웅호걸이 등장하며 장렬한 서사를 만들어낸다. 붓과 펜으로 야성·남성성을 구현해온 이현세의 눈이 삼국지로 향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 시사저널 전영기
세상 어디도 없는 ‘이현세 삼국지’ 꿈꾸다

“‘진수의 삼국지’도 ‘나관중의 삼국지’도 아닌 ‘이현세의 삼국지’다.” ‘거장’의 포부에서 힘이 느껴졌다. 자신의 이름을 붙여 삼국지를 거론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가 해석해온 삼국지를 ‘이현세 세계’에 불러들였다. 자신만의 문제의식과 시각을 바탕으로 작품을 재해석했다.

이현세의 삼국지는 우직하다. 곧고 단순하다. 대의명분, 전략, 전술 등을 둘러싼 만화가 아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인물이다. 인물이 시대를 돌파하면서 어떤 캐릭터로 각인됐는지를 파고든다. “내가 본 삼국지는 ‘영웅’과 ‘패한 자’에 대한 기록이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누가 영웅이 되고 누가 패자(敗者)가 되는가가 내겐 중요하다. 왜 삼국지의 주인공이자 영웅은 유비인가. 훨씬 더 뛰어난 치세의 리더십을 지닌 조조보다, 전쟁을 최소화하고 외교를 우선했던 처세의 군주 손권보다 왜 유비가 더 영웅인 것처럼 각인될까.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누군가는 영웅으로, 누군가는 패자로 평가받는 이유를 드러내려 노력했다.”

이번 작품에서도 그는 ‘남자’를 그렸다. ‘작가의 말’에서 이유를 밝혔다.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엄혹한 1960년대에 혼자 버려졌다. 그에게는 ‘인생 최초의 남성’이 없었다. 대신 만화가 그를 남자로 만들었다. ‘다행히도 어린 시절 나를 남자로 키워준 것은 어디서나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스포츠 만화와 히어로 만화였다. 당연히 스포츠 만화의 일관된 덕목은 우정과 사랑, 도전(꿈)과 승리였고 히어로 만화의 일관된 덕목은 어쨌거나 정의였다. 나는 그렇게 비틀거리면서도 남자로 성장할 수 있었고, 조금이나마 세상을 알게 됐다. 이것이 내가 삼국지를 그리게 된 이유이자 힘이다.’

삼국지 속 이현세의 페르소나는 조운(조자룡)이다. “조자룡에게는 생각이 없다. 주군을 향한 충절, 피 끓는 전투혼만 가진 가장 순수한 무장이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대다수 인물은 출세욕, 자존심 등 갖가지 생각에 시달린다. 조자룡만은 그런 것이 없는 인물로 그렸다.” 단순 무결한 무사의 자태다. 자연스레 ‘까치’ 오혜성의 고집스러운 표정이 겹친다.

그럼에도 ‘만화 삼국지’는 아동만화다. 이현세는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이 있어 삼국지를 그렸다. 남성성을 추구하며 그토록 찾고자 했던 ‘야성의 DNA’가 화두다. “독립 정신, 자유라는 기쁨, 진정으로 나를 존중하는 자존감이 다 야성에서 나온다.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이를 기를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아니다. 아이들이 방에 갇혔다. 골목을 잃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집착하며 개인의 세계에 침몰한다. 지금의 아이들에겐 무언가 결여된 느낌이 든다.”

이현세는 삼국지를 그리는 과정이 ‘세상이 궁금한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남자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 작업’이었다고 평했다. 그래서 이현세는 ‘야성의 DNA’를 강조한다. 삼국지를 통해 아이들에게 야성의 DNA를 일깨우고 싶었다. 태초부터 먼 곳을 바라보며 ‘저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하는 야성의 DNA 덕에 인류가 발전해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9월3일 서울 개포동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한 이현세 작가. 작업대 위에 의 원화가 놓여 있다. ⓒ 시사저널 전영기
‘동양적 그래픽 노블’ 시도

<만화 삼국지>에는 기술적으로도 큰 도전이 필요했다. 방대한 분량의 삼국지를 10권 분량의 만화로 압축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현세의 화풍에선 공간을 크게 활용하며 그림의 스케일을 살리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이야기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서는 ‘그림맛’과 ‘글맛’이 모두 살아 있어야 했다. 단순한 상황 서술 외에도 시적인 표현법을 활용하고, 장면이 전환되는 곳에서 어떻게 오버랩해야 할지 신경 쓰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해야 했다.

이현세는 <만화 삼국지>를 통해 ‘동양적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을 시도했다고 밝혔다. 그래픽 노블이란 만화와 소설의 중간 성격을 띠는 장르로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가진 작가주의적 작품 성향을 띤다. 서양의 경우 관련 시장이 활성화돼 있으나 한국은 그렇지 않다는 평가가 많다. 그는 “이번 작품이 시장에 나가서 어느 정도 호응을 얻는다면 후배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작업했다”고 말했다.

이번 작품뿐 아니다. 만화가로서의 이현세는 항상 도전하는 삶을 살았다. 데뷔 직후에는 아동만화를 그렸다. ‘까치’를 등장시킨 초기작들이 큰 사랑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만화 세대’의 출현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당시의 만화 시장이 탐탁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만화는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편견이 지배적이었다. 착하고 건전한 내용만 그리라고 하니 그리고 싶은 욕구를 충분히 풀 수 없었다.”

그래서 성인만화에 뛰어들었다. 당대 현실을 치밀하게 녹여낸 작품부터 가상의 시공간을 다룬 판타지물까지 종횡무진했다. 그를 비롯한 작가들의 분전으로 한국 만화의 독자층은 확대됐다. <천국의 신화>를 썼을 당시에는 청소년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6년간의 공판 끝에 무죄를 받기도 했다. 이로 인해 촉발된 논란은 창작물 심의·검열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를 진척시켰다. 그는 “만화가로서 그 누구보다 행복했던 삶이었다. 운이 좋았던 탓에, 개인이 걸어가는 길이 역사가 될 수 있었다. 대단한 행운”이라고 말했다.

그랬던 그가 최근 10여 년 동안에는 아동만화를 그렸다. 역사를 다뤘다. 한국사, 세계사, 중국의 삼국시대가 차례로 소재가 됐다. 소재의 특성상 각각의 분량이 방대하다. 한 작품당 3~4년 이상이 소요됐다. 역사와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이다. 과거 <천국의 신화>를 그릴 때 한국 고대사에 접근한 것이 계기였다. 실증 사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우리 역사의 많은 부분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 개탄스러웠다. 서구 중심, 혹은 지배 계급 중심의 역사 서술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문제의식과 시각을 담아 역사를 그려 보고자 했다. 자연스레 대상 독자는 아동이 됐다. 어린 시절부터 역사를 재미있게 잘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국 만화 르네상스 충분히 가능”

이현세는 한국 만화계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인정받는다. 그런 그가 지금의 만화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했다. “지금보다 만화가가 되기 쉬운 적이 없다. 그리고 싶다면 페이지 수 제한 없이 무제한으로 자기 콘텐츠를 공급할 수 있었던 적도 없다. 사회나 가정에서 만화 그리는 일이 이렇게 응원받았던 적도 없다. 이른바 ‘원천 콘텐츠’로 인정받기도 한다. 과거에 비해 정말 환경이 좋아졌다.”

물론 우려도 있다. ‘책을 만들기 어렵다’는 것이다. 무료 웹툰 중심으로 시장이 빠르게 재편된 탓이다. 만화 콘텐츠가 어떻게 수익 창출로 이어질 것인지는 그에게도 고민거리다. 그래도 그는 희망을 얘기한다. “지금 소비자가 만화를 배척하는 건 아니지 않나. 함께 고민하고 힘을 모아 극복할 문제다. 지금 독자들이 만화를 사랑하고 있는 만큼 곧 한국의 만화 르네상스도 가능할 것이다.”

70세 이후에는 동화를 소재로 한 만화를 그리고 싶다고 했다. 70대 노인의 눈으로 손자·손녀에게 전해줄 작품을 그리는 것이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그는 50대 후반이다. 아직 10여 년의 시간이 남아 있다. 그동안 만화가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 중이다. 일단 어떤 형태로든 연재를 재개할 생각이다. 모바일, 웹, 전자책 등 다양한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 예순을 눈앞에 둔 ‘거장’은 여전히 도전을 꿈꾼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