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군본부에서 대선 책임자 명단 올리라고 지시했다”
  • 이승욱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3.09.11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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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향군 추천 ‘지역장’의 새누리당 임명장 단독 입수

‘불법 대선 개입’의 또 다른 판도라 상자가 열리는 것일까.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의혹에 이어 대한민국재향군인회(향군)도 지난해 18대 대선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향군은 전국 재향(在鄕) 군인의 친목 단체이지만, 향군법 제3조 제1항에 따라 정치 활동을 할 수 없도록 규정돼 있다. 그럼에도 그동안 향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둘러싼 논란은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향군은 NLL 논란과 대북 정책, 한미동맹 등 국방·안보와 관련해 일관되게 보수 성향을 견지해왔다.

향군과 새누리당 등 보수 정당이 일종의 ‘정치적인 밀월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혹을 사는 대목이다. 특히 공식 회원 850만명, 향군 본부와 13개 시·도회 등을 중심으로 전국 3296개 읍·면·동까지 뿌리내리고 있는 거대한 조직망을 갖춘 향군이 선거에 직·간접으로 개입할 경우 그 파괴력은 클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지금의 야당과 향군 개혁론자들은 역대 대통령 선거 등 주요 선거 이슈 때마다 향군의 개입을 의혹의 눈초리로 지켜보며 우려해왔다. 이러한 우려는 지난 대선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이런 가운데 <시사저널>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된 지난해 12월 대선에서 향군 차원의 선거 개입을 했다는 의혹을 집중 취재했다.

2012년 10월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향군 창설 6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가 향군 관계자들과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 뉴스뱅크 이미지
“지난해 10월 향군본부 복지부장이 지시”

<시사저널>은 지난 8월 초 향군 측 내부 인사로부터 향군의 2012년 대선 개입 의혹과 관련한 제보를 처음 접했다. 제보 내용을 요약하면 이랬다. “대선을 앞두고 향군본부 차원에서 일부 시·도회로 지시가 내려갔다는 말이 있다. 시·도 산하의 시·군·구회 단위별로 선거 책임자를 선정해 명단을 올리라는 지시였다고 한다.”

이 인사의 제보는 구체적이었다. 특히 대선 개입과 관련해 향군본부의 전·현직 임직원과 당시 지시를 받았던 향군 관계자의 직책도 구체적으로 거론됐다. <시사저널>은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제보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지난 한 달여간 확인 취재를 벌였다. 우선 향군본부로부터 구두 지시를 받은 것으로 지목된 향군 경기도회(경기향군)를 중심으로 취재를 했다. 경기향군은 향군본부 산하 전국 시·도회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일단 향군본부의 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지난해 10월 당시 경기향군 직원을 중심으로 관련 증언을 확보하고자 했다. 수소문 끝에 경기향군의 전 직원 몇몇을 만나거나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이들은 실제 제보 내용과 상당히 부합하는 증언을 했다.

전직 경기향군 직원 ㄱ씨는 “지난해 10월 경기향군에서 일할 때 향군본부에서 복지부장으로 근무했던 박 아무개 전 부장(올 7월 말 퇴직)이 전화를 걸어와 (선거와 관련해) 시·군의 지역 책임자(지역장)를 선정해 올리라고 지시한 것은 사실”이라며 “대통령 선거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대선을 앞둔 때여서 (박 전 부장의 지시가) 당연히 대선과 관련된 것이라고 이해했다”고 말했다. 이는 다른 전 직원 ㄴ씨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ㄴ씨는 “ㄱ씨가 향군본부의 박 전 부장으로부터 대선과 관련해 시·군회에 지역장 1명씩을 선정해 보고해달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며 “ㄱ씨는 ‘법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 있어 도저히 지시를 따르지 못할 것 같다’며 고민했다”고 밝혔다.

당시 직원들에 따르면, 박 전 부장의 지시 사항을 경기향군 신 아무개 회장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신 회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당시 상황과 관련해 “비공식적으로 (향군 직원들 사이에서 대선을) 잘해보려는 의미로 이야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일절 관여를 해서는 안 된다고 중단시켰다”고 말했다. 그러나 직원들의 증언은 다르다. 직원들은 “(보고를 받은 후) 신 회장이 향군본부 선거 업무 지시는 따라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말했다”며 “이에 따라 시·군회 사무국장에게 관련 지시를 전달하고 지역장 1명씩을 선정해 보고하라고 당부했다”고 말했다. 경기향군 전직 직원들에 따르면, 실제 도내 31개 시·군회 중 상당수의 지역장이 선정돼 박 전 부장에게 보고됐다는 것이다.

서울 성수동에 위치한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본부. ⓒ 시사저널 임준선
향군 전직 국장, 박근혜 캠프 상임특보 임명

이들은 특히 “박 전 부장이 지역장은 현직 향군 조직의 임직원을 제외하고 선정하라”고 지시했다는 사실도 밝혔다. 향군의 현직 임직원이 지역장으로 선정될 경우 향군법 위반 등 논란에 노출될 우려를 감안한 조치라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경기향군 전직 직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엔 ㄱ씨처럼 한 지역 향군 관계자도 향군본부의 지시를 거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역장 대상자가 향군 임직원이든 아니든 지역장 선정 등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향군 내부에서도 심각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향군본부에서 지시한 당사자로 지목된 박 전 부장은 이에 대해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박 전 부장은 “시·도회 직원들에게 대선과 관련해 어떤 지시도 한 바 없다”며 “(조직 업무를 관장하는) 조직부장이 별도로 있는데 일개 복지부장이 그런 지시를 할 입장이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이런 가운데 주목되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다. 향군 전직 간부인 김 아무개씨의 행보다. 김씨는 육군 장성 출신으로 지난해 7월 말까지 향군의 조직복지국장으로 일했다. 박 전 부장이 재직할 당시 직속상관이었던 셈이다. 김 전 국장은 박 전 부장의 ‘대선 지역장 명단 보고’ 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지난해 10월, 박근혜 당시 대선 후보의 중앙선대위에서 직능총괄본부 소속 상임특보(직능)로 임명됐다. 그는 지난 2007년 대선 경선 때에도 박 후보의 선대위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향군본부의 대선 개입 의혹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만난 관계자들 입에서도 김 전 국장의 이름이 나왔다. 김 전 국장 역시 박 전 부장과 마찬가지로 대선 지역장 선정과 관련해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ㄱ씨는 “일부 (지역장) 명단을 누락해 올리자 김 전 국장이 전화를 해 ‘지역장 선정을 제대로 한 것이냐’고 따져 물었다”고 말했다. ㄴ씨 역시 “지역장 선정을 보고받지 못한 ○○군회 회장이 김 전 국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후 경기향군에 항의 전화를 했고, 그 과정에서 김 전 국장의 존재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군회 회장은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지역장 선정을 하라는 지시를 경기향군의 ㄴ씨가 당시 ○○군회 사무국장을 통해서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부적절한 일로 명단을 올리지 말라고 이 군회 직원에게 지시했고, 김 전 국장과는 이와 관련해 이야기를 나눈 바는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 전 국장은 <시사저널>의 확인 취재에서 박 전 부장과 마찬가지로 의혹을 부인했다. 그는 “박 전 부장에게 (대선과 관련한 지역장 선정 등을) 지시한 적이 결코 없다”며 “지난해 10월이면 이미 향군본부를 그만둔 상태로 향군과도 관련이 없을 때의 일”이라고 밝혔다.

향군 측과 의혹 당사자들 “사실무근”

하지만 이 두 당사자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의혹은 여전히 남는다. <시사저널>은 경기향군을 통해 지역장으로 선정된 일부 인사가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중앙선대위로부터 받은 임명장 사본을 취재 과정에서 확보했다. 본지가 확보한 4장의 임명장은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박근혜’의 직인이 찍혀 있으며, 지역장으로 선정된 인물 2명이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임명장 양식과 우측 상단 부분의 등록 번호 등은 언론을 통해 공개된 새누리당의 공식 임명장과 동일한 형태였다.

특히 임명장을 받은 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지난해 11월2일 ‘직능총괄본부 안보1본부 호국안보연합’의 시·군별 대책위원장으로 임명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새누리당 중앙선대위에서 직능총괄본부 상임특보로 활동했던 김 전 국장의 영향력이 작용했을 개연성이 큰 대목이다. 하지만 김 전 국장은 임명장과 관련해 “대선 캠프에서 일하기는 했지만 임명장 수여 등은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향군본부와 지역 향군의 전·현직 임직원과 관련한 대선 개입 의혹이 제기되면서 파문이 일 것으로 예상된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강기정 의원(민주당)은 “향군은 법적으로 정치 활동을 할 수 없도록 규정돼 있는 만큼 대선 개입과 관련한 의혹이 있다면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면서 “향후 국정감사 과정에서 사실 관계를 면밀히 살펴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향군본부 관계자는 “향군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그동안 부단히 노력해왔다”며 “(제기된 의혹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향군본부 차원의 선거 개입 의혹 등을 부인했다.  


본지가 입수한 ‘대선 지역장’의 새누리당 선대위 임명장 사본.
재향군인회(향군)에서 2012년 대선 관련 지역장(지역 책임자)으로 선정·추천됐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지난해 대선에서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호국안보연합대책위에서 지역별 위원장으로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시사저널>이 확보한 임명장을 통해 볼 때, 이들이 소속된 호국안보연합대책위는 중앙선대위 직능총괄본부 산하 안보1본부 소속인 것으로 추정된다.

18대 대선 당시 새누리당 중앙선대위의 조직 체계에 따르면, 안보1본부는 직능총괄본부 산하 제1직능본부에 배치돼 있다. 제1직능본부는 총 12개 본부로 구성돼 있었는데, 이 가운데 안보1본부, 안보2본부, 보훈본부 등에는 군 장성 출신 국회의원들이 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안보1본부장은 기무사령관(중장) 출신인 송영근 새누리당 국회의원(비례·육사 27기)이 맡았다. 송 의원은 향군 정책자문위원으로 일한 이력이 있다.

대선 지역장들은 또 호국안보연합대책위원장 이외에도 새누리당 선대위에서 조직총괄본부, 종합상황실 등 다른 조직에서도 특보 등 별도의 직함으로 복수의 임명장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새누리당 선대위 차원에서 대선 지역장 명단을 활용해 다수의 임명장을 발부하는 데 활용한 셈이다. 지난 대선 당시 새누리당과 외곽 조직 등을 통해 선대위 특보나 위원장 등의 임명장이 무차별적으로 남발돼 논란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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